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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팔정도에서의 번역어 문제 ③

기자명 김정빈

사띠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팔정도의 일곱 번째 덕목은 팔리어로 삼마사띠(samma-sati)이며, 삼마사띠는 사마타사띠와 위빠사나사띠로 분별된다. 중국의 역경가들은 삼마사띠를 정념(正念)으로, 사마타사띠를 지(止)로, 위빠사나사띠를 관(觀)으로 번역했다.

삼마사띠를 정념으로 번역
사마타·위빠사나는 지와 견

위빠사나사띠에 대한 이해 번역
불교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

전재성 박사가 편찬한 ‘빠알리어 사전’에 의하면 사띠라는 단어의 의미는 기억, 차림생각, 차림정신, 마음챙김, 주의깊음, 인식, 의식, 염(念), 억념(憶念)이다. “이렇듯 다양한 의미를 지닌 사띠를 어떤 말로 옮길 것인가?”라는 숙제에 대한 답으로써 중국의 역경가들은 ‘념(念)’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중국의 불교인들은 ‘념’을 ‘빠알리어 사전’에 수록된 다양한 뜻 가운데 ‘억념’이라는 한 가지 뜻으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그들은 팔정도의 일곱 번째 덕목인 정념의 의미를 ‘무언가를 마음에 떠올림’, 또는 ‘무언가를 떠올려 새김’이라고 이해했다. 그 예로써 우리는 중국 정토종이 염불(念佛)이라는 말을 부처님의 모습이나 덕을 마음에 떠올리는 것(또는 마음에 새기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해는 적어도 사마타사띠에 관한 한 잘못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위빠사나사띠이다. 사마타사띠를 억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위빠사나사띠는 억념이라는 번역어로는 충분하지 않은 특성을 가진 말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위빠사나사띠에도 수행 주제를 억념하는(새기는)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위빠사나사띠에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을 조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如實見) 알아차린다는 의미도 있고, 그 점이 더 중요하다.

이는 사마타사띠와 위빠사나사띠를 포괄하는 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두 수행법을 포괄하는 단어는 무엇이 적절할까. 아직 그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나올 것같지 않다. 따라서 필자는 사띠라는 팔리어의 번역어로서 현재 사용되는 ‘념(念)’을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념’자에 한 글자를 덧붙여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경우 사마타사띠는 지념(止念)이 되고, 위빠사나사띠는 관념(觀念)이 된다. 문제는 ‘관념’이라는 단어가 ‘생각’이나 ‘견해’를 의미하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는 점, 그렇지만 위빠사나사띠는 생각이나 견해가 형성되기 이전의 단계에서 신·수·심·법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라는 점에 있다.

이 문제는 ‘관(觀)’이라는 번역어를 ‘견(見)’으로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관’은 선입견으로서의 생각이나 견해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견’은 그것들이 형성되기 이전 단계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경우 위빠사나사띠의 번역어는 ‘견념(見念)’이 된다.

이에 대해 “왜 굳이 사띠를 한자어로 번역해야만 하는가? 순우리말로 번역하면 더 좋지 않은가?”라고 반론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위빠사나사띠에 대한 순우리말 번역어로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기도 하다. ‘마음챙김’ 말고도 위빠사나사띠의 번역어는 몇 가지가 더 쓰이고 있다. 앞에 예로 든 전재성 박사는 ‘마음새김’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이 밖에도 알아차림·주의집중·마음집중·염념상속(念念相續) 등의 번역어도 쓰이는 등 아직 위빠사나사띠에 대한 번역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한자어 번역이 필요한 이유로서 팔정도의 모든 덕목이 한자어로 표기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팔정도의 일곱 번째 덕목과 그 내용으로서의 사마타사띠와 위빠사나사띠 또한 한자어로 표기되면 편할 것이기 때문에 한자어 번역어가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사띠·사마타사띠·위빠사나사띠 등 세 팔리어 가운데 위빠사나사띠의 번역어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위빠사나사띠는 오직 불교에만 있는 명상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위빠사나사띠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제대로 번역하는 것은 곧 불교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힌두교와 불교를 분별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368호 / 2016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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