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티베트 스타일 바람은 언제 불었을까
21. 티베트 스타일 바람은 언제 불었을까
  • 주수완
  • 승인 2016.11.0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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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는 한국 탑·불상의 티베트 양식에 영향을 미쳤을까?

▲ 마곡사 오층석탑의 티베트 불탑형 상륜부. 고려시대 원나라 양식 유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중원에서는 당(唐) 제국이 발흥했던 7세기 무렵 티베트에서 송첸캄포(재위 629~649)라고 하는 왕이 등장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8세기에는 치송데첸이라는 왕이 인도로부터 파드마삼바바를 초빙하여 본격적으로 티베트 불교의 기초를 닦았다. 이 무렵 불교의 탄생지 인도에서는 오히려 점차 불교가 쇠퇴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세계불교의 중심은 점차 티베트로 옮겨가고 있었다. 급기야 13세기에 티베트는 원 제국에 점령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이를 계기로 샤카 판디타와 그의 조카 파스파와 같은 고승들에게 쿠빌라이를 비롯한 원 제국의 지도자들이 귀의하면서 종교적으로는 원 제국을 지배하는 형국이 되었다. 원 제국은 말하자면 티베트 불교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데 고속도로를 놓아준 셈이었다.

원나라의 티베트 점령 계기로
티베트불교 각국 전파 기회 제공

우리나라는 몽골문화 직·간접적
영향 받을 때 전해졌을 것 추정
마곡사 ‘라마탑형’ 상륜부가 상징
금동불상 중 티베트 양식도 다수

일부선 “원에 티베트 양식 없다”
기록상 명 때에 티베트 양식 발견
우리나라 티베트 불상의 연원도
이 시기에서 찾는 게 순리 주장

티베트·중국·한국 순 단순화 곤란
범아시아적 시각의 연구가 필요


이 고속도로를 타고 티베트 불교는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고려는 고종 46년(1259)에 30년 동안의 몽골항쟁을 접고 강화를 맺음으로써 원 간섭기에 들어갔고 이는 공민왕 5년(1356) 반원운동이 성공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에 몽골문화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티베트 불교 역시 이 때 전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상징하는 불교예술은 공주 마곡사 5층 석탑의 소위 ‘라마탑형’ 상륜부이다. 티베트에서 유행한 불탑 형식을 그대로 상륜부에 옮겨놓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 티베트 양식의 고려시대 보살상으로 소개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 38.5㎝

뿐만 아니라 불상·보살상의 양식도 변모하여 이 시기에 제작된 금동불상 중에는 티베트 양식으로 제작된 사례를 다수 확인할 수 있다. 티베트 양식의 불상은 인체표현이 매우 육감적이고 자세가 역동적이며 보관과 영락 같은 장엄은 촘촘하고 화려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연화대좌는 원래 원형의 상대와 하대가 각각 앙련과 복련의 연화좌로 구성되고 그 사이에 팔각형의 중대석이 들어가 있는 형식이었지만 티베트 불상들은 중대석 없이 바로 상대와 하대가 맞붙어 있다. 또 평면도 원형이 아니라 앞이 넓고 뒤가 좁은 삼각형 형태라는 점에서 이전의 불상양식과 확연히 구분된다. 다소 밋밋하고 정적인 한국불교미술사의 일반적인 양상에 비해 이들 불상, 특히 금동으로 제작된 사례가 많은 티베트 양식의 불상들은 흔히 귀족적 풍취가 유행했던 고려시대의 불교미술을 대변하는 존재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이러한 양식은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유행했는데, 다만 고려시대에서처럼 화려하지는 않고 다소 정제된, 그리고 보다 한국적 미감에 맞게 보관이나 목걸이, 팔찌 등의 장엄구가 단순한 형식으로 변모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세조가 발원한 것으로 생각되는 수종사탑 내부에서 출토된 일련의 금동불상군이나 혹은 익산 심곡사 석탑 출토의 금동삼존불상을 들 수 있다.

▲ 마곡사 오이성계 발원의 사리기 일괄 중 티베트 불탑 형식의 내함.

불상 뿐 아니라 불탑에 봉안된 사리기들도 티베트 불탑 형식으로 제작된 사례가 급증하였다. 유명한 이성계 발원의 사리기도 티베트 불탑 형식을 모델로 제작된 것이었다. 이처럼 불상과 불교공예에서 티베트 풍이 계속 유행한 것은 명나라 역시 티베트 불교를 계승한 결과였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억불숭유’를 표방했는데, 이에 대해 명은 조선이 이러한 정책을 펴는 것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경권을 보내 불교를 진흥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신들을 보내 조선 곳곳에 산재해 있던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동제 불상들을 모조리 쓸어가는 일에도 주저가 없었다. 어쩌면 조선이 불교를 탄압하니 차라리 귀한 불교유품이 상하기 전에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명나라로 흘러들어간 금동불상의 양이 매우 많았을 것이기 때문에 중국에 전하는 금동불 중에 일부는 이렇게 우리나라로부터 건너간 불상일지도 모른다.

여하간 대체로 우리나라 금동불상 중에서 보다 화려한 양식의 사례들은 고려말, 그리고 이보다 토착화된 양식을 보이는 금동불상들은 조선초로 편년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었다. 연구자들이 면밀히 중국 불상들을 검토해보니 막상 티베트 불교를 중원에 도입한 원나라 불교미술에서는 티베트 양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실상 원나라 시기에 티베트 불교는 원 황실을 중심으로 주로 신봉되었고, 그 외의 지역에 살던 사람들, 특히 한족들은 이미 그 전부터 전해 내려왔던 선종, 그중에서도 북쪽은 조동종, 남쪽은 임제종이 여전히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 고려의 상황도 마찬가지여서 비록 원 황실의 간섭을 받고는 있었지만 불교문화는 전통적으로 송·요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월정사 성보박물관 소장 금동6비관음보살좌상. 조선초(혹은 명대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티베트 양식의 불상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였을까? 또 우리나라 티베트 양식 불상들과 가장 유사한 불상들은 중국에서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이에 대해 대체로 명나라 영락(永樂, 1403~1424), 선덕(宣德, 1426~1435) 연간을 정점으로 하는 15세기가 중국 티베트 불상 양식이 가장 발전했던 시기였으며, 우리나라 티베트 양식 불상의 연원도 이 시기의 불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주장의 요점이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다. 비록 티베트 양식의 불상을 원나라 때 제작된 불상 중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토번승, 즉 티베트 승려들이 고려를 방문한 적도 있었고, 원나라 공주가 고려 왕실에 시집오면서 티베트 불상을 가져왔을 가능성도 매우 높으며, 또한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충선왕이 티베트에 다녀오기도 하는 등 고려가 티베트 불교미술을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일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또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연간 기록에 보면 중국 사신 황엄 등이 제주도의 법화사(法華寺) 아미타삼존상이 원래 원나라 장인들이 만든 불상이므로 도로 가져가겠다고 하는 장면도 보이는데, 이처럼 고려시대에 원나라 문물이 고려 사회에 깊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티베트 양식도 널리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북경 수도박물관 소장 금동미륵보살좌상. 명대 초기에 티베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

그럼에도 이렇게 전해진 원나라 불상양식이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원나라의 연호를 달고 있는 금동불상들 속에 일부 티베트 양식의 불상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원나라 양식을 대표하는 주류는 아니었다는 것이 명나라 영향설의 주장이다. 따라서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티베트 양식의 불상에 대해 고려말~조선초라는 다소 광범위한 연대 설정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직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원·명나라 불교미술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깊지 않아 이들 양식을 명확히 구분할 기준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거기다 이들 양식의 원형이 되었던 티베트 불상 자체에 대한 편년은 중국에서도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물론 이것은 일차적으로 중국학계에서 해결해주어야 할 문제이어서 섣불리 나설 수는 없다. 어쩌면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의 연구 시야가 넓어지면서 제기된 보다 국제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실제 티베트에서 제작된 불상이라 하더라도 이미 원대~청대를 거치는 동안 중국의 영향을 너무나 많이 받았기 때문에 때로는 이것이 티베트 고유의 불상양식인지, 아니면 중국의 영향을 받은 불상양식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 북경 수도박물관 소장 금동4비문수보살좌상. 명 영락 연간.

또 그 이전에 만들어진 순수한 티베트 불상양식을 규명하는 것도 유물이 적어 현재로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티베트 불상양식이 중국 불상양식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다시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었다고 단순화시켜서는 곤란하다. 사실상 티베트 불상양식의 기초를 제공한 것은 8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인도 북부 비하르 지역에 존재했던 팔라(Pala) 왕조의 미술인데, 이 시대의 불상양식 및 티베트와 인도를 이어주는 네팔 불상양식과의 관계까지 고려한다면 그 선후관계와 양식 형성과정의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연구가 초기에는 주로 중국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해석되었다면, 그 후에는 시야가 확장되어 중앙아시아와 인도 불교미술로까지 연결되어 큰 발전을 이루었다. 이미 통일신라 불교미술은 인도의 불교미술을 제외하고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고려말~조선시대 불교미술에 관해서는 이러한 거시적인 접근이 소극적이다. 왠지 국제교류는 통일신라시대에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티베트를 중심으로 인도, 서하, 중앙아시아, 중국이 몽골제국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타고 실시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따라서 중세 이후 불교미술에 대해서도 범아시아적인 시각의 연구가 필요한 때이다. 티베트 양식의 불상은 이렇게 매우 광범위한 공간적 범위에 걸친 거대불교 네트워크에 있어 키워드와도 같은 존재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티베트 불상양식의 정확한 편년문제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의 시작에 불과하다. 당연히 이런 복잡한 문제의 첫 매듭은 너무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다양한 문화를 용광로처럼 녹여낸 원나라가 묶었음은 자명해 보인다. 과연 우리나라에 티베트 바람은 언제 불어왔던 것일까?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66호 / 2016년 1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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