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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밍고라 시내 불적

붓카라 승원터 다양한 부조물서 옛 분위기를 느끼다

 
▲ 붓카라 제1 불교승원 유적지(약간 큰 사이즈로)와 봉헌탑 기단의 장식.

스와트의 중심도시는 밍고라이다. 고대 불교시대 이래 이 지역의 명칭은 발리그람(Baligram)이었지만, 19세기 영국에 저항하여 스와트 독립국을 세운 아쿤드 압둘 가프르(1793∼1878)의 통칭인 사이두 바바(Saidu Baba)의 이름을 따 사이두 샤리프로 바뀌었고, 20세기 초 인근에 상업지역으로 들어선 밍고라가 오늘날 이 지역의 행정 중심도시가 되었다. 밍고라는 말하자면 사이두 샤리프의 신도시인 셈이다.

제1·제3 두 곳의 승원터가 존재
3유적은 언덕 이용한 굴원 형식
1유적지 정면에 원형기단 대탑
대탑 둘레엔 수많은 소형탑 조성
부조물 마모 심해 분간 어려워도
불상·연꽃문양 등 다양하게 남아

지역 대표 스와트 박물관에는
‘붓다 석가모니 불족’ 비롯해
부처님과 제자 토론 부조물도

이 지역 대표 박물관인 스와트 박물관은 밍고라에서 사이두 샤리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다. 페샤와르나 탁실라 박물관과는 달리 단정한 모습의 현대식 건물이었다. 그것은 2008년 탈레반이 이 도시를 점령하였을 때 파괴하고 폐쇄하였던 박물관을 다시 짓고, 탁실라와 판잡 지방으로 대피시켰던 유물들을 다시 가져와 2014년 12월에 새로 개장하였기 때문이다.

지역 박물관이어선지 전시공간도 단출하였고 전시된 유물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것도 태반이 1956년 이후 이탈리아 동방연구소가 발굴한 밍고라 남쪽 붓카라 제1 유적지와 니모그람 승원 터 등에서 출토한 유물(거의 대개 부조상)이라 하였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비록 부조물에 그려진 것일지라도 불상의 분위기가 어딘가 페샤와르나 탁실라에서 본 간다라의 그것과 달라보였다. 간다라불상이 명상하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이목구비 뚜렷한 핸섬한 모습이라면, 여기의 것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면을 주시하는, 어딘가 투박하여 결코 매끈한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이한 부조상도 있었다. 부처님이 이곳 웃디야나에 오셨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카로스티 문자로 ‘붓다 석가모니의 불족(佛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부처님의 족적도 있었고, 한쪽 끝에 남녀가 입 맞추는 모습을 새긴 아름다운 꽃문양의 부조물도 있었다. 불탑의 난간을 장식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필자의 눈을 끈 것은 부처님과 여러 제자·외도들이 진리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을 담은 부조물이었다. 규모는 작을지라도 한눈에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에서 플라톤이 제자들과 디오게네스 등의 이학(異學)에 둘러싸여 진리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부처님 좌우로 바라문과 제자로 생각되는 이들이 서있다. 바라문이 뭔가를 질문하였고, 부처님이 설명하자 매우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이다. 부처님을 따라 온 제자들 역시 함께 웃고 있다.(본 연재 프롤로그에 게재)

같은 구도의 다음 부조물에서 질문자는 나행(裸行) 외도이다. 시바교도처럼 보인다. 그들 역시 아주 진지하게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있고, 왼편의 제자들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를 지켜보고 있다. 부처님 시대의 실물사진을 보는 듯 생생하다. 그랬을 것이다. 부처님은 대규모 군중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한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마주하게 되는 사문·바라문과 이렇게 허물없이 토론하고 담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귀의를 받았을 것이다. 사리불도, 목건련도 그렇게 귀의하였다. 이 한 컷의 부조만으로도 스와트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 사이두 샤리프 스투파와 기단 옆에 방치된 원반형의 상륜(相輪).

박물관을 나섰다. 동남쪽으로 1㎞ 남짓 떨어진 언덕배기에 ‘사이두 샤리프 스투파’로 명명된 승원 터가 있다기에 찾아 나섰다. 마을의 골목을 지나야 하였기에 찾기가 쉽지 않았다. 행인들에게 몇 번이고 물은 끝에 주택가 안쪽에 자리한 승원 터를 찾을 수 있었다. 유적은 같은 넓이의 상하 두 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래 단에는 방형의 기단위에 돔형의 탑신이 얹어졌을 대탑과 이를 둘러싼 소탑(봉헌탑)의 탑원(塔院)이 있었고, 위의 단에는 사면으로 개인승방이 배치된 승원(僧院)이 있었다.

방형기단은 원형기단보다 후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스투파는 발굴에 의하면 아쇼카 왕 때 세워진 것으로, 그 때는 원형기단이었지만 이후 다섯 번에 걸쳐 확장되었다고 한다. 대탑의 기단은 내 키보다 훨씬 높았다. 카슈미르 파리하스포라의 기단보다는 낮았지만 간다라에서 이 같은 높이의 기단을 보지 못한 것 같다. 반으로 깨어졌음에도 거의 내 키만한 산개(傘蓋, chattra)가 기단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그 보다 훨씬 작은 직경 1m정도의 산개는 이곳저곳 널부러져 있었다. 물론 크기는 다를지라도 저것이 바로 카니시카 왕이 세웠다는 작리(雀離) 부도의 ‘작리(cakrin)’가 아니던가? 탑이 허물어지기 전에 저것이 돔 위에 일산처럼 층층으로 세워져 탑을 장엄하였을 것이다.

밍고라의 붓카라 승원 터는 여기서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몇 개의 마을을 지나야 하였기에 릭샤를 타고 갔다. 붓카라에는 제1과 제3으로 명명된 두 곳의 승원 터가 있다. 제1 유적지는 마을 초입에 있었지만, 제3 유적지는 500m 쯤 떨어진 언덕배기 마을 중턱에 있었다. 마을의 공터(쉼터)여선지 제3 유적지는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소들도 집에 묶여있기 보다 이곳이 적합한 듯 여기저기서 풀을 뜯고 있었다. 마르지 않은 질퍽한 소똥으로 인해 발을 옮길 때 마다 땅바닥을 살펴야 했다. 오랫동안 이곳을 찾은 이가 없었는지 우리가 아이들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여기서는 특이하게 언덕을 이용하여 굴을 파 (혹은 지붕을 덮어) 그 안에 작은 스투파를 안치하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굴원(窟院)인 셈이다. 원형기단에 완전한 소탑의 모습을 갖춘 것도 있었고 흙 지붕 대신 철골로 지붕을 만들어 덮은 것도 있었다. 중정(中庭)에도 방형 기단의 소탑들이 늘어서 있었다. 대탑이나 승원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허물어져 마을 밑으로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이 소탑원이 저 아래 제1 유적지의 부속원으로 마련된 것일까?

▲ 붓카라 제3 불교승원 유적지.

마을 어귀의 제1 유적지로 내려왔다. 아무도 없었다. 한적하였다. 돌담으로 들과 유적지를 경계 지어 놓았다. 정면에 원형기단의 대탑이 있고 그 둘레로 수많은 소탑(봉헌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현장법사는 툭하면 자신이 방문한 승원에 “물고기 비늘처럼 탑들이 켜켜이 늘어서 있었다”고 하였는데, 기단위의 돔만 없어지지 않았다면 ‘탑들의 숲’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

왜 이렇게 많은 탑을 세웠던가? 법현에 의하면 많은 승려들이 머무는 곳(즉 승가람)에는 사리불·목건련·아난다와 같은 불제자 탑과 경·율·론의 삼장 탑이 세워져 있어 재일(大會)에 이러한 탑에 꽃과 향을 공양하고 밤새도록 등불을 밝혔다. 특히 비구니들은 여인출가를 청한 아난다의 탑에 공양하였고, 사미들은 라훌라 탑에, 아비달마논사는 아비달마 탑에, 율사는 율 탑에 공양하였다고 한다. 법현은 야무나 강변 좌우 20곳의 승가람에, 3000명의 승려가 있었다는 마투라를 여행하고 이 같이 말하였지만, 이곳 붓카라의 탑원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다.

이곳은 또한 다른 유적지와는 달리 비록 마멸되어 무엇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지라도 대탑을 수호하는 동물상이 세워져 있었고, 불탑기단에는 다양한 부조물, 이를테면 불상이나 공양상, 혹은 그리스 식 기둥, 연꽃 문양 등이 원래대로 붙어 있는 것도 있어 더욱 옛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였다. 스와트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의 절반 가까이가 여기서 출토된 것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그것들을 박물관의 벽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현장, 스투파의 기단이나 승원의 감실에서 보았다면 당시의 분위기를 바로 느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당시 사람들 역시 부처님을 직접 뵌 듯 환희심을 자아내기 위해 불상을 안치하고 부처님 생애의 주요장면을 묘사한 부조물로, 혹은 아름다운 그림이나 당시는 보석이었을 푸른색의 유리 등으로 장식하였을 것이다.

이곳을 발굴한 이탈리아의 투치(Giuseppe Tucci)는 밍고라를 현장이 웃드야나(烏仗那)의 왕성이라 한 몽게리(瞢揭釐)로, 붓카라 제1 유적지를 송운(宋雲)이 말한 타라사(陀羅寺)로 비정하였다. 이전까지 몽게리는 밍고라 서북쪽 8㎞ 스와트 강가의 망글라(Manglaur)로 알려졌었다. 송운(518∼522 인도여행)은 이렇게 쓰고 있다.

“성 북쪽의 타라사(陀羅寺)에는 불사(佛事)가 매우 많았다. 스투파(浮圖)는 높고 컸다. 승방이 서로 이어져 둘러쳐져 있었고, 금[불]상은 6000구나 되었다. 왕이 해마다 무차대회를 이 절에서 열면 나라 안의 사문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송운과 혜생은 그들 비구들이 계행(戒行)을 닦으며 정진 고행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풍속과 범절을 보며 더욱 공경하게 되었다.”

▲ 스와트 지역에서 발굴된 부조(범천권청과 입맞춤 장면). 스와트 박물관.

법현(399∼416 인도여행)은 웃디야나는 500 여 승가람이 있고 모두 소승을 배운다고 하였는데, 송운시대에도 역시 그러하였을까? 그런데 현장(627∼645 인도여행)은 당시 이곳의 승도들은 대승도 함께 배우지만 그 뜻이 깊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계행이 청결하고 특히 금주에 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혜초(723∼727 인도여행)는 당시 웃디야나에서는 오로지 대승법만이 행해졌다고 하였다.

만약 이곳 붓카라 승원이 투치가 말한 대로 타라사였다면, 이곳 또한 법현 시절에는 소승을 배웠고, 현장 시절에는 비록 깊지는 않을지라도 대승을 함께 배웠으며, 혜초 시절에는 오로지 대승법만 행해졌다고 해야 할 것인데, 이 때 소승·대승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오늘날과 같은 자리와 이타, 법유와 법공과 같은 이념이 잣대였을까? 아니면 소승은 소승(아함)경을, 대승은 대승(반야)경을 독송하였을 것인가? 혹은 승도들이 소승에서 대승으로 바뀌면, 불교사원이 힌두사원으로 바뀌는 것처럼 승가람의 구조나 존상도 그렇게 바뀌는 것인가?

그렇지만 의정(671∼694년 인도여행)은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대·소승관을 전하고 있다. ‘남해기귀내법전’에 의하면, 불교 유파의 흥기는 일정하지 않을지라도 인도에서 전해진 불법의 큰 갈래는 대중부·상좌부·설일체유부·정량부 네 부파로, 이들은 다같이 5편(篇)의 율장을 제정하고 사제(四諦)를 수행하는데, 만약 보살에게 예배드리고 대승경을 독송하면 대승이고, 이런 일을 행하지 않으면 소승이다. 의정에 따르면 이곳 북천축과 남해의 여러 고을은 오로지 소승이고, 중천축은 대승을 지향하고 그 밖의 지역은 대·소승을 함께 행하였다. 그리고 대승이라 하는 것도 중관과 유식의 두 종류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중관과 유식 계통은 철저하게 유부의 불설론과 교학체계에 토대한다. 물론 이를 불요의(不了義)의 방편설로 간주할 뿐이지만.

그렇다면 이들 대승이 예배드린 보살은? 그런데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보살은 본생보살을 제외한다면 미래불인 미륵보살과 관세음보살 밖에 없고 그나마 스와트에서는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법현은 대부분의 승려들은 불제자나 삼장 탑에 공양하지만 대승(마하연)인들은 반야바라밀다와 문수사리와 관세음 등에 공양한다고 하였다. 이주형 교수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이 협시한 불삼존 부조나 불타가 연좌대에 앉아 많은 보살에 둘러싸여 설법하는 부조물은 대승과 관련 있다고 말하고, 아주 드물지만 경전을 들고 있는 존상을 문수보살로 이해하였다. 그럴지라도 그러한 불삼존이나 설법도의 부조물도 음광부(가섭부) 명문이 발견된 탁티 바히나 샤흐리 바흐롤 승원터에서 출토되었다. 대소승의 대립이 경론에서처럼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았을 것이고, 유부와 경량부의 관계(1363호 참조)도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 소승도 대승도, 유부도 경량부도 모두 사라지고 이렇듯 돌무더기로만 남아있다. 아직 여름이지만 저녁기운을 느끼게 한다. 동네 모스크에서 ‘알라신은 위대하다, 예배하러 오라’고 외치는 아잔 소리가 저녁기운을 타고 스투파 사이로 가라앉고 있었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65호 / 2016년 1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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