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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샤바즈가리의 아쇼카왕 법칙(法勅)과 단특산

아쇼카왕이 선포한 법의 칙령 새긴 바위도 탈레반에 훼손



 
▲ 샤바즈가리의 대마애법칙. 이는 아쇼카왕(BC.268~232 재위)이 큰 바윗돌에 새긴 법의 칙령. 하부의 법칙(法勅)은 온전한 상태였지만, 상부의 법칙은 회반죽으로 훼손되었다. 아마도 탈레반은 이를 불교유적으로 착각하여 훼손하였을 것이다. (위·아래 사진)

“이 땅에서는 어떠한 생물도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중략)…이전에 황실의 주방에서는 수백천의 생물들이 식사를 위해 도살되었지만, 법의 칙령을 반포하는 지금은 단지 세 마리의 동물, 두 마리의 공작과 한 마리의 사슴만이 도살되고 있다. 그렇지만 사슴은 정기적으로 도살되는 것이 아니며, 이 세 마리의 동물조차 앞으로는 도살되지 않을 것이다.”

아쇼카는 인도 통일 후 무력 아닌
법에 의한 게 진정한 승리 깨달아
전국각지에 법의 칙령을 반포하고
널리 알리려 바위·돌기둥에 새겨
마애법칙과 석주법칙으로 불러

탈레반이 훼손해 놓은 마애법칙은
“자기 종교 빛내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게 자기 종교 훼손하는
행위니 서로를 존중하라”는 내용

이는 어느 동물애호가의 다짐이 아니다. 마우리야 제국의 아쇼카 왕(BC. 268~232 재위)이 반포한 14개 조항의 칙령 중 첫 번째 조항이다. 주지하듯이 아쇼카 왕은 인도를 처음으로 통일한 후 무력이 아닌 ‘법(다르마)에 의한 승리’야말로 진정한 승리임을 깨닫고 전국 각지에 법의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이 칙령이 모든 이에게 알려지고 영원히 지켜지도록 큰 바위와 돌기둥에 새겼는데, 이를 각기 마애법칙과 석주법칙이라 한다. 마애법칙에는 다시 14장으로 이루어진 대마애법칙(major rock edict)과 불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소마애법칙(minor rock edict)이 있으며, 석주법칙 역시 7장(혹은 6장)의 법칙이 새겨진 대석주법칙과 승가의 분열에 대해 훈계하는 등 불교교단과 관계가 있는, 따라서 대개 사르나트 등 불교유적지에 세워진 소석주법칙이 있다. 인도전역에 대마애는 9곳, 소마애는 14곳, 대석주는 6곳, 소석주는 8곳이 발견되었다.

앞서의 인용문이 실려 있는 대마애법칙은 주로 제국의 변경에 세워졌다. 서북변경지역의 경우 간다라 쪽으로는 마르단 교외 샤바즈가리(Shabhaz Garhi)에 세워졌고, 캄보자(카슈미르) 쪽으로는 하자르 지역의 만세라(Mansehra)에 세워졌다. 오늘날 두 곳 모두 파키스탄 영내에 위치한다. 샤바즈가리는 인도 중원에서 탁실라를 거쳐 올라오는 길과 사마르칸트 등 중앙아시아에서 카이버 패스를 넘어오는 길, 중국에서 파미르를 넘어 스와트에서 내려오는 길이 만나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그리고 만세라는 탁실라에서 아보타바드를 거쳐 카슈미르(무자파라바티-우리-스리나가르)나 북부 발루치스탄 지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이런 길목에 마애법칙을 세운 까닭은 두말할 필요 없이 만인에게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 거기에 쓰인 말 또한 고대 페르시아가 이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의 언어인 아람어에서 유래한 카로스티 문자였다.

▲ 암각법칙을 안내하는 입간판도 깨끗하게 지워졌다.

현장법사는 이 두 지역을 여행하였음에도 아쇼카 왕의 마애법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당시 세워진지 이미 900년이 지났으므로 아쇼카 왕의 뜻과는 달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대당서역기’에서 샤바즈가리는 바르샤(Varṣapura: 跋虜沙)라는 지명으로 언급된다. 그는 푸루샤푸르(현 페샤와르)에서 푸쉬칼라바티(차르사다)를 거쳐 이곳에 왔고, 여기서 북상하여 스와트를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내려와 우타칸드(Utakhand, 훈드)-탁실라로, 만세라가 위치하는 하자라 지방(烏剌尸國)을 거쳐 카슈미르로 여행하였다.

자말가리 승원에서 샤바즈가리까지는 지척이었다. 마르단을 중심으로 지도상으로 탁티 바히는 북서쪽 13㎞, 자말가리는 북쪽 15㎞, 샤바즈가리는 동쪽 12㎞ 지점에 위치한다. 도로변 주차장에 들어와 택시에서 내리니 매표원이 다가왔다. 입장료는 역시 200루피. 주변에서 놀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쇼카 왕의 법칙은 50여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두 개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산 밑 숲으로 접어들자 바로 법칙이 새겨진 바위가 나타났다. 철골기둥에 슬레이트 지붕을 덮어 보호하고 있었다. 대략 2m 쯤으로 보이는 바위였다. 전면이 말끔하였고 글자도 선명하였다. 2200여 년 전의 유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가슴이 먹먹해졌고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암각비문 보호각.

마을 아이들이 지루하였던지 저만치 또 다른 바위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을 쫓아가자 더 큰 규모의 보호각이 나타났고, 밑의 바위보다 두세 배 더 커 보이는 바위가 보였다. 그런데 심상치가 않았다. 올라가면서 마주치는 바위 뒷부분과 측면 부분이 회반죽으로 흉하게 더렵혀져 있었다. 사실 암각법칙 초입에 세워진 안내판의 글자가 모두 지워진 것을 보고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였었다. 법칙이 새겨진 바위 전면은 잿빛 진흙으로 말끔하게(?) 도배되어 있었다. 너무나 말끔하여 처음에는 혹 비명(碑銘)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먼저 흰 회칠을 바르고 나서 잿빛 진흙을 덧칠한 것으로, 새겨진 글자는 물론이고 그 밑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식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고의로 훼손한 것이 분명하였다. 뒷면에 쏟아 부은 회반죽에 증오가 묻어있었다. 진흙이 손에 묻어나는 것으로 볼 때 불과 몇 시간 전에 훼손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경 우리와 함께 올라온 저 아이들도, 입장티켓을 판 관리인도 다 보았을 것 아닌가? 돌연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려가야만 하였다. 긴장감과 허전함과 아쉬움이 교차하였다. 밑의 바위에서 몇 분을 더 서성이다 내려왔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관리인에게 누구의 소행인지를 묻자 그는 몰려든 아이들을 가리킨다. 아이들이 한 짓 같지는 않다는 표정을 짓자 동료인 듯한 어떤 이가 쉬쉬하며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반복한다. ‘탈레반?’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왜 불교유적도 아닌 아쇼카 왕의 암각법칙을 훼손하였을까? 짐작건대 여기에 찾아오는 이는 대개 불교도이고, 동네에서는 이 바위를 ‘아쇼카 붓다’라고 부르기에 이를 불교유적으로 이해하였을지도 모르겠다.

▲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 수다나 태자가 나라의 보배인 흰 코끼리를 적국에 보시하여 쫓겨난 단특산(형벌처)으로 일컬어진 메카산다. 실제로 현장은 아이들이 매를 맞아 흘린 피로 인해 초목도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고 하였다.

탈레반은 2001년 “불상(형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슬람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는 그들의 최고 지도자 무함마드 오마르의 교시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불상을 로켓탄으로 폭파하여 세계를 경악시켰다. 필자 역시 이번 답사여행에서 최근 자행되었음직한 다수의 불교유적 훼손 현장을 목격하였다. 밍고라 인근 자하나바드 마을 뒷산의 아름다운 암각불상은 총탄에 두 눈을 잃었고, 칠라스의 인더스 강변의 암각불상은 거의 사라지고 그나마 남은 몇 점도 불두부분을 정으로 쪼았거나 아예 떼어내어 버렸다.(사진 법보신문 1309호) 바위 아래를 살피니, 방금 떨어져나간 듯한 얼굴 턱 선이 선명한 파편이 잡석에 섞여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훼손한 아쇼카 왕의 대마애법칙 제12조는 자신의 종교를 빛내기 위해 다른 종교를 비방하는 것은 도리어 자신의 종교를 훼손시키는 것이기에 서로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불교내부에도 다수의 논쟁과 비방이 있었지만 파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승과 소승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카슈미르/간다라에서는 설일체유부와 경량부가 대립하였다. 경량부의 관점에서 유부교학을 비판적으로 조술한 것이 세친의 ‘구사론’이었고,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이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한편 현장에 따르면 이슈바라(Iśvara: 自在)라는 이름의 논사가 이곳 샤바즈가리(즉 바르샤) 북쪽의 소승 승가람에서 ‘아비달마명등론(明燈論)’을 저술하였다. 이 논서는 오늘날 전하지 않지만, 1937년 티베트에서 발견된 같은 이름(‘아비달마디파’)의 논서(1959년 P. Jaini 교정출판) 역시 ‘순정리론’과 같은 성격의 ‘구사론’ 비판서이다. 이로 인해 이 논서의 저자가 이슈바라이냐, 현장이 중현의 문도로 전한 비말라미트라(Vimālamitra: 無垢友)이냐 하는 문제가 학계의 쟁점이 되기도 하였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시 양 부파의 대립이 세친과 중현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아비달마디파(등불)’의 작자를 굳이 비말라미트라로 비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중현과 이슈바라는 각기 세친을 비바사(毘婆沙)를 등지고 성교(아함)와 정리(논리)에 미혹한 이들(상좌 슈리라타 일파)과 더불어 사악한 붕당을 지은 이, 설일체유부에서 타락한 허무주의자(Vaināsika)로 비난하였다. 또한 그들은 세친의 주장을 벙어리 잠꼬대 같은 말, 애들 장난과 같은 말이라 조소하였다. 비말라미트라는 중현의 스투파를 어루만지며 섬부주에서 세친의 이름이 사라지게 하겠다고 맹서하기까지 하였다. 카슈미르 출신인 중현과 그의 문도 비말라미트라는 그렇다하더라도 이슈바라는 간다라 한 복판에서 동향의 선배 대논사의 견해를 어찌 그토록 강력히 비판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미 불교가 내부적으로 개방적 사유와 자유로운 논쟁을 보장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중현이 맹비난하고 세친에게 가까이하지 말라고 훈계한 슈리라타 역시 자신과 동향인 카슈미르 출신이었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 샤바즈가리는 그 무엇보다 수다나(Sudāna: 善施) 태자의 비원(悲願)이 깃든 단특산(檀特山)으로 더 유명하다. 그는 나라의 보배인 무적의 흰 코끼리를 적국에 보시하여 부왕의 노여움을 사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단특산으로 쫓겨났다. 도중에 가엾은 이들에게 수레도 돈도 옷도 모두 보시하고, 끝내는 늙고 추한 바라문에게 두 아이와 아내마저 보시하였다. 천지가 진동하였다. ‘대지도론’에서는 이를 60겁에 걸친 사리불의 보시행과 비교하고 색신의 완전한 보시바라밀로 찬탄하였다.

수다나 태자의 보시 이야기는 ‘베산타라(Vessantara, 범어는 Viśvatara) 자타카’로 ‘육도집경’이나 ‘보살본연경’ 등에 전해지며, ‘태자수대나경(太子須大拏經)’이라는 이름의 독립된 경으로 편찬되어 보살행의 귀감으로 찬탄되었고, 불교가 전파된 거의 모든 지역의 조각과 회화의 소재가 되었다.

현장은 샤바즈가리로 추정된 바르샤 성을 수다나 태자의 왕궁으로 전하고, 쫓겨난 단특산(Daṇḍaloka: 彈多落迦, 형벌처)은 여기서 동북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산으로, 당시에도 여전히 태자가 머물던 석실이 있고 바라문이 아이들에게 매질하여 흘린 피로 인해 초목도 붉은 색을 띠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산 정상에 아쇼카 왕이 세운 스투파가 있다고도 하였다.

▲ 중국 쿠차의 키질석굴 38호굴의 수다나 태자 본생담 벽화. 이는 늙은 바라문이 아이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밧줄로 묶어달라고 하자 태자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아이들의 발을 묶는 장면이다.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으로, 불교전래의 초기 중국인들은 이 본생담을 패덕으로 문제 삼기도 하였다.

일찍이 푸셰(A. Foucher)는 바르샤와 단특산을 차나카데리(Chanaka Dehri)와 메카산다(Mekha Sanda)로 비정하였고, 오늘날 파키스탄 여행 가이드북에도 그같이 소개되고 있다. 메카산다는 산의 형상이 황소와 암소가 만나는 모습과 유사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지만, 차나카데리는 흰 코끼리 마을이라는 뜻이란다. 지도상으로 이 두 곳은 샤바즈가리에서 멀지 않았다. 북쪽의 루스트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메카산다이고, 거기서 차나카데리는 걸어서 십여 분 거리였다. 아쇼카 왕의 마애법칙 주차장에 몰려든 마을사람들에게 이곳의 위치를 다시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손사래를 치면서 연신 ‘붐’ ‘붐’하며 단발음의 포탄 터지는 소리만 낸다. 그곳 역시 테러리스트들이 파괴하였단다.

샤바즈가리에서 메카산다는 차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운전수는 큰 길에서 샛길로 들어 미루나무 밑에 차를 세운다. 앞의 돌산이 메카산다란다. 표지판도 없다. 매우 무더운 날씨였지만, 듬성듬성 선인장이 나 있는 들을 지나 산 밑까지 갔다. 가이드북에는 30분 정도 올라가면 평지의 승원터가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혹 마을사람들 말대로 테러리스트들이 그곳을 파괴하였다면, 그리고 그 어디엔가 그들이 숨어있다면…. 여기는 인적도 없는데. 더위와 불확실성에 위험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냥 돌아가기로 하였다. 택시로 돌아오니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차가 와 있었다. 여권을 보여 달란다. 책임자인 듯한 이가 택시 운전사와 뭔가 오래 이야기하였다. 소총을 둘러맨 서너 명의 경찰은 택시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여권을 돌려주며, 이 지역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이유가 무엇인지, 무슨 문제인지, 어떤 상황인지 누구와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61호 / 2016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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