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판교 출토 쌍둥이 금동좌상 비밀 두건 쓴 존자들
18. 판교 출토 쌍둥이 금동좌상 비밀 두건 쓴 존자들
  • 주수완
  • 승인 2016.09.2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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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 출토 쌍둥이 좌상은 지장보살상일까? 승려상일까?

▲ 판교출토 청동삼존불상, 12세기경.

2008년 성남 판교의 한 건물지에서 금동불좌상 1구와 금동보살좌상 2구가 발굴되었다. 인근에서 석탑 부재 및 청동으로 만든 소형 탑의 꼭대기 부분이 함께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사찰이 있었던 자리로 짐작되는 곳이었다. 특히 불좌상은 고려시대 불상으로는 드물게 비로자나불의 수인인 지권인을 하고 있었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이국적인 모습이었으며, 조각기법도 훌륭한 편이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두건 걸치고 있어 지장보살이며
본존불 협시보살로 소개 됐으나
함께 출토된 본존불이 더 작자
삼존불 조성 아니라는 주장 제기

좌상이 승려상일 가능성도 등장
영통사 제작한 빈도로존자상이
두건 걸치고 있어 이와 유사해

일부에선 중국의 승가대사 도상
혹은 두건 쓴 비구니라는 견해도


더불어 함께 발견된 보살상 2구는 거의 쌍둥이처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두건을 걸치고 있어서 처음에는 지장보살로 소개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점차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한 구의 불상과 두 구의 보살상으로 삼존불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당연히 협시보살보다 커야할 본존불이 여기서는 더 작게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상들은 삼존불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양식적으로 보기에도 얼굴표현에 있어서도 비로자나불좌상의 입체적이고 이국적인 이목구비의 표현과 두 보살상의 다소 밋밋하고 평면적인 안면처리는 삼존불을 구성했다고 보기에는 차이가 두드러져 보인다.

▲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유행한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고창 선운사), 보물 제280호.

그렇다면 보살좌상은 이들 두 구만으로 하나의 세트가 되도록 별도로 조성된 것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왜 두 구만 조성되었을까? 원래 본존불이 있었는데 사라진 것일까? 고려불화 중에서도 보살상만 두 분이 한 화폭에 그려진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고려불화 도상은 관음·지장보살의 조합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 여기서는 지장보살처럼 생긴 똑같은 존상이 나란히 발견된 점이 특이하다.

흔히 이처럼 두건을 걸친 존상을 지장보살로 보는 것은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원래 지장보살은 석굴암 감실보살에 포함된 지장보살처럼 ‘지장보살본원경’이나 ‘지장십륜경’에 묘사된 바에 의해 머리를 삭발하고 가사를 입은 승려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보관을 쓰고 장엄을 걸친 일반적인 보살상과는 확연히 차별화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돈황에서 발견된 ‘환혼기(還魂記)’라는 불교영험설화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걸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렇게 두건을 쓴 지장보살은 ‘피건지장’이라 하여 대체로 ‘환혼기’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환혼기’는 당나라 양주(壤州) 개원사(開元寺)의 승려였던 도명(道明)이 778년에 저승사자들에 의해 용흥사의 도명인 줄 오해받고 지옥으로 끌려갔다가 오해를 풀고 지상으로 다시 돌아온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때 지옥에서 경험한 바를 풀어 쓴 이야기로서 전래된 것이다.

▲ 북한산 승가사 승가대사상. 고려 현종 15년(1024). 보물 제1000호.

때문에 두건을 쓴 지장은 이 시기 이후에 감숙성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그보다 더 나중이어서 실제 유행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여하간 판교에서 발견된 불상 일괄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지장보살로서 두건을 걸친 상으로 묘사될 여지는 충분히 있다. 하지만 지장보살 두 구가 나란히 조성될 이유는 없기 때문에 지장보살이라는 주장은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근거로 이들 좌상이 보살상이 아니라 나한상과 같은 승려상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실제 이와 유사한 도상으로는 영통사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는 청동 빈도로존자상이 있는데, 두건을 걸친 모습이 유사하다. 빈도로(賓頭盧, Pindola) 존자는 16나한 중 첫 번째 나한을 지칭하는데, 빈도로존자가 반드시 두건을 걸친 모습으로만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빈도로존자가 아니더라도 나한 중에는 두건을 걸친 도상이 종종 보이기 때문에 지장보살상 설보다 설득력이 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들 도상은 일반적이고 전설적인 개념의 나한이 아니라 실재했던 한 중국 승려 승가대사의 조각상이라고 보는 해석이 새롭게 등장했다. 원래 서역 출신인 승가대사는 당나라 때 중국으로 들어와 사주(泗州)와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분인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관음보살의 화신으로도 추앙되었다. 중국에서 활동했던 분이지만 고려시대에도 크게 존숭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서울 북한산 승가사는 승가대사를 기리기 위한 절로서, 여기 석굴에 봉안된 승가대사상이 유명하다. 이 승가대사상도 판교출토 청동상처럼 두건을 쓴 모습이다. 고려시대에 승가대사 신앙이 대중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은 아마도 고려 현종이 즉위 전 천추태후로부터의 위험을 피해 이 승가사에 머물다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승가대사 신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 경주 남산 불곡 ‘감실불좌상’, 삼국시대 말엽.

그러나 고려시대의 승가대사 신앙을 재조명했다는 학술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굳이 똑같은 두 구의 승가대사상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마치 미술소묘의 모델로 사용되는 석고상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승가대사상을 대량으로 만들어냈던 것이 아닌 이상은 같은 승려를 묘사한 상을 두 구씩 안치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두 상을 한 곳이 아닌 별도의 곳에 따로 모셨던 것인데 우연히 한 장소에서 발견되었을 뿐이라고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단 모든 인문학은 우연적일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우선은 나름대로의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승가대사나 빈도로존자, 혹은 지장보살 같은 특정 존명을 가진 상으로 보기보다는 일반적인 나한, 혹은 승려상으로 보는 것이 안전한 설명이라는 점에 대체로 수긍하고 있다. 그러나 두건을 쓴 두 존상의 등장은 우리나라 불교미술에서 두건을 쓴 상의 의미를 놓고 벌어졌던 논쟁들을 다시금 재점화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대표적인 예는 사자빈신사지 석탑 안에 봉안된 두건을 쓰고 지권인을 결한 불상의 존명에 대한 문제이다. 이 상도 처음에는 지권인을 결하고 있어서 비로자나불로 인식되다가, 후에는 지장보살로 간주되었지만, 전반적인 문맥상 지장보살이 탑 가운데 봉안된 것에 대한 배경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 해석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사자빈신사’라는 단어가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선지식 중의 한 분으로 등장하는 사자빈신비구니와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어 이 상이 바로 두건을 쓴 비구니의 모습이라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었다. 결국 두건의 의미가 비구니를 의미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게 된 것이다.

앞서 두건을 쓴 지장보살의 등장은 778년 도명 스님의 설화 이후의 일이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전부터 두건을 쓴 도상이 등장한 사례가 있다. 바로 경주 남산 불곡에 위치한 소위 ‘감실불상’으로 불리는 상이다. 때로 지장보살로 일컬어지기도 했지만, 이 상의 연대가 삼국시대 혹은 늦어도 통일신라시대 초기 정도로 간주되기 때문에 당대에 등장한 ‘환혼기’ 설화의 영향으로 보기에는 너무 이르다. 따라서 이 도상을 지장보살로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감실불상은 마침 그 생긴 모습이 여성스러운 자태를 보여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줌마 불상’으로도 불렸던 탓에 이 상이 성모산신, 즉 여신의 도상이라는 설도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두건을 쓴 상이 비구니, 혹은 여성을 의미할 근거가 하나 더 마련된 셈이다.

▲ 제천 사자빈신사지 석탑 탑신 하단에 봉안된 두건을 쓴 지권인 석조좌상. 현종 13년(1022), 보물 제94호.

판교에서 출토된 두 쌍둥이 청동상도 혹시 두 비구니상일 가능성은 없을까? 사자빈신사지 석탑의 존상이나 불곡 감실의 상이 비구니나 여신이라는 설명이 아직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어둘 필요는 있다. 특히 이 문제는 우리나라 역사상 비구니 사원의 존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면서 앞으로 어떤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아가 지권인 불상과의 관계에서 볼 때 이들이 삼존불로 봉안되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물론 원래부터 하나의 세트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더라도 우연찮게 짝을 잃은 불상들을 구하여 마치 삼존불처럼 판교의 이름 모를 사찰의 스님이 모셨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만으로 단지 두 구의 승려상만 만들어져 어떤 완결된 맥락에서 봉안되었을 것으로 단정하는 것도 무의미한 추론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건을 쓴 두 상이 완결된 도상으로서든, 혹은 어떤 본존상의 협시로서든 제작된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우리나라 불교미술사에서 두건을 쓴 존상의 다양한 의미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임에는 틀림없기에 더욱 흥미로운 논쟁의 주제로 남아있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60호 / 2016년 9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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