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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에필로그 [끝]

교법 설하고 증법 닦는 자 존재한다면 정법은 다시 소생하리라

▲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중국의 서쪽 끝인 카슈카르에 이르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베삼에서 칠라스 사이 풍경이 아름답다. 칠라스와 길기트 사이의 풍경.

인도 령 잠무&카슈미르 주(州)의 여름 주도인 스리나가르에서 시작한 카슈미르/간다라 기행을 파키스탄 령 아자드 카슈미르의 주도인 무자파라바드에서 끝맺으려 하였지만, 그러지 못하였다. 아쉽지만 그 초입인 만세라에서 끝맺기로 하였다. 마침 그곳은 아쇼카 왕의 암각법칙이 있는 곳이며, 베삼―길기트―파미르의 쿤자랍 패스를 넘어 중국의 서쪽 끝인 카슈카르에 이르는 카라코람 하이웨이(KKH)를 탈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카슈미르와 간다라의 여러 지역을 20여 일에 걸쳐 임무를 수행하듯 답사하였다. 스리나가르―바라물라―아반티포라-아크누르―암리차르―라호르―시알코트―라왈핀디―탁실라―페샤와르―마르단―밍고라―이슬라마바드―머리―만세라의 코스를 밟았다. 순서는 다를지라도 과거 구법승들도 거쳤던 곳들이다.

인도령 스리나가르서 만세라까지
20여일 동안 임무 수행하듯 답사

해발 3천 미터의 황량한 산악에
펼쳐진 초록바다가 곧 카슈미르
과거 선인 노닐고 불교학 시작된
그곳서 불교 자취 찾기도 어려워

옛 불교도들 숨결 느끼기는커녕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 간다라

시알코트 바다같이 넓은 체납강
시장 속 핍팔라수 만난 건 경이

위험하고 시간 없고 무지했기에
놓친 불적 많은 것이 못내 아쉬워

십수 년 전 라다크의 레에서 스리나가르로 내려오면서 본 소나마르그의 녹색 숲은 그 자체로 경이였다.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찾기 어려운 해발 2000∼3000미터 황량한 고원의 산악에 불쑥 초록의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거기가 카슈미르였다. 불교공부를 시작하고서 수없이 들어온 카슈미르, 아니 ‘가습미라(迦濕彌羅)’ 혹은 ‘계빈(罽賓)’을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순간이었다. 부처님도 그러하였던 모양이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에서 여래는 북천축(스와트)의 아파랄라 용왕을 교화시키고 돌아가다 저 멀리 녹색(綠色)의 숲(樹林)을 보고 동행한 금강수 야차에게 확인하였다. “그대도 저 녹색의 숲을 보았느냐?…(중략)…저곳 카슈미르는 비파샤나를 따르는 이에게 제일가는 처소일 것이다.”

▲ 인더스 강의 까마득한 협곡에 기댄 실오라기 같은 길이 카라코람 하이웨이이다.

한중수교 후 우리에게 마침내 실크로드가 열리면서 파미르고원을 넘어 인더스 강의 까마득한 협곡에 기댄 실오라기 같은 길(카라코람 하이웨이)을 타고 내려오면서 본 은산철벽도 경이로웠다. 풍광도 풍광이었지만, 그 길은 승가제바, 불타야사, 구나발타라 등 수많은 천축의 고승대덕이 불법을 전하기 위해 지났고, 법현도, 혜생도, 현장도, 혜초도 불법을 구하기 위해 넘었던 길이었기에, 아니 우리가 접하는 대소승의 거의 모든 경전이 그 길을 거쳐 왔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그 때의 경이로움을 다시 느껴보고자 떠난 기행이었다. 내가 아는 한 적어도 우리가 보고 들은 불교(학)는 모두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카슈미르의 비바사사(Kaśmīr-Vaibhāṣika)는 불교학의 정초자였다. 파미르 너머로 불법을 전한 이도 그들이었다. 카슈미르의 최대 승원은 스리나가르 근교 파라하스포라의 승가람이다. 오공이 구족계를 받고 율의를 학습하였다던 몽제사(蒙鞮寺)이다. 그곳은 여전히 정적에 싸여 있었지만, 그 때와 같은 긴장감(?)이 없어서인지 경이로움은 느끼지 못하였다. 현장법사가 카슈미르 서쪽 관문을 들어와 첫 밤을 보낸 바라물라의 후스카라 승원터에서는 또 다른 감회가 없지 않았지만 더 이상 서쪽으로 나갈 수 없는 안타까움이 일었다. 여기서 멀지않은 우리(Uri)의 카만(Kaman) 국경 검문소만 지나면 파키스탄 령 카슈미르이다.

▲ 스리나가르에서 60여㎞ 떨어진 히말라야 산록 마을인 나랑나그에서 소나마르그로 가는 트레킹코스 초입. 동네 아주머니가 나무를 해 이고 가고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는 카슈미르에 100여곳, 간다라에 1000여곳, 웃자야나에 1400여곳의 승가람이 있었다고 하였지만, 당시에도 이미 다수가 황폐하였고 이교도가 들어와 잡거(雜居)하고 있었다. 그로부터도 다시 1300여년이 지났다. 물론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협(脇) 존자가 ‘현성이 모여들고 선인이 노니는 곳’이라 찬탄하였던 카슈미르에서 불교의 자취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스리나가르 주변의 하리완이나 파라하스포라, 바라물라, 혹은 아크누르의 암바란 승가람 터를 찾았지만, 황량하였고 달리 찾는 이도 없었다. 입장료도 물론 없었다.

간다라의 경우 탁실라나 마르단, 밍고라, 바리코트 등지에서 훨씬 많은 불적을 접할 수 있었지만, 당시 불교도들의 목소리는 고사하고 숨결을 느낄만한 여유도 없었다. 도리어 불안해보였고 위태로워보였다. 자하나바드나 고그다라의 불상은 탈레반 점령시절이나 그 이전에 파괴된 것이라 할지라도 샤바즈가리의 아쇼카 왕 암각법칙은 방문 당일 불과 한두 시간 전에 훼손된 것이었고, 칠라스의 암각불상 역시 바로 어제 파괴된 듯하였다. 바위 밑에는 떨어져 나온 암각의 불상 파편들이 잡석에 섞여 있었다.

▲ 나랑나그 마을의 카슈미르 전통가옥.

칠라스는 카라코람 하이웨이 상에 위치한 인더스 상류의 강변 마을로, 20년 전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도로 아래 위와 강 건너 돌산 밑에 불상·스투파·공양 상과 법륜 등의 각종 문양이 새겨진 흑갈색의 바위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널려 있었다. 놀랍고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1300∼1400년 전의 불교암각화가 이토록 마구 널려있다니. 그러나 이제 암각화는 고사하고 흑갈색의 바위 자체가 눈에 띄지 않았다. 땅 속 깊이 박혀있을 큰 바위에 새겨진 두세 점의 불상과 너 댓 점의 스투파 암각화가 고작이었다. 그것도 불상은 어김없이 얼굴 부분이 돌에 쪼여졌거나 페인트로 훼손되어 있었다. 그 많던 암각화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파라하스포라 승가람의 석재가 그러하였듯이 산사태로 유실된 도로를 보수하는데 사용된 것일까?

경이로움도 있었다. 옛 지명이 샤카라인 시알코트의 헤드 말라라에서 바다같이 넓은 체납 강을 보았다. ‘나선비구경(밀린다왕문경)’에서 말한 샤카라(śākala, 혹은 sāgala, ‘大海’)의 ‘해변(海邊)’이 바로 여기가 아니던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하였던 푸루샤푸르, 페샤와르 핍팔 만디(시장)의 한 골목에서 본 핍팔라 수(보리수)도 역시 그러한 것이었다. 물론 바로 이 나무, 바로 이 지점은 아니었겠지만, 현장에 의하면 석가여래는 성 밖 동남쪽의 이 나무 밑에 앉아 당신 멸도 후 카니시카 왕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남쪽에 대탑을 세울 것이라 예언하였다. 물론 부처님이 이곳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간다라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옛날 신라 사람들이 과거 가섭불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설법하였다고 생각하였듯이.

▲ 칠라스의 암각불상. 칠라스에서 온전한 형태의 불상 암각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다.

카니시카 스투파가 발굴된 샤지키데리는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곳, 어처구니없는 추억거리이다. 이미 북위시대 서역 최고의 탑으로 이름 떨쳤고, 법현도 현장도 혜초도 찾아 예배하였던, 인도미술사는 물론이고 인도불교사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샤자키데리’는 그 마을 사람들조차 알지 못하는, 마을 오수로 악취를 풍기는 공동묘지로 변해 있었다. 샤지키데리는 언제부터인가 ‘아쿠나바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곳에 팻말이라도, 당시 대탑의 가상도라도 세우는 것이 ‘간다라’에 빚지고 있는 동아시아 불교제국의 의무라고 생각되었다. 그곳은 동아시아 불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카니시카 대탑은 불교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 아니었던가?

위험하다는 생각에서,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 혹은 무지한 까닭에 놓쳐버린 불적이 답사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나라의 보배인 백상(白象)을 적국에 보시하여 왕궁에서 쫓겨난 수다나 태자가 은거하며 처자마저 보시하였다던 샤바즈가리의 메카산다산(단특산)은 위험하여 (혹은 너무 더워) 올라가 보질 못하였고, 안단데리는 미처 알지 못하여 가보질 못하였으며, 디르나 칫트랄 등의 다른 지역은 시간제약으로 일정에도 넣지 못하였다. 물론 우리의 기행목적이 불교학의 생산 현장을 답사하는 것으로 간다라의 불적 탐사는 아니었기에 그 모든 곳을 탐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어디 그러한가? 기왕에 이곳까지 온 것, 가볼 수 있는 곳은 다 가보고 싶었지만 그러하질 못하였다. 전문 연구기관이나 불교종단 차원에서 카슈미르와 간다라 지역의 모든 불적에 대한 조사 집성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미 몇 권의 보고서가 나와 있지만, 매우 한정된 불적에 대한 것이었다.

필시 현장도 혜초도 거쳐 갔을 스리나가르(카슈미르)-아난타그-쇼피안-바플리즈(푼치)-아크누르-잠무로 이어지는 이른바 무갈 로드는 아크누르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지만, 설혹 좀 더 일찍이 알았다고 할지라도 답사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 길은 세상에서 가장 험준한 길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카슈미르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가보아야 할 곳이다.

▲ 인더스 강 건너편의 스투파 암각. 석양을 받아 붉은 빛을 띠고 있다.

라호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피골상접하여 힘줄과 핏줄이 생생한, 그러면서도 눈빛이 형형하게 살아있는 유명한 불타의 고행상은 마르단의 자말가리 승원 동쪽에 우뚝 솟은 영험스럽게 보이는 산자락 어디선가(‘시크리’라는 마을, 현 Shakar-tangi) 발견되었다는데, 그 산에도 올라가보고 싶었다. 박물관에서 유리통 속의 고행상을 관람(?)하는 것은 토함산이 아닌 박물관 한쪽 모퉁이에서 석굴암의 부처님을 뵙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차크다라의 안단데리 스투파에서 니모그람 승가람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하였는데, 그 길도 걸어보고 싶었다. 필경 옛날 거기에 살았던 승려들도, 이방의 구법승도 그 길을 걸었을 것이니.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카슈미르의 영광을 드러내었던 ‘현성들과 선인들’의 자취를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현장법사는 푸루샤푸르(페샤와르)의 카니시카 승가람을 순례하면서 이같이 회고하고 있다. “가람을 건립한 이래 뛰어난 이들(異人)이 간간이 배출되었으니, 논을 지은 논사들과 아라한 등의 성과(聖果)를 증득한 성자들의 맑은 바람으로 인해 지극한 덕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논을 지은 논사들(諸作論師)’이란 요즘말로 하면 (교)학자일 것이고, ‘성과를 증득한 성자들(諸證聖果)’이란 (수)행자일 것이다. 교학과 수행이 별개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아비달마 논서 상에서도 비파샤나(觀)와 사마타(止)의 겸수(兼修)를 강조하고 있지만, 불교도들은 일찍부터 불타 정법(佛法)을 교법(敎法, āgama: 혹은 세속정법)과 증법(證法, adhigama: 혹은 승의정법)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교법이란 경·율·론의 삼장을 말하고, 증법은 보리분법의 무루도를 말한다. 해서 이 두 법이 지속되는 때가 정법의 시대이다.

그렇다면 불법은 언제까지 지속되는가? 이는 인도 불교도들의 중차대하고도 매우 오래된 관심사였다. 불법이 무상심심의 미묘법이라 해서 무한정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교법은 그것을 설하는 자가 지속하는 만큼 지속하고, 증법은 그것을 닦는 자가 지속하는 만큼 지속한다. 설하는 자도, 닦는 자도 없음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민속촌이나 박물관의 불교처럼 생동하지 않는 죽은 불교일 것이다. 현장법사가 카니시카 승가람 조(條)에서 ‘논을 지은 논사들’과 ‘성과를 증득한 성자들’에 대해 말한 것은 이 가람이 500년 이상 지속하여 온 것에 대한 찬탄이었고, 앞으로도 그만큼을 지속하리라는 염원에서였다.

카슈미르를 초기 불교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던 ‘대비바사론’에서는 여래 정법을 이러한 두 형식으로 논의하면서 정법의 멸진에 관해 이야기한다. 정법의 멸진은 두 가지 인연에 의해서이다. 서방에서 무법(無法)의 왕이 내려와 승가람을 파괴하고 비구를 죽이며 경전을 남김없이 불태우는 것이 첫 번째 인연이고 (그렇더라도 교법을 설하고 증법을 닦는 자가 존재한다면 정법은 다시 소생한다), 교법을 행하는 자(삼장)와 증법을 닦는 자(아라한)가 서로를 미워하여 죽이는 것이 두 번째 인연이다. 이는 정법멸진에 관해 논설하는 거의 모든 경론에서 공통적으로 전하는 사실이다.

세친은 ‘대비바사론’에서의 여래 정법에 관한 논의를 그의 ‘구사론’ 귀결 송(頌)으로 전한다. “불타의 정법은 ‘교법과 증법’ 두 가지이니, 말씀과 깨달음을 본질로 한다. 정법을 존속시키는 이는 바로 이를 설하는 자와 닦는 자이다.”

인도에서는 왜 불법이 사라졌던가? 세친은 ‘구사론’ 귀결 송에서 이에 대해 답하고 있다. 우리는 불법이 소생하는 시절에 살고 있는가, 사라지는 시절에 살고 있는가? 2000년 전 카슈미르의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이 이미 이에 대해 답하였다. 지난 일 년 동안 읽어주신 법보신문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71호 / 2016년 1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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