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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범종에 달린 음통, 장식일까 기능일까?

기자명 주수완

범종의 음통은 전설적 악기 만파식적을 형상화한 것일까?

▲ 오대산 상원사 동종. 725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범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은 종교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새벽 마을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큰 종에서부터 법당 안에서 낭랑하게 울리는 작은 방울종에 이르기까지 종은 옛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신호의 수단이었다. 물론 북도 있고, 나팔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엄이 있을 뿐 아니라 한 번의 타격으로 가장 오랫동안 소리를 내는데 있어서는 종이 가장 유용했을 것이다.

종의 용 고리에 달라붙은 음통
中 편종에선 손잡이 기능했고
한국선 장식-음향적 기능 견해

악기 만파식적처럼 소리 통해
중생들의 감화 바라는 뜻 해석

타종 후 잔향 오래 울려퍼지는
특성이 음통 때문이라는 추정
종 수명 연장·소리 안정화 영향
일부 실험선 잡음 없애는 결과
상징·기능·역학적 역할 가능성

불교의례를 위해서도 수많은 크고 작은 종들이 주조되었으며 이를 통칭해 범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771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으로 평가받는 상원사 동종(725년), 이성계가 먼저 세상을 떠난 신덕왕후를 그리워하며 흥천사에 세운 후 울릴 때마다 슬피 울었다는 흥천사 동종(1462년), 그리고 가까이는 조선시대 한양의 표준시간을 알렸던 종각, 즉 보신각종(1469년) 등이 유명하다.

한·중·일을 통해서 가장 오래된 종은 중국 남조 진나라 태건7년명 종(575년)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전에도 범종과 비슷하게 생긴 악기로서 춘추시대 증후을묘(曾侯乙墓, 기원전 6세기. 이 종소리를 베이징 올림픽 시상식에도 사용했다고 한다)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편종이 있기는 하다. 악기이므로 크기에 따라 다른 음높이를 가지고 있는데, 큰 것은 웬만한 범종만큼이나 크다. 하지만 불교 전래 이후 범종이 사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지는 않다.

▲ 중국 춘추시대 증후을묘에서 출토된 편종의 세부. 음통과 닮은 통이 달려있지만 손잡이인 ‘용’이고 위도 막혀있다.

다만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 법흥왕대에 불교를 공인한 이후 “법당을 세우고 범종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때 이미 종이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단지 일연의 비유인지, 아니면 법흥왕대부터 실제로 범종이 주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 백제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에서도 종루·경루의 터로 생각되는 건축유구가 발견되기는 했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있었는지, 정말로 범종이 걸려있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범종은 상원사 동종으로 725년에 주조되었다. 그 전에도 범종이 만들어지긴 했었겠지만, 불교사원에서 본격적으로 대형의 동종이 만들어진 것은 이 시기보다 그리 많이 올라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있었다면 어디엔가 기록으로라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문제는 상원사 동종이 우리나라 초창기의 범종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종과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범종이 중국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으니 처음에는 중국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가 점차 우리나라 고유의 형태로 진화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상원사 동종만 놓고 보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독자의 디자인을 확립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 범종은 몇 가지 면에서 중국 범종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예를 들어 중국은 범종을 매다는 고리의 양쪽이 모두 용머리로 되어 있어 두 마리의 용이 올라간 형상인 반면 우리나라는 한 마리의 용이 올라가 있다. 또 종 윗부분에 ‘유곽대’라는 구획을 두고 ‘유두’라고 하는 돋을새김의 꼭지가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 범종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마치 종의 상부와 몸체를 연결하여 못을 밖아 고정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 왜 이런 장엄을 하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용 고리에 달라붙어 있는 음통이라고 하는 대나무 형태의 관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증후을묘에 사용된 편종에도 이런 음통 같은 것이 달려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용(甬)이라고 해서 손잡이 기능을 했다. 편종은 손으로 들고 울리던 용종을 걸어놓고 두드리는 방식으로 바뀌는 과정에 있었고, 이런 방식이 정착된 뒤에는 용도 결국은 퇴화했다.

▲ 상원사 동종의 용모양 고리(용뉴). 대나무처럼 마디를 지닌 화려한 음통은 한국범종만이 지닌 특징이다.

여하간 용종이나 편종의 용이 음통과 비슷하고, 거기다 유두까지 공통적으로 보여서 우리나라 범종의 기원이 용종에 있다는 데에는 대체로 수긍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중국 감숙성 무위의 대운사(大雲寺) 범종 같은 동시대 당나라의 범종이 아니라 춘추시대 이전에 사용되다 사라진 이러한 오래된 종 형태를 신라시대에 다시 되살려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범종에서 음통이 강조되었던 원인에 대해 연구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제시해왔는데, 이를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눈다면, 하나는 장식적 역할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향학적으로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우선 장식적 역할이라는 해석은 그 모양이 대나무를 닮아있다는 속성 때문에 신라의 전설적인 악기인 ‘만파식적’을 형상화했다고 보았다. 만파식적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피리인데, 죽은 문무왕이 자신을 장사지낸 감포의 대왕암 근처에서 대나무를 떠오르게 하고 용을 통해 자신의 아들인 신문왕에게 이를 피리로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하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 피리를 불면 쳐들어오던 적들마저도 스스로 돌아가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하니 그야말로 전쟁이 끝나고 문화로서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의지의 천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만파식적은 현존하지 않지만, 신라의 유물로서 옥피리가 몇 점 전하는데, 대나무 형태로 깍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만파식적을 모델로 한 피리가 후대에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결국 한국 범종의 음통이 대나무 형태를 하고 있는 것도 만파식적처럼 그 소리를 통해 중생을 감화시키는 힘을 지니게 되길 바라는 뜻이 담긴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첫 번째 해석이다.

그러나 이 음통이 단지 장식에 불과한 것이라면 종의 상판에 그냥 붙어있으면 될 것임에도, 실제로는 단지 붙어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종 내부로 구멍이 뚫려 서로 통해있는 형태이다. 때문에 종을 쳤을 때 내부 소리의 진동이 이 음통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음향학적으로 어떤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의 종에 비해 종을 친 다음에 잔향이 더 오래 울려퍼지는 우리나라 종의 특성이 바로 이 음통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닐까 강력히 추정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한·중·일 범종의 구조에 있어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음통이기 때문에 우리 종의 우수성의 비밀이 바로 이 음통에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과학적인 조사 결과 음통이 범종의 소리에 미치는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물론 종의 내부와 서로 통해있는 만큼 소리에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그 영향은 매우 미미했고, 만약 정말로 의미가 있을 정도의 소리 변화를 위해서는 음통이 지금보다 훨씬 길어야만 가능했다. 그렇다고 기능적 요소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단순히 만파식적과 같은 상징성을 위해서만 이런 음통을 달았을까? 아마도 음통을 달기 위해서는 주조상 더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했을 것이고, 중국이나 일본처럼 종을 걸기 위한 용모양의 고리가 좌우대칭이 아니라면 매달았을 때 균형을 잃을 수도 있을텐데, 이런 모험을 감행하면서 굳이 음통을 달았던 이유는 왜일까? 상징적 이유라면 종의 표면에 만파식적이나 대나무 장식을 넣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 설악산 신흥사 동종 내부. 18세기의 작품으로 음통은 사라졌지만 윗면에 구멍은 남아있어서 이 구멍이 어떤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비록 지금의 음향학적 기준으로는 무의미한 시도였지만, 종을 가격할 때의 충격을 빨리 흡수하여 소리는 안정화시키고, 종에 가해진 충격은 줄여서 종의 수명을 늘린다는 해석도 있었다. 어떤 실험결과는 음통이 종 안에서 일어나는 음파의 잡음을 일부 없애준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이 음통이 범종의 주조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다. 보통 흙으로 만든 거푸집에 쇳물을 부으면 많은 가스가 방출된다. 이 가스가 제대로 방출되지 않으면 쇳물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갇혀서 그 부위에는 쇳물이 들어가지 않아 주조에 실패할 수도 있다. 특히 범종처럼 내부가 갇혀있는 경우는 내부 거푸집의 가스 방출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과 밖을 연결하는 음통을 설치하여 이를 통해 내부 거푸집의 가스를 방출시켰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중국이나 일본의 범종은 음통이 없을까?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어쩌면 음통은 우리나라 범종의 독특한 주조방식을 보여주는 흔적일 수도 있다. 원래 범종과 같은 대형의 주조는 고난이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1963년도에 행해진 감마선 조사에 의하면 성덕대왕신종의 두께는 위는 10㎝, 아래는 20㎝로 균일한 두께를 지니고 있어 뛰어난 주조기법을 보여준다고 한다. 과거 연구자들은 상원사종이나 성덕대왕신종 같은 대형 범종은 겉의 문양을 거푸집에 찍어서 만들어내는 ‘사형주조법’을 썼다고 생각해 왔으나, 근래에는 범종에도 밀납으로 원형을 만들고 나중에 녹여내 그 틈에 쇳물을 붓는 밀납주물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 밀납의 재료인 벌꿀을 사용하기 위해 토종벌통 1500~2000통의 양이 필요하다는 결과도 있어 범종의 주물이 당시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하간 우리나라 범종 특유의 음통은 우리나라 미술사상 범종이 등장하던 초창기부터 등장하여 지속된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나름 매우 성공적인 첨가물로 여겨졌음이 틀림없다. 어쩌면 음통은 상징적, 기능적, 역학적 기능을 한데 어우르는 1석3조의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58호 / 2016년 9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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