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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중도적 조화

기자명 김정빈

비판은 극단으로 흐르기 쉽다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발흥하였다. 이는 대승불교가 부파불교의 비판자였음을 의미한다. 비유하면 대승불교는 부파불교라는 여당에 대한 야당의 위치에 서 있었다.

선명함은 좋아 보일 수 있지만
극단은 중도적 진실 잃기 쉬워
초기·부파·대승불교·선까지
융합해 미래 불교 향해 나가야

아무리 훌륭한 여당일지라도 국정의 모든 분야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올릴 수는 없는데, 야당은 그 부족한 부분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여당이 국정의 10개 분야 중 5개 분야를 잘 운영하고, 2개 분야를 중간 정도로, 3개 분야를 잘못 운영할 경우 야당은 잘못 운영하는 3개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국민은 그 공격을 수긍하게 된다.

그래서 국민은 다음 선거에서 야당에 권력을 맡겨 본다. 그렇지만 결과는 전과 크게 다름없을 때가 많다. 남을 비판하기는 쉬워도 멋진 비판자가 곧 훌륭한 업무 수행자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여당이 된 예전의 야당에도 불완전함이 드러나고, 전에는 여당이었던 지금의 야당은 그 불완전함을 비판한다.

비판자는 자신의 정체성이 있는 방향의 극단 쪽으로 치닫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여당이 보수 쪽이라면 야당은 진보를 지나 개혁(혁명)의 입장에서 비판하기 쉽고, 여당이 진보 쪽이라면 야당은 보수를 지나 수구의 입장에서 비판하기 쉽다. 그러면 여당 또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 방향으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건전하게 이루어져야 할 두 정당의 ‘경쟁’이 ‘투쟁’으로 확대된다. 건전한 경쟁은 두 정당의 이념적 중간 지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래서는 여당과 야당의 분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두 정당은 양극단 방향으로 나아가 “너는 악이고, 나는 선이다”라는 입장으로 치달아 극단적인 ‘선명성 투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발견되는 이런 현상으로부터 우리는 불교의 중도사상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중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것으로 비치기 쉽다. 그래서 중도를 표방하는 정당이 집권에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부파불교(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간에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대승불교 발흥 당시 부파불교는 여당 격이었고, 대승불교는 야당 격이었다. 부파불교는 여당으로서 국정을 잘 운영하는 점도 있었고, 잘못 운영하는 점도 있었는데, 대승불교는 잘못 운영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강력하게 그 부분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대승불교는 여당이 되었다. 그러면 여당이 된 대승불교는 국정을 100퍼센트 잘 운영하였는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였다. 적어도 중국불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승불교가 완전했더라면 야당이 등장하지 않았겠지만 중국불교에서 대승불교에 대한 야당이 등장했는데, 선(禪)이 바로 그것이다.

당대(唐代)에 등장한 선은 여당이었던 대승불교에 대한 야당으로서의 비판이라는 면이 있다. 그렇다면 선은 대승불교의 어떤 면을 비판하였는가.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가 소홀하게 다루어온 도성제 부분이었다.

대승불교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구체적인 방법론(도성제)을 강조하지 않고 있었고, 그 점이 중국의 구도자들에게는 불만이 있었다. 이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승불교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사상가가 천태 지자대사이다. 지자대사는 불교의 모든 경전을 열람한 끝에 도성제로서 지관(止觀) 수행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천태의 지관 수행법은 실제적인 깨달음의 결과물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혜능이라는 종교적 천재가 큰 깨달음을 성취하였고, 그 전통에서 화두선이라는 도성제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야당이었던 선이 여당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여당인 선은 미래 불교라는 야당에 의해 비판된다. 선 또한 대승불교는 지나치게 비판하다가 극단 쪽으로 흘러간 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불교는 흘러가며 발전한다. 다만 필자는 미래 불교의 선에 대한 비판은 극단으로 흘러서는 안된다고, 중도의 입장에서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선이 모두 하나로 조화롭게 융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유념하고 싶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61호 / 2016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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