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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팔정도에서의 번역어 문제 ②

기자명 김정빈

힌두교와 불교 분기점 ‘위빠사나’

지난주에 팔정도의 정념(正念)이라는 번역어가 팔리어 삼마사띠(samma-sati)를 제대로 옮긴 말이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필자의 이 견해를 이해하려면 부처님께서 사띠를 사마타사띠(samattha-sati)와 위빠사나사띠(vipassana-sati)로 분별하셨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중국의 옛 불교인들은 전자를 사마타(奢摩他), 후자를 비발사나(毘鉢舍那)로 음역(音譯)하여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전자를 지(止), 후자를 관(觀)이라는 말로 의역(意譯)해 사용하였다.

위빠사나 관(觀)으로 번역
이젠 여실견으로 번역해야
관은 사물 선입견으로 보고
견은 있는 그대로 ‘봄’ 의미

1980년대 이후 남방불교가 충실히 전승해오고 있는 팔리어 경전을 참조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국 불교인들은 위빠사나사띠가 사마타사띠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팔리어 전통에 따라 검토해본 결과 필자는 사마타사띠의 의역인 ‘지’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위빠사나사띠의 의역인 ‘관’에는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남방불교의 위빠사나사띠에 대한 이해를 기준삼아 북방불교의 위빠사나사띠에 대한 이해를 비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반론에 대해 필자는 첫 번째로, 남방불교는 인도어(팔리어)로 된 경전을 갖고 있는데 비해 북방불교는 번역어(중국어)로 된 경전밖에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아주 적은 양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이 있기는 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을 번역본이 아닌 원전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으리라는 것은 삼척동자에게도 자명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두 번째로, 남방불교가 이해한 위빠사나사띠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불교가 어떤 점에서 힌두교(브라만교)와 다른지를 명백히 할 수 있다. 현재 인도에서 불교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이는 인도의 전통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가 매우 유사하다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다. 서로 비슷한 바에야 신흥종교 격인 불교를 신봉하느니 그보다 더 오랜 전통을 가진 힌두교를 신봉하는 것이 인도인들에게는 더 안전하고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졌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불교인들은 불교가 힌두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 힌두교인들과 다른 종교인들은 우리에게 불교와 힌두교가 공히 세계와 삶의 덧없음(無常)과 괴로움(苦)을 말하고, 카르마(業)와 생사가 되풀이됨(輪廻)을 말하고, 그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선정(사마디)을 닦아야 함을 말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어떤 점에서 힌두교와 다른지를 물을 것이다.

필자는 그 상이점이 힌두교가 세계와 자아를 본체와 현상으로 분별하는 철학을 제시하는데 비해 불교는 그렇지 않다는 점(연기법), 이를 바탕삼아 힌두교는 대아(大我, Brahman)와 진아(眞我, atman)를 주장하는 본아론(本我論)의 입장을 취하는데 비해 불교는 무아론(無我論)의 입장을 취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거기에 더해 불교는 힌두교는 물론 다른 그 어떤 종교에도 없는 불교만의 고유한 수행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위빠사나사띠이다. 사마타사띠는 마음을 수행 주제에 집중시킴으로써 번뇌를 정지시키는 결과를 낳으며, 그래서 지(止)라는 말로 번역되는 이 선정 수행법은 불교에서도 이용되고 힌두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에서도 이용된다. 그에 비해 위빠사나사띠는 자신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수행법이며, 이 수행법은 오직 불교에만 있다.

위빠사나사띠는 관(觀)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없다. 관은 ‘인생관·세계관’ 등의 용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안경(선입견)을 쓰고 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관법(觀法)은 위빠사나사띠가 아니라 사마타사띠 수행법이다.

그에 비해 견(見)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위빠사나사띠는 ‘여실견(如實見)’, 또는 ‘견념(見念)’으로 번역되는 것이 옳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수행법을 바탕으로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깨달으셨고, 무아를 선포하셨다. 위빠사나사띠는 불교와 힌두교가 나뉘어진 갈림점(分岐點)인 것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67호 / 2016년 1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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