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누가 비사문천인가 : 뒤바뀐 북방다문천왕의 비밀
22. 누가 비사문천인가 : 뒤바뀐 북방다문천왕의 비밀
  • 주수완
  • 승인 2016.11.2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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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다문천왕은 위치를 바꿨을까? 지물을 바꿨을까?

▲ 석굴암 사천왕상 중 탑을 든 북방다문천.

사천왕은 우주의 사방을 관장하는 네 명의 신이다. 각각의 천왕이 상징하는 네 방위, 즉 동·서·남·북은 우주의 모든 공간을 대표한다. 사천왕이 사는 사천왕천 위에는 도리천이 있는데, 이곳은 제석천이 머무는 곳이다. 이들 제석천-사천왕으로 이어지는 위계는 바로 인도 카스트의 4계급 중 두 번째 왕족·귀족계급인 크샤트리아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탑 든 사천왕이 북쪽 우주 상징
다문천이며 비사문천으로 불려

고려까지 오른쪽 안쪽에 있다가
조선시대에 왼쪽 안쪽으로 이동

통일신라에서 고려 시대까지는
본존불이 동쪽, 조선시대엔 남쪽
향했다는 전제로 사천왕 배치해

비파 든 천왕 북방으로 보는 것은
극히 일부의 특수한 사례에 불과
시대에 따라서 본존불의 위치가
동에서 남으로 변한 이유 불명확


원래 인도·간다라 미술에서 이들은 왕족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불교도상이 동아시아로 전파되면서 점차 이들은 갑옷을 입고 무장한 전사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추정컨대 사천왕의 원래 임무는 교단에 대한 보호와 후원이었다. 고대 인도사회에서 크샤트리아의 신성한 의무 중의 하나는 종교수행자인 브라만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불교승려들도 보호받아야했다. 특히 식사 공양으로 대표되는 경제적인 후원을 통한 교단의 운영·유지 차원의 보호가 가장 중요했다. 사천왕이 석가모니께서 사용할 발우를 바쳤다고 널리 알려진 설화는 비단 밥그릇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그 밥그릇에 담길 식사의 지속적 공급을 보장한, 말하자면 왕족의 지속가능한 보시를 권장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동아시아로 건너오면서 점차 불교교단은 경제적 후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무력에 의한 외압으로부터의 보호도 필요하게 되었다. 자신의 고향을 떠난 불교는 이교·외도라는 차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폐불(廢佛)’이라는 극단적인 탄압도 견뎌내야 했다. 이때부터 경제적 후원자 차원의 사천왕은 점차 무신의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그런 가운데 사천왕은 무기나 악기와 같은 다양한 지물도 가지게 되면서, 이 지물이 각각의 방위를 의미하는 도상적 개념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도상이 일정하게 규정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조금씩 다른 버전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가지만은 분명하게 확정되어 있었는데, 바로 탑을 들고 있는 사천왕이 북쪽 우주를 상징하는 다문천(多聞天)이라 부르는 천왕으로 규정된 것이었다. ‘다문’은 ‘잘 듣는 자’로 풀이되며, 인도에서는 ‘바이슈라바나(Vaiśravaṇa)라고 불리기 때문에 음역하여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한다.

북방다문천을 상징하는 탑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첫째는 우선 다문천의 기원은 인도의 재물 신 쿠베라(Kubera)인데, 여기서 재물은 주로 보석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다문천이 들고 있는 것은 원래는 ‘보물창고’ 같은 물질적 개념의 보물이었지만 그것이 점차 ‘보탑’이라는 정신적 보물을 상징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열반에 든 석가모니에 대한 상징이다. 따라서 탑을 든 사천왕은 곧 부처의 유지, 유산, 나아가 가르침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 순천 송광사 천왕문 사천왕상. 좌로부터 북방-동방-서방-남방천왕.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북방다문천은 역시 석굴암 본실로 들어가는 입구 통로에 새겨진 탑을 든 사천왕을 들 수 있다. 이런 경우 북방다문천은 예불자가 들어가는 방향으로 볼 때 오른쪽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보통 건물이 남향이기 때문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북방다문천은 진행방향 정면에 위치해야 맞지만, 그렇게 되면 예불자의 진행을 가로막는 것이 되므로 태양의 회전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 시계방향으로 돌려서 오른쪽 안쪽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고려불화의 경우도 사천왕이 등장할 경우는 오른쪽 위쪽에 위치해서 석굴암 사천왕의 배치와 기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이르면 북방다문천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조선시대의 사찰 천왕문에 보면 오른쪽 안쪽에 있어야하는 다문천이 왼쪽 안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말하자면 시계방향으로 돌려서 이동시켜야할 다문천을 반시계방향으로 돌려서 이동시킨 것처럼 보인다. 연구자들은 처음에는 이 현상에 대해 시계방향 대신 반시계방향으로 돌리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규명하고자 했다.

이런 현상은 불화에도 나타났다. 천은사 아미타후불탱(1776년작)에서는 탑을 든 천왕이 오른쪽 위가 아닌 왼쪽 위로 자리를 옮겨서 역시 반시계방향으로 한 칸씩 옮긴 모양새다. 천은사 아미타후불탱에는 각 존상들 옆에 존명을 기록해두었는데, 이에 의하면 북방다문천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아니라, 위치는 그대로이면서 지물이 바뀐 것으로 되어 있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즉, 탑을 든 사천왕은 더 이상 북방다문천이 아니라 서방을 관장하는 광목천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대신 다문천은 원래의 위치인 오른쪽 안쪽에 그대로 위치하지만 지물은 비파를 들게 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에 대해 천은사 아미타후불탱의 존명 기록은 오류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반시계방향으로 이동하여 사천왕을 봉안하는 방식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천은사 후불탱을 그린, 혹은 그 도상을 해석한 사람은 본존이 석가모니가 아니라 아미타불이기 때문에 예불자가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면은 서쪽, 오른쪽이 북쪽이 되고 이를 반시계방향으로 돌리면 오른쪽 안쪽이 북방의 다문천의 자리가 된다. 따라서 지물은 무시하고 오로지 방위만으로 존명을 해석했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일어났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불교에 큰 영향을 준 티베트 불교도상에서는 서방광목천이 탑을 들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천은사 후불탱의 도상은 오류가 아니라는 보다 거시적인 시각의 해석도 제기되었다.

▲ 천은사 아미타후불탱 화면 좌측 하단의 탑을 든 서방천왕과 그 아래 남방천왕.

그런데 그 이후 조선 후기의 천왕문에 봉안된 사천왕상들의 수리가 하나둘 진행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명문이 발견된 대부분의 경우에서 천은사 아미타후불탱의 기록에서처럼 비파를 든 천왕이 북방다문천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승주 송광사 사천왕상(1628년 이전)을 필두로 김천 직지사 사천왕상(1665년), 양산 통도사 사천왕상(1718년) 등이 모두 비파를 든 오른쪽 안쪽의 천왕을 북방다문천으로 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천은사 후불탱의 기록을 단순한 오류로 보려던 해석은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검토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비로소 이러한 현상이 오류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을까? 일어난 현상만 보면 두 가지 문제가 중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북방다문천의 위치가 변경된 것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방다문천의 지물이 변경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선 탑을 든 천왕을 북방으로 인정한다면 북방다문천의 위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 것이 된다. 반면 탑을 든 천왕 대신 비파를 든 천왕을 북방으로 인정한다면 북방다문천의 위치가 바뀐 것이 아니라 북방을 상징하는 지물이 탑에서 비파로 바뀐 것이다. 바뀐 것은 위치일까, 지물일까?

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이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석굴암 사천왕 배치나 조선시대 천왕문 사천왕상 배치나 변화한 것은 없다. 변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사천왕을 배치할 때 시계방향으로 트는 것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작단법에 관한 책인 ‘다라니집경’에 의하면 사천왕을 배치할 때는 반시계방향으로 트는 규칙이 있었던 것 같다. 석굴암도 시계방향으로 튼 것이 아니라, 실은 석굴이 동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진입하는 쪽에서 볼 때 정면이 서쪽이고 오른쪽이 북쪽이어서 반시계방향으로 돌린 것이 현재의 위치처럼 되었다는 해석이다. 반면 조선시대 사천왕상은 남향을 기준으로 하여 반시계방향으로 틀었을 때 현재처럼 탑을 든 다문천이 왼쪽 안쪽에 위치하게 된다.

결국 통일신라~고려시대까지는 본존불상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는 개념으로 사천왕을 배치했고, 조선시대에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개념으로 사천왕을 배치한 셈이다. 이 규칙에 의하면 굳이 탑을 든 천왕 대신 비파를 든 천왕이 북방이 되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따라서 비파를 든 천왕을 북방으로 보는 것은 극히 일부의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아직 왜 동쪽에서 남쪽으로 기준이 변했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원래 석가모니가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실 때 앉았던 동향한 자세를 따라 불교사찰도 동향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까지는 이러한 전통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유교가 중심 이념이 되면서 남쪽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개념이 정립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있다. 과연 정말로 반시계방향으로 트는 규칙만 존재했을까? 막상 중국이나 티베트에서는 이러한 규칙이 보이지 않는데, 우리나라만 그런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나아가 이렇게 사천왕 배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비파를 든 천왕이 다문천으로 되어 있는 명문상의 문제를 조선시대의 일반적 인식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특수한 사례로 볼 것인가? 만약 일반적이었다면 조선은 남쪽을 기준으로 하는 사천왕 배치법을 그 내용은 상실한 채 형식만 받아들였다는 것이 되고, 특수한 상황이었다면 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특별한 이유로 형식을 파괴한 것이 된다.

간단하게 보자면 우리나라는 사천왕 도상을 읽을 때 다소 ‘습관적’으로 오른쪽 안쪽을 무조건 다문천으로 읽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티베트와 중국 사천왕 배치의 규칙이 명확히 연구된 이후에야 해결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68호 / 2016년 11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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