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현재·미래 어우러진 백제의 신앙 흔적을 만나다
과거·현재·미래 어우러진 백제의 신앙 흔적을 만나다
  • 심정섭 전문위원
  • 승인 2016.10.3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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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성지순례 현장 충남 태안·서산·예산

   
▲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을 마주한 순례단원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절로 번졌다.

역사상 패자의 발자취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종교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백제의 경우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현재 남아 있는 유물만으로 당시의 불교신앙을 짐작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만큼 전해지는 기록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백화산 중턱 태안 마애삼존불
바닷길 오가는 사람들 다독여

‘백제의 미소’ 서산 마애삼존불
순례단 얼굴에 절로 미소 번져

터만 남은 옛 절 보원사지는
이제껏 못 본 백제 보물창고

얼굴 잃은 사방불 안타까움은
수덕사의 법화행자 혜현 스님
행적에 씻고 불자로서 삶 다짐


그럼에도 학자들이 일부 유물과 기록을 근거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려내는 작업에 몰두해 온 덕분에 일정부분 옛 역사와 신앙의 흔적도 엿볼 수 있게 됐다. 그중에서도 태안마애삼존불,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 서산마애삼존불은 백제불교의 법화신앙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단초로 여겨지고 있다.

법보신문 삼국유사순례단도 10월22일 백제불교의 흐름을 좇아 이곳에 발을 디뎠다. 가을 나들이객들로 인해 차량이 가득한 고속도로를 겨우 벗어나 도착한 태안마애삼존불(국보 제307호)은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백화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안은 5세기 말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해상 교통로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그러한 길목마다 먼 바닷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무사 귀향과 안전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마애불이 조성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마애불의 시초로 알려진 태안마애삼존불 역시 그렇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백제시대 유일의 사면불상에 조성된 네 분 부처님들은 모두 머리를 잃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자연암벽에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좌우의 여래입상(如來立像)과 중앙에 보살입상(菩薩立像)을 배치하고 있다. 가운데에 불상을 두고 양쪽으로 보살상을 배치하는 일반적 형식과는 다른 모습이다.

문무왕 박사는 “학자들마다 이 형식과 관련해 다양한 견해를 내놓고 있지만, 다보 이불병립상과 미륵보살이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현재로써는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며 “과거의 다보여래와 현재의 석가여래, 그리고 미래의 미륵보살로 조성된 삼세불의 양식”이라고 설명했다. 즉, 과거 현재 미래가 어우러져 영원한 부처님의 세계로 나아가는 신앙적 흐름은 백제 전성기 때 신앙을 현실세계에 구현하고자 하는 적극적 신앙심의 발로라고 보는 것이다.

   
▲ 보원사지는 알려지지 않은 백제시대 보물창고다.

순례단은 강건한 얼굴과 당당한 신체, 묵중한 법의(法衣) 등 6세기 백제의 불상 양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태안마애삼존불 앞에서 옛 백제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부처님의 얼굴이 숱한 비바람과 잘못된 민간 신앙으로 인해 코, 입 등 윤곽이 희미해져 안타깝지만, 오랜 세월 백성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바다 건너 떠나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었을 자비심만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태안마애삼존불을 보호하며 불법 홍포에 전념하고 있는 태을암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이다. 보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드는 미소가 아름다운 불상은 태안반도를 따라 내륙으로 이동해 만날 수 있는 삼국시대 불상 중 최고로 손꼽히고 있다.

   
▲ 순례단원들은 보원사지와 서산의 가야산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백제불교의 중흥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인근의 보원사지 발굴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석탑이나 불상의 흔적을 묻는 발굴팀에게 한 나무꾼이 “환하게 웃는 산신령이 있다”는 말을 건네면서 마애불의 존재가 드러났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해 백제불상 특유의 자비로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문 박사는 “발견 당시에는 석가여래, 관음보살, 미륵보살의 삼존상으로 알려졌으나 관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상을 연등불의 전신인 제화갈라보살로 보는 견해도 있다”며 “‘법화경’의 수기사상에 따라 조성된 불상으로도 볼 수 있고, 이러한 주장은 태안반도를 따라 흘러오는 법화신앙이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삼세불신앙의 백제적 변용으로 볼 수 있다”고 이해를 도왔다.

그 앞에 서서 보고 있으면 저절로 웃음을 머금게 되는 서산마애삼존불 인근의 보원사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백제불교의 보물창고다. 대부분 이날 처음으로 보원사지의 존재를 알게 된 순례단원들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절터에서 이 절터의 지킴이인 김선임 박사로부터 서산 지역의 가야산과 보원사지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 태안마애삼존불은 중국과의 해상 교류를 위해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마음을 다독였을 것이다.

북위 양식을 띤 6세기 중엽경의 금동불입상과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기도 한 절터에는 현재 5층석탑(보물 제104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제106호) 등이 남아 있다. 가람이 융성했던 시절에 200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하던 도량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유적들이다. 그럼에도 일제강점기에 철불 1구가 이곳에서 박물관으로 옮겨진 이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현재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어 옛 절터의 한산함과 더불어 안타까움을 남긴다.

옛 절터를 떠나 도착한 곳은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보물 제794호)이다. 하나의 돌에 동서남북 사방으로 불상을 조성했다. 사면불상은 인도와 중국에서 탑에 조성된 사방불이 우리나라에서 독립된 신앙으로 전개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가운데, 이 불상은 백제시대 유일한 사면불상이다. 옷주름이 매우 깊고 가슴아래에서 U자형으로 겹쳐 있다. 또 광배는 원형으로 불꽃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져 백제 특유의 양식을 띠고 있다. 하지만 네 분 부처님 모두 머리를 잃고 일부는 손까지 사라져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태안반도를 따라 흘러온 법화신앙의 옛 기록은 덕숭총림 수덕사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건축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대웅전(국보 제49)을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옛 스님 혜현을 통해 이 지역의 법화신앙을 전하고 있다.

“혜현은 어려서 출가해 ‘묘법연화경’ 독송을 수행으로 삼았다. 하여 기도하여 청하면 영험한 감응이 실로 많았으며, 삼론을 공부하고 수행을 시작하자 신명에 통했다. 여기 수덕사에 주석하며 대중이 있으면 강론하고 없으면 외우니 사방에서 이를 흠모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에 차차 번잡함을 피해 강남의 달라산으로 가서 고요히 수행하다 생을 마치자 함께 공부하던 스님이 시체를 옮겨 석실 안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유해를 모두 먹고 오직 해골과 혀만 남겼다. 3년이 지난 후에도 혀는 오히려 붉고 부드러워졌다가 돌과 같이 단단해졌다. 이에 승속이 그것을 공경해 석탑에 간직했다.”

혜현 스님의 이 일화는 백제시대 이 지역 불교신앙의 흐름은 물론, 법화신앙의 위대함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태안반도를 따라 순례에 나선 순례단도 태안반도의 초입에서 법화신앙을 아로새긴 부처님을 만나 그 넉넉한 품에 안겼고, 수덕사에서 법화행자 혜현의 행적을 떠올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회향할 것을 다시 한 번 새겼다.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제7차 삼국유사 성지순례

일참인시 : 11월26일 / 순례코스 : 김제·완주
동참인원 : 40명 / 문의 : 02)725-7012


 

[1365호 / 2016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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