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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저 부처님을 따라서

오므라진 연꽃서 7일 기다린 행자
잎 열리며 진리 듣고 수다원 얻어

극락에 오는 것을 환영하는 말씀, 즉 내영사(來迎辭)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수순하였다”고 행자를 찬탄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저는 또 다른 정토문헌의 인용구 두 가지가 생각납니다. 하나는 당나라 선도대사의 ‘관경소’입니다.

구품 차별은 극락에 가기 전
중생 근기·수행 다름서 비롯
극락서 태어나는 건 끝 아닌
다시 수행 시작한다는 의미

“일심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오롯이 염하되, 가든지 머물든지 앉아있든지 누워있든지 시간의 길고 짧음을 묻지 말고 생각생각에 (아미타불의 명호를)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을 정정취(正定聚)의 업이라 이름한다. 저 부처님의 원을 따르기 때문이다.”

정정취의 업은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업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본 정토종의 개조 호넨(法然) 스님은 바로 이 말씀에서 “아, 염불 외에 없다. 염불을 하자”라고 결정하게 됩니다.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를 염하는 것이 자기 구원의 길이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선도대사의 말씀으로는 “저 부처님의 원을 따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량수경’의 48가지 원, 더 좁게는 제18원에서 말하는 원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원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중생은 다 극락에 왕생할 수 있게 하겠다는 원이 아니었습니까. 이때, ‘따르다(順)’라는 말의 의미는 ‘응답하다(應)’일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구절은 원효 스님의 ‘징성가(澄性歌)’라는 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저 부처님의 몸과 마음 따른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몸과 마음’은 곧 ‘부처님’일 것이고, 그것은 다시 ‘부처님의 원’일 것입니다.

물론 지금 ‘관경’의 중품중생의 문맥은 계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든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정토사상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오히려 ‘불교’는 ‘불원(佛願)’으로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러한 불원에 응답하였기 때문에, 아미타부처님께서 내영해 주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내영해 주시는 은혜를 입게 된 “수행자는 그 스스로가 연꽃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행자가 앉자) 연꽃(의 잎)은 오므라지고 서방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되었다. (극락의) 보배연못 중에서 7일이 지나자 연꽃은 다시 피었다.”

연꽃은 사바세계로부터 극락을 갈 때 타고 가는 하나의 비행물체입니다. 그런 교통수단의 역할을 합니다. 연잎이 오므라지게 되면, 행자는 그 속에서 안전하게 비행할 수 있습니다. 도착지는 물론 극락세계인데, 그중에서도 칠보로 장식된 연못입니다. 연꽃은 연못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도착한 뒤 7일 동안은 기다리게 됩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처럼, 기다려야 합니다. 다시 연꽃의 잎이 열리는 순간은 극락에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연꽃(의 꽃잎이) 다시 피어나게 되자, (행자는) 눈을 뜨고서 합장하여 (아미타) 세존을 찬탄하고서 (설법해 주시는) 진리를 듣고서 기뻐하며 수다원(須陀洹)을 얻었다. (그리고서 다시) 반 겁을 지나서 아라한(阿羅漢)이 되었다. 이를 중품중생이라 말한다.”

수다원과 아라한은 성문(聲聞)의 네 가지 과위(果位) 중에서 첫째와 마지막 넷째입니다. 앞의 중품상생에서는 “사성제를 찬탄하여 곧바로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하였고, 뒤의 중품하생에서는 “수다원을 얻고 나서 1소겁을 지나서 아라한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중품에서는 모두 마지막 경지가 아라한으로 나옵니다.

중품에서 모두 소승의 계위를 얻는다고 했으니 대승경전에서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품의 차별은 어디까지나 극락에 가기 전의 중생들의 근기나 수행의 다름에서 벌어진 것일 뿐, 그 어느 경우라도 극락에 간다는 데는 차별이 없습니다.

또한 극락에 태어나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라, 거기서 다시 수행의 길을 ‘시작’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문제는 극락에 가느냐 못 가느냐에 있는 것일 뿐, 거기서 어느 만큼의 수행을 다시 해야 하느냐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66호 / 2016년 1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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