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아난과 위제희에게 말씀하셨다. 하품하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어떤 중생이 선하지 않은 일, 오역죄, 십악업을 짓고, 모든 선하지 않은 일이란 일은 다 하였다고 하자.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악업을 지었기 때문에 마땅히 악도에 떨어져서 수많은 겁(劫) 동안 끝이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관경’서 염불은 관불의 의미
부처님 떠올려보는 관찰 지칭
하품하생에게 칭명 권하는 건
관찰보다는 칭명이 쉽기 때문
부처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교훈은 인과(因果)입니다. 착한 일을 했는데 나쁜 과보를 받는다든가, 나쁜 일을 했는데 좋은 과보를 받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악한 과보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품하생에서는 오역죄를 지은 중생들까지 다 구원하는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무량수경’보다 진일보한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목숨이 다할 때 선지식으로부터 갖가지로 위로를 받고 훌륭한 진리를 설해주시는 것을 (듣고 아미타) 부처님을 염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고통이 몰려오자 황망하여 부처님을 염할 수 없게 된다.”
성불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빠름과 늦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죄악이 크고 무거운 중생들까지, 악인들까지 다 제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그 점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관경’의 절정은 하품하생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하품하생에서는 오역죄를 범한 중생들까지 포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선지식은 대안을 제시합니다.
“선지식은 ‘그대가 만약 능히 (아미타불을) 염할 수 없다면, 마땅히 무량수불(의 이름)을 일컬어라. 이렇게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가 끊어짐이 없게 하여 십념(十念)을 갖추어서 ‘나무아미타불’이라 일컬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아미타불을 염하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이름을 일컫기를 말씀하십니다. 염불 대신 칭명입니다. ‘관경’에서 말하는 염불은 관불(觀佛)의 의미입니다. 부처님을 떠올려보는 관찰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품하생의 중생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시되는 대안이 칭명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관찰 보다는 칭명이 쉽기 때문입니다.
이 칭명을 나중에는 칭명염불이라고 말하게 되고, 다시 줄여서 ‘염불’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염불’이라 하면, 곧 ‘칭명염불’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관경’에서는 그 두 가지 용어를 예민하게 분리해서 말합니다.
또 중요한 개념이 하나 더 나옵니다. 바로 ‘십념’이라는 말입니다. 원문에서 “구족십념(具足十念), 칭나무아미타불(稱南無阿彌陀佛)”이라 하였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십념을 구족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일컬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기 전에 이미 ‘십념’이 되어야 합니다. 이 경우의 ‘십념’은 질적인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롯이’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가 사실 어렵지 않을까요?
앞에서 십념을 일념의 의미로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질적인 해석입니다. 그런데 저는 양적인 해석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십념을 십성(十聲)으로 보고, 일념을 일성(一聲)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열 번 하는 것이 십념이고, 한 번 하는 것이 일념이라는 해석입니다.
저는 이 양적인, 즉 숫자로 해석하는 것도 의미 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정토신앙은 저 아래에 있는 중생들까지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열 번만 해라” 혹은 “한 번만 해라” 이렇게 말하는 데 정토신앙의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십념을 갖출 수 있도록 ‘나무아미타불’을 일컬어라”고 해석해도 될 것 같습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71호 / 2016년 12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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