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3. 괘불(掛佛), 시공을 펼치는 그림 ; 그 기원의 비밀

기자명 주수완

조선 광해군 때 제작한 죽림사 ‘괘불세존탱’이 괘불 시원일까?

▲ 내소사 영산회괘불탱. 1700년. 높이 9.95m. 전북 부안.

‘야단법석’.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는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모습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것이 원래는 야외에 법석을 편다는 뜻이라는 것은 불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바이다. 왜 법당 안에 펴던 법석을 야외로 옮겨야했을까?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억불숭유 정책이 본격화되자 불교교단이 점차 대중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원인이라는데 대체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대중들을 위한 집회는 보다 큰 규모로 열리게 되었고, 법당 안에서는 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야외 법회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것으로 본 것이다. ‘야단법석’의 기원이 원효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전설들도 원효 스님이 그만큼 중생구제에 힘을 쓰신 분이기에 그렇게 연관되었으리라.

조선 시대에 억불정책 극복하고
대중 마음 얻으려 야단법석 펼쳐
법당 밖 야외법회에 괘불도 확산

중·일엔 없었고 티베트에선 유행
‘탕카’는 ‘탱화’의 어원이기도 해

괘불 시원을 고려불화서 찾거나
삼국시대 마애불로 보는 시각도
조선불교 꽃 괘불 효시는 논쟁 중

그러나 한편으로는 야외란 단순히 넓은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포교를 위해 유행하시면서 어떤 곳이든 구애치 않고 설법을 하셨는데, 그것은 마을 공회당일 수도 있고, 사당일 수도 있고, 기원정사와 같이 하안거를 위해 마련된 합숙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곳은 마가다국의 영축산이었는데, 이곳은 수많은 대승불교 경전, 그 중에서도 특히 ‘법화경’이 설해진 곳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법당 앞에서의 예불이 일상화되어 있는 중국의 사찰. 대만 용산사.

물론 석가모니의 영축산 설법과 대중들을 위한 야외법회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석가모니도, 그리고 예수도 그 분들의 가장 위대한 설법을 모두 산에서 행하신 것은 아무런 차별도 없이 누구나 와서 설법을 들으라고 하는 평등의 뜻이었다. 따라서 야외란 단순히 넓은 곳이 아니라, 바로 차별이 없는 곳을 의미했으며, 그런 만큼 설법의 내용은 쉽게 풀어서 전달되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많은 설법 중에서도 모두를 위해 설해진 산상에서의 설법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으며, 후세의 불교도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산재’를 베푼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영산재’란 곧 영축산에서의 설법을 재현하는 의식을 말한다.

이렇게 야외에서 설법을 하다 보니 법당에 걸려있는 불화나 불상으로는 거대한 의식의 중심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법당에 걸린 후불탱화도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니지만, 야외에서는 아무래도 왜소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높이 10m 가량의 거대한 걸개그림을 만들어 의식에 사용했는데, 이를 ‘괘불’이라고 한다. 현존하는 괘불의 수량은 110여점이고 그중에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대략 50여점에 이른다. 괘불을 소장한 사찰들은 보존상태만 허락된다면 사찰별로 적당한 시점에 영산재를 베풀어 이들을 야외에 걸어 대중에 공개하는데, 이 괘불을 괘불대에 걸어 펼치는 모습은 마치 2500년 전 인도에서 벌어졌던 영축산 설법이 시공을 뛰어넘어 21세기 우리나라에 현현하는 일종의 출입구가 열리는 듯한 감동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장중한 의식의 주인공인 괘불은 이상하게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제작되지 않았다. 이처럼 아름다운 의미를 지닌 불교 최대의 콘텐츠임에도 불교를 지향했던 이들 두 나라에서 괘불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중국의 불당이나 불화는 너무 커서 그 안에 대중들이 들어가도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굳이 밖에서 의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혹 법당 안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 모이더라도 법당 문을 활짝 열고 법당 앞에서 예불을 해도 충분한 공간과 크기가 확보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실제 중국에 가보면 법당 밖에 커다란 향로가 놓여있고, 그 앞에서 예불을 드리는 수많은 불교신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예불이 법당 안에서 진행되는 것과 다소 다른 점이다.

▲ 티베트 간난 지역 랑무 사원의 쇄불의식.

그러나 우리나라가 반드시 중국보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밖에 내놓고 법석을 폈던 것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희한하게도 중국에는 괘불이 없지만, 티베트에는 우리와 비슷한 대형의 야외용 걸개불화가 있다. 티베트에서는 불화를 ‘탕카’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가 불화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 ‘탱화’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들도 특별한 의식을 위해 거대한 탕카를 야외에 걸 때가 있는데, 채색화보다는 천을 이어 붙여 형상을 표현한 경우가 많고 크기는 우리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해서 괘불대와 같은 지지대로는 걸 수 없다. 그래서 사찰 벽면에 걸거나, 그보다 더 큰 경우는 거의 언덕 하나를 덮어버리 듯이 펼쳐놓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우리의 괘불재나 영산재처럼 시가체의 타쉬룬포 사원에서 5월에 펼쳐지는 분향제, 7월에 라싸 드레풍 사원에서 펼쳐지는 쇼툰절 때 괘불을 거는데, 이를 그곳에서는 쇄불(晒佛), 즉 부처님께 바람과 햇볕을 쐬어드리는 것이라 부른다.

중국에는 없는 이러한 괘불과 괘불을 거는 의식이 어떻게 저 먼 티베트 땅에 존재할까? 우리의 괘불재는 티베트에서 온 것일까? 이러한 괘불의식은 티베트 불교의 확산을 따라 몽고 지역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중국 본토, 즉 중원에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서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상태다. 어떤 사람들은 우연한 일치일 뿐 티베트와의 직접적인 교류를 증명할 자료는 없다고도 하고, 대형불화를 건다는 형식만 같을 뿐 의미적 맥락은 다르다고도 한다. 그러나 불교가 인도에서 한국에까지 전해지는 동안 지역적 특성에 따라 맥락이 변한 경우는 많지만, 그렇다고 두 지역의 불교가 상호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 가장 오랜 연대를 지닌 죽림사 괘불. 1622년.

한편으로는 과연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괘불이 제작되기 시작했는가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현재 알려진 바로 조선시대의 괘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죽림사 괘불로 알려져 있다. 광해군 14년(1622년)에 제작된 것이며 크기도 5m×2.6m 가량으로 후대의 괘불들에 비해 다소 작은 편이지만, 화기에 분명히 ‘괘불세존탱’이라 적혀있어 괘불의 기능을 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를 괘불의 시원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런데 과연 이 괘불이 정말로 최초의 괘불이었을까?

이에 대해 고려불화 중에서 괘불의 시원을 찾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현재 일본 가가미진자(鏡神社)에 소장된 수월관음도는 1310년에 그려졌으며 크기가 4.3m×2.5m로 같은 시기 한·중·일 불화 중에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이는 족자의 크기를 뺀 죽림사 괘불의 크기와 유사하여 괘불의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에도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원래 이 수월관음도의 높이는 5m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비록 괘불이 될 자격은 갖추고 있지만 정말로 야외의식을 위해 법당 바깥에 걸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어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 고려불화 중 가장 큰 크기로서 괘불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월관음도. 1301년. 현재 일본 가가미진자(鏡神寺) 소장.

한편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괘불뿐 아니라 비단에 그려진 불화 자체가 중국·일본보다는 고려에서 더 적극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불화도 전 시기에 걸쳐 두루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13~14세기 고려 후기에 집중되어 분포한다. 과거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단지 남아있는 작품이 그 시기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이전 시기에는 중국·일본·고려가 모두 벽화 중심의 불화를 그리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비단에 불화를 그리는 방식이 유행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아마도 밀교와 같은 어떤 의식의 진행을 위해 이동이 가능한 걸개그림 불화가 유행했다고 보는 주장이다. 어쩌면 일찍이 이렇게 이동식 걸개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노하우가 축적되어 등장한 것이 괘불일지도 모른다.

▲ 마치 한 폭의 괘불을 보는 것 같은 고려시대의 마애불. 시흥 소래산. 높이 14m.

다른 한편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등장한 마애불을 괘불의 효시로 볼 수도 있다. 마애불이 위치한 산은 처음부터 영축산 설법을 재현하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을 것이다. 실제 시흥 소래산의 마애불은 선각으로만 묘사되어서인지 마치 붓으로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만약 이를 실제로 비단에 옮겨 그린다면 그야말로 괘불처럼 될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영축산에서 석가모니를 만나기 위해 산으로 갔겠지만, 점차 바위 대신 비단에 석가모니를 그려 중생들이 모여 있는 너른 곳으로 모셔오는 개념으로 변화했고, 이것이 점차 괘불로 발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재료로만 보자면 비단에 그려진 괘불은 티베트의 밀교의식의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에 와서 처음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만,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를 재현해놓고 다시 만난다는 개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불교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 불교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괘불, 그 씨앗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주수완 고려대·서울대 강사 indijoo@hanmail.net

[1370호 / 2016년 12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