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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밍고라 주변지역 불적

산·골마다 절·탑·마애불상 이어지는 동아시아불교 전초기지

▲ 굼바투나 스투파.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오늘하루 밍고라 인근 불적을 대충이라도 돌아볼 셈으로 호텔 지배인을 통해 택시를 예약해 두었다. 그러나 오전 6시에 오기로 한 택시는 날이 밝고 한참을 지나서도 오지 않는다. 지배인을 깨워 다그친 끝에 7시 무렵에야 왔다. 불현 듯 불려나온 듯한 운전기사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검은 피부에 흰 곱슬 수염을 한 파슈툰 노인이었는데, 보기와는 달리 매우 친절하였다. 또한 매우 헌신적이었다. 택시 또한 1970∼80년대에 출고된, 한눈에도 고물이다 싶은 토요타 코롤라였는데, 보기와는 달리 전혀 덜덜거리지 않았다. 일례로 노인 운전사는 택시를 개천과 비포장 산길을 4륜구동같이 몰아 우리를 니모그람 승원 터 근처까지 올려다 주었다. 아찔한 경사였다.

바리코트에서 스와트강 건너
산 중턱 니모그람 승원터까지
스와트강 따라 불적·유적 탐방

7세기 조성한 자하나바드 불상
탈레반이 훼손…이후 진흙 땜질
고그다라·갈리가이 불상도 파괴

니모그람 승원터에 3기의 대탑
그 앞에 다수의 봉헌탑들 존재
스와트 바리코트 인근 많은 불적
“웃디야나에 1400의 승가람이
있었다”는 현장법사의 말 실감

답사는 먼저 밍고라 동북쪽 12㎞, 망글라 근교 산기슭에 위치한 자하나바드 불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스와트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주변의 불적과 유적을 둘러보고, 바리코트에서 스와트 강을 건너 서북쪽으로 20여㎞, 샤모자이 인근 산중턱에 위치한 니모그람 승원 터를 방문하는 것으로 스와트 답사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였다.

시내를 빠져나와 4∼5㎞ 정도 왔을까. ‘스와트 뷰’라는 근사한 이름의 호텔에서 스와트 강을 만났다. 스와트 강이 흘러오고 흘러가는 풍경이 한 눈에 조망되었다. 최근의 비 때문인지, 무더위에 힌두쿠시의 눈이 녹아서인지 황토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망글라는 스와트 강변에 위치한, 우리네 면소재지 정도의 소시였다. 이른 아침이어선지 조금은 궁색해 보이는 가로는 황량하였다. 이곳은 밍고라의 붓카라 승원터가 발굴되기 전까지 웃디야나(오장나국)의 몽게리(瞢揭釐) 왕성으로 비정되었던 곳으로, 현장의 여행기에서는 인욕선인이 칼리왕에게 사지를 절단당한 곳이 이 부근 어디쯤이라 전하고 있다.

망글라에서 우회전하여 스키 리조트가 있는 말람자바 쪽으로 달리기를 10여 분, 운전사가 황토물이 요동치며 내려오는 개천(스와트 강의 지류) 건너 저 멀리 산 밑을 가리킨다. 자하나바드 마을이란다. 차는 좀 더 상류 쪽으로 올라가 나무다리를 건너 공터에 멈추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바리게이트가 내려져 있었고, 군인이 지키고 있었다. 운전사가 초병에게 가 이야기하였다. 한참을 기다리니 상급자인 듯한 사복차림의 사내가 마을 쪽에서 내려와 우리의 방문목적을 들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는 따라 오란다.

▲ 니모그람 승원터.

마을을 지나 군 막사인 듯한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니 다시 졸병인 듯한 군인이 나와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논두렁을 가로질러 뒷산 밑 벙커로 데려갔고, 거기서 다시 막 야근근무를 마친 듯한 군인이 무장한 채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이른 아침의 방문이 그들의 일상을 깬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풍경과는 달리 분위기가 결코 한가로운 것 같지는 않았다. 이슬 같은 비가 내렸고, 몹시 무더웠다. 과수원을 지나 10여 분쯤 올라갔을까, 불쑥 거대한 바위가 나타났고, 하단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안내서에서는 이 불상의 높이가 7m로 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불상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지붕삼아 지고 있는 거대한 암괴 밑에 새겨져있기 때문인지 그다지 커 보이지는 않았다. 단정한 부처님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목구비와 옷 주름도 뚜렷하였다.

저 멀리 스와트 강이 보였다. 이 부처님은 7세기 무렵 조성된 것이라 하였으니, 지난 1400년 동안 저 땅에서 일어난 영욕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부처님의 두 눈 부위가 진흙으로 가려져 있었다. 어째서? 그 곡절과 경과를 알게 된 것은 귀국해서였다. 그것은 2007년 탈레반 무장 세력이 이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 파괴된 것을 보수하기 위해 땜질해 놓은 것이었다. 어느 인터넷 블로그에서 당시 그들 지도자(Mullah Fazlullah)의 변명을 읽었다. 왜 파괴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미소 지으며 이같이 대답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우상숭배를 금한다. 우리는 이슬람원리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제거할 것이다.”

인터넷 상에 두 눈을 잃은 자하나바드 불상의 사진이 떠 있었다. 끔찍한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들은 이미 2001년 아프가니스탄 바미얀의 세상에서 오래되고도 가장 큰 불상 2기를 로켓탄으로 폭파하는 장면을 생중계하여 세계를 경악시키지 않았던가? 왜 하필이면 눈이었을까? 간다라의 푸쉬칼리바티에는 천 번의 생 동안 눈을 보시한 왕의 전설도 전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저 하계를 내려다보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눈빛이 무서웠던 것인가?

가이드북에 나오는 다른 두 곳의 부처님, 고그다라의 부처님도, 갈리가이의 부처님도 모두 얼굴을 잃었다. 두 부처님 또한 경주 남산의 마애불상이 산 아래 중생들을 내려 보고 있듯이 저편 스와트 강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갈리가이의 불상은 1992년 인도에서 모스크가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 일단의 군중들이 훼손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바리코트로 가는 길가, 보호책도 없이 맨 바닥에 접해 있었는데, 이후로도 계속 훼손되었는지 상반신이 완전히 멸실되어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불상인지도 알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1600년도 넘은 간다라 불상이라는데. 하기야 우리나라에도 경주 박물관에 가면 목 잘린 신라시대 부처님을 수없이 만날 수 있고, 요즘에도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인이 불상을 파괴하고 훼손하니 저들만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만이 달리 야만이 아니다.

바리코트 조금 못 미친 곳에 어제 버스차창으로 보았던 신게르다르 스투파가 있었다. 마을은 큰 길에서 400∼500m쯤 들어간 곳에 있었는데, 가까이서 본 탑은 매우 크고 높았다. 상부의 탑신과 돔만 12m, 총 27m의 높이란다. 이 정도면 7∼8층의 아파트 높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스투파는 거의 대개 상부의 돔(‘안다’라고 한다)은 파괴되고 하부의 기단만 남아있었는데 이 탑의 경우 돔은 온전하였지만 기단이 파괴되어 돔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원래는 방형의 기단이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이 도로를 건설하거나 그들의 집을 짓는데 사용하기 위해 허물었다고 한다. 물론 탑 뒤 쪽으로 승가람도 있었다고 하였다.

▲ 자하나바드의 마애불상. 2007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기 이전의 모습(왼쪽)과 파괴된 모습(가운데), 그리고 보수된 모습(오른쪽).

안내판에서는 이 탑을 현장법사가 말한 웃타라세나(Uuttarasena) 즉 상군(上軍) 왕이 세운 것이라 적고 있다. 불타께서 이곳 웃디야나에 와 아파랄라 용왕을 교화하고 돌아가는 길에 일족의 왕성인 몽게리에 들러 여래의 사리에 공양할 것을 권하였고, 이에 상군 왕은 쿠시나가르로 가 비록 변방의 왕이었지만 천인(天人)의 증언으로 사리를 분배받을 수 있었고, 그것을 흰 코끼리에 싣고 오다가 대하(스와트 강)에 이르러 코끼리가 주저앉은 채 죽자 그 옆에 이 스투파를 세웠다는 것이다. 현장은 그 때 죽은 코끼리는 그대로 돌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코끼리 바위로 일컬어지는 바위가 부근 길가에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물론 이는 전설이고, 이 탑은 3∼4세기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바리코트는 탁실라에 비견되는 간다라의 고대도시이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는 박트리아에서 5만의 병력 중 보급을 담당한 일진을 카이버 패스 쪽으로 보내고, 자신은 공성대를 이끌고 힌두쿠시를 넘어 오라(Ora)와 바지라(Bazira)에서 일전을 벌였는데, 이 두 도시는 오늘날 우디그람과 바리코트로 확인되었다. 각기 그리스와 박트리아 시대의 바자르 발굴현장이 보존되고 있었다.

오라의 유적지는 비전문가 눈에 그다지 볼품(?)이 없었다. 돌로 구획한 10여 칸의 방이 전부였다. 그런데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운전사가 뒷산을 가리키며 뭐라 뭐라 하였다. 마루턱에 성채 같은 것이 보였다. 저기를 가보자는 말인 것 같았다. 좋다고 하였다. 택시는 마을과 들을 가로질러 산속으로 들어가 길이 끝나는 곳에 멈추었다. 음습한 숲길을 오르자 돌집이 나타났다. 그곳은 스와트의 힌두왕국을 정복한 마흐무드 가즈나비의 한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북인도에서 가장 오래된(1048∼1049) 모스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실망한 눈치를 보이자 뒤따라온 운전사가 더 올라가잔다. 10여분을 더 올라 능선에 올라섰을 때 돌연 스와트의 산야가 한눈에 펼쳐졌다. 아스라이 한 줄기 강이 산야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스와트 강이다. 곧장이라도 비를 내릴 듯한 기운이 스와트를 감싸 사위는 코발트의 푸르른 잿빛으로 가득 찼다. 스와트는 잊지 못할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필자는 이 장면을 첫 회 프롤로그 사진으로 사용하였다.) 그곳은 스와트의 마지막 힌두 왕국의 성채(Raja Gira’s Castle)였다.

바리코트에서 스와트 강을 건너 차크다라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바로 길가에 신게르다르의 것보다는 작지만 동일한 형태의, 방형기단과 승원의 일부를 갖춘 굼바투나 스투파가 있다. 돔 부분이 조금 허물어지기는 하였어도 방형의 기단까지 온전하였다.

▲ 갈리가이(왼쪽)와 고그다라(오른쪽)의 파괴된 마애불상. 그 옛날 스와트에는 골마다 산마다 절과 탑과 마애불상이 이어졌는데, 지금은 이렇듯 파괴된 잔상만 남아있을 뿐이다.

계속 내려가 샤모자이에서 우회전하여 농로와 같은 길을 몇 차례 바꿔 타다 운전사도 확신이 서지 않았는지 마을청년을 길잡이로 태워 다시 개울을 건너고 작은 마을을 지나 산길을 오른 끝에 안부에 자리 잡은 니모그람 승원 터에 이를 수 있었다.(바리코트에서 대략 20㎞) 승원에 들어서니 눈앞으로 넓은 골짜기 너머의 산들이 아스라이 펼쳐졌다. 비구름이 골짜기를 채우고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탁티바히는 물론이고 자말가리보다 훨씬 높은 지역처럼 느껴졌다. 이곳 북천축에서도 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겼던가? 지거천(地居天)의 꼭대기인 삼십삼천(도리천)을 흠모하였던 것인가?

정면으로 세 기(基)의 대탑이 나란히 서 있고, 그 앞으로 다수의 봉헌탑(소탑)이, 그리고 감실이 설치된 담장과 같은 구조물이 이를 둘러싸고, 다시 그 오른 편 앞 쪽으로 승원 터가 있었다. 미술사학자들은 3기의 메인 스투파가 배치된 이 절의 구조는 매우 독특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이를 불·법·승 삼보를 표현한 것이라 하였고, 혹자는 스투파를 중심으로 탑당(塔堂)과 불당(佛堂)이 배치된 것이라고도 하였다.

이곳은 구법승들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스와트 지역의 중심인 밍고라에서 떨어져 있다거나 밍고라에서 페샤와르로 이어지는 주 교통로 상에 위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제시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근인 차크다라 교외 안단데리의 스투파는 ‘대당서역기’에서 기근으로 역병이 돌아 주검이 즐비할 때 제석천이 이무기로 변해 자신의 몸을 찢어먹게 함으로써 그들을 구제하였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사니라자 하천 근처의 살부살지(薩裒殺地, sarpa-auṣadhi: 蛇藥) 승가람과 소마(蘇摩) 대 스투파로 비정되는데, 이 스투파는 힌두시대의 요새인 카말 칸을 거쳐 니모그람 승원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지도상으로는 10여㎞가 채 되지 않을 듯싶다. 마을을 지나 하천을 건너고 산등성을 넘어 안단데리의 스투파까지 도보로 여행하면 순례여행으로는 제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그곳의 스님들은 필경 그렇게 왕래하였을 것인데. 불현 듯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 길에 한국 사람들이 열광하며 몰려간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이곳 니모그람의 승원 터에는 바람만 스칠 뿐 아무도 찾는 이가 없는데.

신게르다르, 굼바나트, 굼나투나, 암루크다라, 니모그람, 안단데리 등 스와트에는 바리코트 인근에만도 마을이름을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적이 많다. 웃디야나에 1400의 승가람이 있었다는 현장법사의 말이 실감 났다. 그야말로 골마다 산마다 절과 탑과 마애불상이 이어지고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이곳은 동아시아불교의 전초기지였다. 남해를 통해 들어온 경우를 제외한다면 불교는 어떤 식으로든 힌두쿠시와 파미르를 넘기 전에 이 지역을 거쳐야만 하였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67호 / 2016년 1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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