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6. 부석사 무량수전 부처님이 옆으로 돌아앉은 까닭?

기자명 주수완

아미타불인가? 석가모니불인가? 해석 놓고 의견 분분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고려시대. 국보 제18호. 우리나라에 몇 채 남아있지 않은 고려시대 건축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으로 꼽힌다.

영주 부석사는 의상대사께서 창건한 사찰이며, 이곳의 법당인 무량수전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려시대 건축물로 널리 소개되고 있다. 고려시대 건축은 그 밖에 강릉의 객사문, 북한의 심원사 보광전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 중에서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꼽는다면 단연 부석사 무량수전이 아닐까. 다섯 칸이나 되는 장중한 평면구성, 그러면서도 하늘로 날아올라갈 것 같은 경쾌함이 조화를 이루고, 장식을 절제하면서도 구조부재의 짜임새 자체가 마치 장식처럼 보이는, 그래서 단순하면서도 화려함을 두루 갖춘 아름다움은 동양 고전 건축의 백미라 하겠다.

무량수전이기에 아미타불이고
서쪽에서 우리가 있는 세계 보니
동쪽으로 앉았다는 게 일반 해석

편단우견에 항마촉지인 한 불상
아미타 아닌 석가모니불의 모습

최근엔 상당부분 원형유지 추정
무량수전은 본래가 강당이었고
그 아래 금당 있었을 것 주장도

의상대사 창건 당시 모습 알면
부처님이 돌아앉은 이유도 해결

그런데 누구든 이 무량수전 안에 들어서면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이 불전에 모셔진 부처님이 정면을 향하신 것이 아니라, 길다란 건물의 서쪽 끝에서 동쪽을 향해 돌아앉아 계시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인 봉안 방식과 비교해보면 파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의 자리는 항상 가장 높고 중요한 자리인 가운데이어야 하고, 그래서 엄격한 좌우 대칭을 이루는 것이 상식처럼 생각되는데 반해 부석사 무량수전의 불상배치는 분명 특별한 사연이 있어 보인다.

▲ 무량수전 내부의 동쪽으로 돌아앉은 부처님. 아미타불로 인식되고 있으나, 석가모니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했지만, 현재의 모습이 얼마나 의상대사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진행중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제기된 해석은 불전의 명칭이 ‘무량수전’이므로 이 부처님은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이시고,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를 주관하는 부처님이므로 우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서방, 즉 서쪽 방향에 계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서쪽에서 우리가 있는 세계를 바라보시기 때문에 동쪽으로 돌아앉아 계시다는 해석이다. 이 설명은 특히 부석사의 ‘원융국사비문’을 통해서도 그 정황을 엿볼 수 있어서 매우 자연스럽다. ‘원융국사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 절(부석사)은 의상조사께서 중국에 유학하면서 화엄의 법주(法炷)를 지엄(智儼)으로부터 전해 받고 귀국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본당인 무량수전에는 오직 아미타불의 불상만 봉안하고 좌우보처(左右補處)도 없으며 또한 불전 앞에 영탑(影塔)도 없다…”

원융국사 결응(決凝, 964~1053)은 고려시대의 승려로서 28세에 대덕이 될 만큼 학덕이 깊었으며, 1041년에 부석사에 들어와 1053년 이곳에서 입적할 때까지 의상의 화엄학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비문에 의하면 분명히 무량수전 안에 아미타불을 봉안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보통 아미타불은 관음·세지보살을 좌우 보처보살로 두고 있지만, 여기서는 화엄에 의거한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협시보살을 따로 모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석사에 탑을 세우지 않은 것도 화엄에 기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 경북 군위 삼존석굴. 본존불은 항마촉지인이지만 협시보살을 통해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 안에 아미타불이 봉안되는 현상은 당연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분명히 아미타불상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 모습이 편단우견, 즉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상태에서 항마촉지인, 즉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 마귀들을 항복시키기 위해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자세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이름은 아미타불인데 모습은 석가모니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학자들은 ‘항마촉지인’이란 석가모니불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나 약사불 등에 두루 사용되었다는 견해를 제기하게 되었다. 거기다 군위삼존석굴의 본존불도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지만 좌우 보살의 보관에 각각 화불과 정병이 묘사되어 있어 관음·세지보살이 분명하므로 이 역시 항마촉지인을 결한 아미타불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런 두 가지 근거에 의해 석굴암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지만 아미타불일 수 있다는 해석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화엄에 근거한 아미타불은 협시가 없어도 되었을까? 마침 의상의 제자도 이것이 궁금하여 질문을 했던 듯한데, 의상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의상대사께서 답하기를, “법사이신 지엄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승(一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열반에 들지 아니하고 시방정토를 체(體)로 삼아 생멸상(生滅相)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이르기를,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로부터 관정(灌頂)과 수기(授記)를 받은 이가 법계(法界)에 충만하여 그들이 모두 보처(補處)와 보궐(補闕)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비문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 듯하다. 즉, ‘일승’을 강조한 화엄에서는 불과 보살의 구분이 따로 없기 때문에 정토신앙에서의 아미타와는 달리 불과 보살을 구분하지 않아 협시보살이 조성되지 않았고, 나아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에서는 모두가 보살이므로 굳이 관음·세지보살이라는 특정한 보살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해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연유로 현재의 무량수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의 현상은 대체적으로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부처님이 동쪽으로 틀어 앉으신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여기에는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부처님은 의상대사 당시의 것이 아니라 한참 후인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이어서 의상대사의 의도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지 연구자들은 다소 회의적인 시각으로 이 비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근래 부석사가 보다 세밀하게 조사되면서 새로운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우선 부처님이 모셔진 불단 아래에 있는 불대좌를 조사한 결과 그것은 어쩌면 의상대사 당시까지로 연대가 올라갈지 모른다는 사실과 함께, 원래의 불상은 왜구의 침입으로 상당부분 훼손된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X선 조사 등을 통해 보니 일부를 제외하고는 상당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건축사적으로 볼 때 부석사 무량수전 아래에는 법당이 한 채 더 있었고, 어쩌면 그 건물이 중심불전인 금당이었으며, 현재의 무량수전은 강당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까지 대두되었다. 이는 중요한 문제인데 만약 ‘원융국사비문’에 등장하는 아미타불이 사실은 사라진 금당에 봉안된 불상의 이야기였다면, 현재의 무량수전에 있는 불상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래의 금당이 사라지고 난 후에 강당에 무량수전의 편액이 붙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바람에 강당의 석가모니가 아미타불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닐까?

보다 근원적으로 불상이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겐 생소할지 모르지만, 원래 인도불교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었다. 보드가야에서 정각을 이루실 때의 석가모니께서도 뜨는 태양을 향해, 즉 동쪽을 향해 앉아 정각을 이루셨다. 이후로 불교사원이나 불상은 동향하는 것이 하나의 규칙처럼 여겨진 듯하다. 반면 힌두교 사원은 서향하는 것이 법식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도 드물지만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 대전 고산사 대웅전, 그리고 영광 불갑사 대웅전 등에서 유사한 봉안방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마곡사, 고산사, 불갑사 모두 비로자나 혹은 석가모니불로 모셔진 점이 부석사와 다르다.

사실 편단우견에 항마촉지인을 결한 불상이 동쪽을 향해 앉아있다는 사실은 어느 모로 보나 보드가야에서 정각을 이룬 석가모니를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구나 ‘화엄경’이 바로 이 정각을 이룬 후 그것을 음미하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연화장세계의 모습이기 때문에 보드가야에서의 정각장면은 화엄종 미술에서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의상대사는 화엄종을 본격적으로 신라에 소개한 고승이시다. 화엄종을 소개하면서 보드가야의 정각장면을 묘사한 편단우견 촉지인 불상도 멋들어지게 소개하신 셈인데, 아마도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는 동안 멀리 인도의 정보도 얻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의 화엄종 사찰을 보드가야 스타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원융국사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나온다.

“의상대사께서는 화엄정토의 사상을 주창하여 본사(本師) 석가모니 부처님을 아미타불에 비대(媲對)하였으니 영축산으로써 칠보정토를 삼아 항상 안주하시는 보신불(報身佛)로 여겼다.”

영축산은 석가모니를 상징하고, 칠보정토는 서방정토, 즉 아미타불을 상징하는 것이니 이에 의하면 부석사 부처님은 “석가모니불로써 아미타불을 삼아 보신불로 여겼다”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의상대사가 아미타 신앙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기존처럼 아미타불로 보아야한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고려시대 무기(無寄)스님이 찬술한 ‘석가여래행적송’은 보다 분명하게 무량수전 부처님이 동쪽으로 돌아앉으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의상대사는 “오로지 극락을 희구하여 평생 동안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부석사 무량수전도 의상이 서쪽을 보고 수행할 수 있도록 불상을 동향하여 설계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융국사비문’이나 ‘석가여래행적송’은 모두 고려시대의 찬술이다. 신라 통일기의 도상에 고려시대 불교사상가들이 당시의 필요에 따라 아미타의 신앙을 덧씌운 것인지도 모른다. 부석사가 얼마만큼이나 의상대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그 당시 의상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에 둘러 싸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석사의 동쪽으로 틀어 앉은 부처님은 어느 절에서도 보기 힘든 아우라를 뿜어내고 계시니 굳이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56호 / 2016년 8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