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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석굴암 감실보살상과 팔대보살 도상문제

기자명 주수완

석굴암 본존불의 불교사상 근거 파악에 중요 단서

▲ 석굴암 본실 감실보살 배치도. 전면 입구 좌우의 감실은 현재 비어 있으나 위 그림처럼 소형석탑이 봉안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근래 제기되었다.

지난 글에서 다룬 석굴암의 10대제자상에 이어 오늘 소개할 감실보살상 역시 많은 논쟁거리를 낳고 있다. 감실보살상은 석굴암 후실의 10대 제자가 둘러선 벽 바로 위로 천정의 돔이 시작되는 부분에 둘러선 총 10개의 감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안에 봉안된 보살상들을 말한다. 감실은 10개이지만 현재 2개는 비어 있어서 모두 8구의 상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혹자는 비어있는 두 개의 감실에 있던 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초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게(曾根荒助)가 가져갔다고도 했다.

본존불 정체 놓고 석가모니불
아미타불·비로자나불 등 분분

보살 성격 팔대보살로 규명에
많은 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해
석가모니 팔대보살 해석이 다수

석가모니 팔대보살은 밀교에서
다루며, 8은 모든 방위 아울러
우주 두루 편재한 모습 시각화
불공계와 선무외계 놓고 이견도

근래엔 두 감실에 보살상 없이
본래 석탑이 있었을 것 주장도
팔대보살 근거 기존 학설 부정

언뜻 이 감실 속의 보살상들은 석굴암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크기도 작고, 높이 올라가 있으니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그러나 높이 있어서 작아 보이는 원인도 있고, 거기다 다른 존상들의 크기와 비중에 가려서 그렇지 실제 올라가보면 감실은 사람이 들어가 앉을 정도의 크기이며, 그 안에 안치된 보살상도 등신대에 가까울 정도로 크다. 나아가 다소 근엄하고 정적인 석굴암의 다른 조각상들과 달리 매우 유려하고 자유분방한 자세로 앉아있어서 마치 잔뜩 경직된 긴장감을 이완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 고려 아미타 팔대보살도. 그러나 석굴암 감실보살상은 석가모니 팔대보살로서 구성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불교도상을 밝히는데 있어 보살상의 도상은 매우 중요하다. 본존불의 수인(手印), 즉 손모습도 중요하지만, 수인만으로 확인되지 않을 때는 양옆에서 어떤 보살들이 협시하는가 하는 점이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예를 들어 관음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면 주존불이 아미타불이 되고, 문수보살이 협시를 하고 있으면 석가모니불이 되는 등등이다. 따라서 석굴암의 본존불이 어떤 불교사상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알아내는데 있어 이들 감실보살상은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더군다나 석굴암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라는 설, 아미타불이라는 설, 나아가 비로자나불이라는 설까지 분분하여 많은 학자들이 이들 감실보살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감실보살의 성격을 팔대보살로 규명한 것은 대체로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감실은 10개인데 팔대보살, 즉 여덟 분의 보살로 규정하는 이유는 현재 남아있는 보살상 중에서 ‘유마경’에 등장하는 유마거사로 확인되는 상이 1구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마거사는 항상 문수보살과 문답을 나누며 함께 조성되므로 유마거사가 있다는 것은 나머지 9개 감실 중에 하나는 문수보살을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10개 감실 중에서 두 개의 감실에는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봉안된 것으로 하고, 나머지 8개의 감실에 팔대보살이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게 된 것이다.

▲ 위 좌측은 사유자세를 하고 있어 미륵보살로, 우측은 경책을 들고 있어 문수보살로 보기도 한다. 아래 좌측은 지장보살, 아래 우측은 유마거사로서 분명히 도상을 파악할 수 있는 상이다.

남은 보살이 여덟 분이므로 팔대보살로 보는 것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팔대보살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문제가 간단하지가 않다. 일반에 흔히 알려진 팔대보살은 고려불화 중 아미타 팔대보살도에 등장하는 아미타불의 여덟 협시보살로서의 팔대보살이다.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중심으로 지장보살까지는 널리 알려진 보살이다. 하지만 나머지 보살들이 어느 분들인지는 확정된 것이 아니다. 관음보살은 보관에 화불, 세지보살은 정병, 그리고 지장보살은 삭발한 승려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금방 구분이 된다.

반면에 석굴암의 팔대보살은 아미타 팔대보살과는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故) 황수영 박사 같은 분은 석굴암 본존불을 아미타불로 보았기 때문에 아미타 팔대보살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많은 학자들은 그보다는 석가모니불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아미타 팔대보살과는 다른, 석가모니 팔대보살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석가모니의 팔대보살은 주로 밀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8’이라는 숫자부터가 이미 ‘사방팔방’이라고 할 때의 팔방, 즉 모든 방위를 아우르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방위를 중요시하는 것은 밀교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팔대보살이 둘러서서 온 우주에 두루 편재하는 불법의 모습을 시각화한 것이다.

그런데 밀교의 종파에 따라 팔대보살의 구성과 도상이 조금 다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불공(不空, Amoghavajra, 705~774)이 번역한 ‘팔대보살만다라경’이 팔대보살을 해석하는데 주요 근거로 인용되었다. 이 경에 의하면 팔대보살은 1)관자재(관음), 2)금강수, 3)문수, 4)보현, 5)자씨(미륵), 6)허공장, 7)지장, 8)제개장의 여덟 보살이다. 우선 아미타 팔대보살과 가장 큰 차이점은 세지보살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참고로 불공은 인도(실론, 혹은 북인도) 출신으로 스승인 금강지(金剛智)와 함께 해로를 통해 720년 중국으로 건너와 낙양에서 활동하며 중국에서 본격적인 밀교가 확립되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새롭게 선무외(善無畏, Subhakarasimha, 637~735)가 번역한 ‘존승불정수유가법의궤’에 등장하는 팔대보살이 전거가 되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선무외는 인도 오리사 출신으로 날란다 대학에서 달마굽다로부터 밀교를 배운 후 카슈미르를 거쳐 716년 중국에 건너왔다. 이후 당 현종의 귀의를 받는 등 중국에서의 중기밀교 확립에 있어 불공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인물이다. 석굴암 감실보살상이 불공보다는 선무외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은 아무래도 두 사람의 나이 차이로 인한 활동연대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선무외가 716년, 불공은 720년으로 두 사람이 중국에 온 것은 불과 4년차이지만, 선무외가 중국에 왔을 당시에는 이미 79세로서 곧바로 현종의 귀의를 받으며 활발한 영향력을 미쳤을 때였고, 불공은 겨우 15세로서 이후 금강지에게 한참 더 배워야하는 시기였다.

▲ 위 좌측은 유마거사와 마주하고 있어 문수보살로 보이고, 아래 좌측은 금강저를 들고 있어서 금강수보살, 아래 우측은 보관에 화불이 있어 관음보살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석굴암 조성이 시작된 시기가 대략 경덕왕대인 8세기 중반, 즉 750년경인데, 그렇다면 45세였던 불공이 비록 중국에서 인정을 받고 활동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석굴암의 설계에 반영되기에는 선무외보다 이른 감이 있다고 판단된다. 이에 반해 선무외의 사상이 석굴암에 반영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어 보인다. 만약 선무외의 사상이 반영되었다면 석굴암의 감실보살은 1)허공장, 2)지장, 3)제개장, 4)자씨(미륵), 5)문수사리동자, 6)지지, 7)연화수(관음), 8)비밀주(금강수)의 여덟 보살로 구성된다. 배치순서는 차치하고 일단 존명만 보면 ‘팔대보살만다라경’의 팔대보살에 등장했던 보현보살 대신 지지보살이 등장한다는 것이 주목된다. 그래서 팔대보살 중에 보현보살이 들어가 있는지, 지지보살이 들어가 있는지 파악되면 불공계인지, 선무외계인지 쉽게 구분이 되겠지만, 이 두 분 보살님은 도상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아서 어느 분이 어느 분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대신 불공계 팔대보살에 등장하는 문수보살은 주로 칼이나 금강저의 일종인 오고저(五股杵)를 들고 있어야 하는데 석굴암에 그런 도상이 없다는 것은 불공계 팔대보살이 아니라는 근거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불공계인가 선무외계인가 하는 점은 밀교도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에서 중기밀교는 만다라가 태장계 만다라, 금강계 만다라로 나뉘는 것처럼 크게 태장계와 금강계로 나뉘는데, 그 각각의 소의경전이 되는 ‘대일경’은 선무외가 번역했고, ‘금강정경’은 불공이 번역하여 각각 양계 밀교의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양계 만다라의 팔대보살로 보는 해석은 기본적으로 현재 비어 있는 두 개의 감실에도 원래 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들을 포함해야 팔대보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롭게 처음부터 이 두 감실에는 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지 않았다는 설이 근래 제기되었다. 대신 그 안에는 석굴암 출토로 전하는 작은 석탑이 하나씩 들어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만약 그렇다면 감실보살상이 팔대보살에 근거했다는 기존의 학설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과연 석굴암의 마스터플랜에 중국으로서도 새롭게 확립되고 있었던 선무외, 혹은 불공의 중기밀교가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에 대해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는 상황이 되었다. 만약 팔대보살이 아니라면 이 보살들은 대체 누구일까? 이전에도 팔대보살 대신 유마·문수를 제외한 6구의 보살을 둘 씩 짝을 지어 각각 관음+금강수, 문수+보현, 허공장+지장보살이라는 협시로서의 의미를 지니면서 석굴암 본존불이 보다 다양한 존격의 의미를 중첩해서 지니고 있음을 의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제기된 바 있기는 하다.

▲ 석굴암 본실 전면의 비어있는 두 감실. 일제강점기 석굴암 수리 이후 촬영된 사진. 소네 통감이 가져갔다는 설이 있었으나 여기에 탑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감실보살들의 위치가 과연 원래의 위치인가의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유마·문수는 현재 가장 안쪽에서 마주보고 있지만, 원래 중국 석굴에서는 입구 좌우에 배치되기 때문에 이 위치부터 잘못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렇듯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실들은 알고 나면 도대체 의심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없다. 그렇다고 학문을 포기하거나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학문은 세상에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52호 / 2016년 7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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