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2. 권진(勸進)

사바세계서 용맹정진 한 공덕으로
극락세계 아미타여래 궁전서 영접

“저 나라에 태어났을 때, 이 사람은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용맹정진 한 공덕으로 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헤아릴 수 없는 화불(化佛), 백천(百千) 비구의 성문(聲聞) 대중들, 한량없이 많은 천신(天神)들이 칠보로 된 궁전(과 함께 나타나서 저 나라에 태어나는 사람을 맞이해 주신다.)” 한문 원문을 보면, 주어만 있지 동사와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맥을 보면, 아미타불과 관음, 세지 등이 모두 이 수행자를 접인(接引)하고 내영(來迎)해 주신다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염불행자 서방극락 태어나면
관음·세지보살 찬탄하며 권진
금강대 타고 부처님 따라가
진리를 듣고 무생법인 증득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우선 “관세음보살은 금강대(金剛臺)를 집으시고 대세지보살과 함께 수행자 앞에 나타나시며, (그때) 아미타불께서는 큰 광명을 놓으셔서 (서방 극락세계로 온 염불) 행자의 몸을 비추어 주시면서 다른 모든 보살과 함께 (행자의) 손을 잡아주시면서 영접하신다.” 지금 제가 ‘손을 잡아주신다’고 번역한 말의 원문은 ‘수수(授手)’입니다. 직역을 하면, ‘손을 주시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강진 무위사 법당의 벽화를 비롯해서, 예부터 이러한 모습을 그린 내영도(來迎圖)는 불교미술, 더 좁혀서 말하면 정토미술의 아름다움을 드날렸습니다.

이렇게 극락에 왕생해 온 염불행자 앞에 나타나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들은 (염불)행자를 찬탄하시면서 그 마음을 권진하신다.” 여기, 권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앞에서 삼복(三福)을 말할 때에도 나왔습니다. 그때는 ‘권진행자(勸進行者)’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경’이 널리 읽히지 않았던 탓일까요? 이 좋은 말이 보통명사, 혹은 동사로 쓰이지 못했습니다. 권진기심(勸進其心)이라는 말은, “염불행자가 극락에 왕생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권유하다”라는 뜻입니다. 일본에서는 ‘관경’이 널리 읽힌 까닭이겠습니다만, ‘권진’은 일상에서도 널리 쓰였습니다. 예를 들면, 절에 가면 참배객이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휴게소를 ‘권진소(勸進所)’라고 합니다. 어떤 행사를 할 때의 주최를 현수막에 적어줄 때, 일본에서는 ‘권진’이라고 합니다. 불사의 총책임자도 권진입니다. 주지스님도 권진이라 불렀습니다. 저는 우리 불교의 흥망성쇠가 바로 이 ‘권진’ 여부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권진’이라는 말을 꼭 되살리고 싶은 것입니다.

“(염불) 행자는 그러한 (불보살님들의 내영해 주시는 모습을) 보고나서는 환희하여 (껑충껑충) 뛰었는데, 스스로 그 몸이 금강대를 타고서 부처님의 뒤를 따라가서 손가락을 (한번) 튕기는 사이에 저 나라에 왕생함을 보았습니다.” 이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보았습니다’라는 문장에서 ‘보다’의 목적어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흔히는 그 몸이 금강대를 타는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저는 금강대를 타고서 손가락 한번 튕기는 사이에 그 몸이 곧바로 극락에 왕생하는 것까지를 다 ‘보다’는 말의 목적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그 몸’이라는 주어가 ‘저 나라에 왕생하다’까지 걸리기 때문입니다.

“저 나라에 태어나서는,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신체적 특성들을 다 갖추고 있음을 보고, 여러 보살들도 여러 가지 신체적 특성들을 다 갖추고 있음을 본다. 빛이 비치는 보배 숲 자체가 올바른 진리(妙法)를 설하고 있어서 그것을 들으면 곧 다시는 나지 않는 진리(無生法忍)를 깨닫게 된다.” 저는 우리나라가 극락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범죄가 많고 안전사고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정토법문을 어디에서고 쉽게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 나라에서는 “잠깐(須臾) 사이에 수많은 부처님을 다 모시면서 시방 세계에 두루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차례로 수기(受記)를 받고서는 본국으로 돌아와서 한량없는 다라니를 얻는다. 이를 상품상생이라 한다.” 자기나라를 본국이라 합니다. 당나라 선도대사는 극락을 ‘고향’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극락은 우리의 잃어버린, 잊어버린 고향이 됩니다. 돌아가자(歸去來), 고향으로! 그것이 염불입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58호 / 2016년 9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