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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철학박사 석법성 스님

경전 접한 환희심에 발심출가…역경으로 지혜의 바다 전한다

▲ 책꽂이에 빼곡한 책 어느 하나 스님의 손길 닿지 않은 것이 없다. 아무 책이나 꺼내 펼쳐보아도 구절구절 읽으며 떠오른 생각과 관련된 자료들을 적어 놓은 손글씨가 가득하다.

꼬박 10년 세월이 걸렸다. 세 번 거듭된 출판사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그럼 한 번 해보죠”라고 선뜻 승낙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05년 ‘대지도론’ 번역을 시작, 10년이 훌쩍 지난 2016년 2월 마침내 ‘대지도론’ 완역본 5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의활동, 논문집필은 물론이고 바깥출입이나 사람들과의 왕래까지도 모두 끊은 채 매달린 10년 세월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맏딸
‘불교는 인본주의’라는 말에
조계사 찾아 경전공부 시작
경전 말씀에 환희심 솟구쳐
“이 좋은 법 배워 전하겠다”

‘대지도론’ 번역 시작하며
두문불출 역경에만 매달려
“문화·역사·사상 전반에
이해 있어야 올바른 역경”

‘대지도론’은 ‘대승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용수보살(150?~250?)이 집필한 ‘대품반야경’ 주석서다. 모든 반야사상을 광대하게 섭렵하고 있어 ‘불교의 대백과전서’라고도 불린다. 용수보살이 집필한 산스크리트본 ‘대지도론’은 본래 1000여권이었다. 이 방대한 논서가 구자국 출신 삼장법사 구마라집(344~413) 스님의 손을 거쳐 100권의 한역본으로 정리돼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 현장 스님과 함께 2대 역경가로 불리는 구마라집 스님은 왕명을 받아 장안에서 ‘대지도론’을 번역할 때 무려 1000명의 윤문전문가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대지도론’ 번역이 얼마나 큰 규모의 불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만 보인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법운법성(法雲法性) 스님이 아무리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하다 해도 혼자 힘으로 10년 만에 이 대작불사를 재연했으니 차라리 기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스님은 “언어와 문자에 능하다고 해서 섣불리 역경을 시도해서는 안된다”고 단언한다.

▲역경에 필요한 조건은.
“글자 읽을 줄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역경전을 번역하려면 한문 독해력 외에 문헌학, 사상학, 역사학에 대한 관점이 정립돼 있어야 하고 한역경전 전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불교경전은 부처님 재세시부터 후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당대 모든 사상과 문화의 결정체다. 그런 경전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의 사상, 문화와 또 한 번 어우러졌다.  한역경전 속에서는 인도의 사상과 문화뿐 아니라 서양철학이나 중국철학, 중국의 문화적 특성까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따라서 사상과 문화, 역사에 대한 포괄적 이해 없이 올바른 역경이 이뤄질 수 없다.”

▲한역경전 번역은 이미 상당 수 마무리되지 않았나.
“역경은 현대의 언어와 정서를 담는 과정이다. 그 시대의 언어로 불교를 이해하고 전하는 것이다. 때문에 원전을 토대로 한 역경작업이 지속돼야만 불법이 단절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다.”

법성 스님에게도 ‘대지도론’ 번역은  바르게 불법을 만나는 시간이자 방법이었다.

“번역을 마치면서 역자 스스로 자문해 본다. 만약 ‘대지도론’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면 과연 부처님의 참된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불법을 바르게 알고 정행(正行), 정행(精行)을 할 수 있을까? ‘대지도론’에서 천명하는 반야의 요지나 이치를 모른다면 불법을 모르는 것이고, 진정한 불법의 부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지도론’ 서문에 덧붙인 스님의 이 고백은 출가원력과도 맞닿아 있다.

스님의 속가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이었다. 조부는 고향인 신의주에 최초로 교회를 건립했다. 한국전쟁 때 남하해 서울에 정착했지만 집안 식구 대부분은 여전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런 집안 7남매의 맏딸이 스님이 됐다. 애초 독실한 기독교신자는 아니었다지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케 하는 것, 그것이 원력이다.


▲ ‘대지도론’ 번역에 활용된 고간본. 빈틈없는 메모들이 스님의 고민을 대변해준다.

▲출가를 결심한 이유는.
“어머니가 절에 다니셨다. 신여성이었고, 집안의 종교를 자녀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살아보니 종교는 필요하지만 어떤 종교를 택할지는 각자 판단할 일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모친의 권유였나.
“아니다. 원래 내가 고집이 세고 누구 말을 듣는 성격이 아니다. 이십대 무렵에 이모를 따라 교회를 한 번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영어 성경책을 얻어 읽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오신날 절에 가셨던 모친이 도반들과 내 얘기를 하신 것 같다. 어떤 거사님이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해 같이 집으로 오셨다. 거사님이 나에게 ‘불교가 뭐라고 생각하냐’ 묻기에 성경에서 봤던대로 ‘나 이외에 잡신을 믿지 말라고 했으니 이왕 종교를 가지려면 유일신을 믿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답했다. 그랬더니 ‘불교는 신본주의가 아니고 인본주의입니다’ 하는 거다.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딱 4구절이었다. 더 이상의 설명도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 거사가 불교란 무엇인지 더 자세히 설명했다면 불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조계사까지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조계사를 찾은 첫날, 우연인지 필연인지 청년법회 창립 5주년 기념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법당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신도들이 법요집을 들고 식순에 따라 법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찬불가도 불렀다. 그전까지 상상하고 있던 불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불교도 대단한 종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노래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찬불가를 따라 불렀다. 앞줄에 앉아있던 한 보살님이 고개를 돌려 유심히 바라보더니 “끝나고 나 좀 보고 가요”라며 먼저 말을 건넸다. 법회가 끝난 후 그 보살님 손에 이끌려 따라간 곳이 조계사합창단이었다. 합창단총무라는 보살님은 “꼭 합창단원이 돼야 한다”며 그자리에서 합창단에 입단시켰다. 얼떨결에 합창단원이 됐다. 매주 두 번씩 모여 연습을 했고 얼마 후부터는 단원들과 함께 경전공부도 시작했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는 일들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벌어졌다.

▲경전이 어렵지 않았나.
“아니다. 처음 배운 경전이 ‘금강경’이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심이 일었다. ‘금강경’을 시작으로 ‘화엄경’에 이르기까지 1년 동안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대부분의 경전을 다 배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환희심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경전을 보면 그 안에 담겨있는 부처님 말씀이 내 안으로 쏙쏙 들어오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나만 알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배워서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출가를 결심했다. 집안 반대는 걷잡을 수 없었다. 형제들조차 “인연 끊겠다”며 배수의 진을 치고 말렸다. 그렇게 밀고 당기기를 5년여, 결국 스님은 서른을 넘긴 나이가 돼서야 출가에 성공(?)했다. ‘법성’이라는 법명을 받고 서울 보현정사에서 행자가 되었다. 경전을 배우겠다는 원력은 더욱 확고해졌다. 하지만 “아는 것이 너무 많아 탈”인 행자생활은 경전과 거리가 멀었다. 사미니계를 받고 중앙승가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출가 전 이미 다 보았던 경전을 다시 배우니 흥미로울 리 없었다. 원전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자 인도 유학을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인도는 가난하고, 덥고, 먼 나라였다. 주변 사람들 모두 인도행을 말리고 나섰다. 차선으로 택한 길이 대만이었다. 어학연수과정을 시작으로 학부와 석·박사 과정을 10년 만에 모두 끝마치고 97년 ‘상산과 종밀 존유근원(存有根源)사상의 비교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사천리였다. 하지만 10여년 이상 타국에 머물며 “한국 음식이 그립고 너무 더워서” 힘들었던 스님은 곧바로 귀국했다. 포교원 포교연구실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며 1999년 ‘불자가 꼭 읽어야할 기본 경전’을 처음으로 출간했다.

▲어떤 책이며 출간하게 된 이유는.
“중국불교사연구에 한 획을 그은 불교학자 오우양징우(1871~1944) 선생이 선별해 놓은 ‘재가불자의 기본 경전’ 목록을 참고해 편찬한 책이다. 남녀 불자들이 꼭 읽어할 경전을 각각 정리했다. 부처님은 재가불자가 갖춰야 할 생활관, 가치관, 인생관을 우바새와 우바이의 경전들 가운데서 설하셨다. 이들의 수행은 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가불자들이 ‘금강경’이나 ‘반야경’ ‘화엄경’ 등 어려운 경전만 독경하고 배우려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후 스님은 본격적으로 집필활동에 전념해 ‘마음을 관해야 진정한 깨달음에 들 수 있다’ ‘사망학’ ‘선비요법경’ ‘선 수행자가 꼭 읽어야 할 대승선경’ ‘대승기신론’ ‘다음 생을 바꾸는 49일간의 기도’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를 편찬했다.


▲ 대만 유학 당시 불광산사 성운 스님(가운데)을 친견한 법성 스님(오른쪽).

▲주로 어떤 경전을 선택해 번역하는가.
“일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연 닿는 대로지만, 누구라도 읽고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다.”

다수의 역서와 저서 중 2004년 편찬한 ‘사망학’은 경전류가 아니어서 눈길을 끈다. 삶과 죽음에 관한 동서양 철학을 총망라한 책이다. 고대 철학자들의 생사관부터 각 종교의 관점 등을 두루 정리했다. 학부과정 때 인류학을 배우며 정리했던 노트를 초고 삼아 한 달여 만에 집필을 마무리했다. 무엇이든 한 번 잡으면 질질 끌지 않고 집중해서 마무리하는 성격이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사망학’ 출간 후 시작한 ‘대지도론’ 역경편찬에 무려 10년이 걸렸다.

▲번역이 어려웠나.
“번역 자체가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물론 고간본은 띄어쓰기를 표시한 방점이 없어서 번역이 어렵지만 1년여 만에 번역을 끝냈다. 그런데 고간본과 신수본의 차이가 컸다. 그래서 다시 고간본과 신수본을 합한 대만의 판본과 신수본까지 전부 번역해서 비교했다. 총 4년이 걸렸다. 번역 원고만 4000페이지가 넘었다. 나도 교정을 봤지만 출판사에서도 여러 차례 교정을 보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대지도론’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기본 교리, 어휘, 용어, 개념들이 다 들어가 있는 책이다. 그 근간을 반야, 공, 중도, 인연법에 두고 그로부터 불교의 모든 사상을 총망라해 설명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한 반야경에 대한 주석서가 아니다. 특히 교학자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서다.”

▲‘대지도론’ 역경을 마친 소감은.
“10년간 모든 것을 중단하고 매달렸다. 사실 바깥출입도 거의 못했고 사람을 만날 시간도 없었다.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집중해서 끝을 보는 성격이라 강의나 법문을 하러 다닌다거나 다른 일에 신경을 썼다면 아마도 이 책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세상도 많이 바뀌었고, 현재로서는 별다른 계획도 없다. 다만 ‘대지도론’ 출간 후 당분간은 역경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스님은 그러나 최근 다라니수행법을 안내하는 ‘수구즉득다라니’를 출간했다. 신수대장경에 수록돼 있는 불공금강 스님의 한역본을 번역한 것이다. ‘삼국유사’를 읽던 중 이 다라니에 관한 언급을 보고 ‘나중에라도 꼭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벌써 수 해 전이었다. 그런데 ‘대지도론’ 출간 후 잠시 대만에 갔다가 우연히 이 경전을 만났다. “이렇게 좋은 것을 나만 볼 수 없어” 또 다시 번역했다.

▲ 박사학위를 받던 날 여건구(왼쪽) 지도교수와 함께 한 법성 스님.


▲역경과는 뗄 수 없는 인연인 것 같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부처님 말씀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환희심이 출가의 인연이 되었고 경전 공부해서 널리 전하겠다는 것이 출가의 원력이었다. 그러니 좋은 경전을 만나면 그것을 번역하고 전하는 것이야말로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니겠나.”

▲역경을 하며 아쉬웠던 점은.
“티베트어를 배우지 못한 점이다. 포교연구실 사무국장 소임에서 물러난 후 한 동안 네팔서 티베트어 기초를 배웠다. 하지만 추운지역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건강이 나빠져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티베트어 공부를 마무리했다면 티베트대장경을 번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기 대승불교의 정수들이 담겨있는 티베트대장경 역경은 불교발전을 위해 반드시 풀어야할 과제다.”

▲외부 활동 계획은.
“현재로서는 없다. 10년간 외부 활동 없이 역경에만 몰두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할 지 좀 막막하기도 하다. 나뿐만 아니라 해외서 유학한 많은 스님들이 국내 불교학계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교학이 아닌 다른 분야서 새롭게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오랜 시간과 삼보정재를 들여 힘들게 공부하고 온 스님들이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에 교학자스님들의 활동 기반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스님의 일상은 단순하고 소박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바깥출입을 즐기지 않는 것은 예나 다를 바 없다. 매일의 기도와 수행, 그리고 남는 시간 대부분은 독서와 집필로 보낸다. 요즘엔 경전 못지않게 옛 사람들의 수행, 가피 등을 담은 책에도 자주 손이 간다. 10년간의 역경불사를 회향했으니 이 정도 휴식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보내던 어느 날, 또 한 권의 경전을 만난다면 스님은 어떻게 할까. 아마도 이 글이 답일 터이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의 기본자세인 다문(多聞)과 사유(思惟)를 늘 강조하셨다. 한자로 다문은 많이 듣는다는 뜻이나 경전에서 말하는 의미는 단순히 많이 듣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문이란 넓게 아는 지혜·널리 배움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경전에 깊이 통달하여 지혜를 얻음을 뜻한다. ‘화엄경’에 ‘지혜가 바다와 같고자 한다면 깊이 경장에 들어가라’는 구절이 있다. 그만큼 경전을 가까이 하고 깊이 이해하여 수행할 것을 일러준 것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돌직구’ 성품…대중과의 소통 기회 넓히길

내가 본 법성 스님

수계도반 현우 스님=1997년 법성 스님과 함께 비구니계를 받은 후 20여년간 스님과 교류하며 지냈지만 직접 만나 얼굴 보는 것은 1년에 한두 번이다. 그것도 포살법회 때 사찰에서 만나는 것이 대부분이지 따로 밖에서 만나는 일은 정말 드물다. 전화 통화를 하는 횟수도 1년 중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도 ‘대지도론’ 번역하는 동안은 통화도 거의 하지 못했다. 어쩌다 통화를 해도 항상 책을 붙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일념으로 정진했기 때문에 대작역경불사가 가능하지 않았겠나. 어쩌다 만나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겨도 그동안 수행해온 것에 관한 것 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나 사람들 이야기에도 도통 관심이 없으니 역경불사를 위해서는 보배 같은 존재이지만 법성 스님 개인을 봐서는 걱정스럽기도 하다. 할 말이 있으면 그야말로 ‘돌직구’를 날리는 성품이라 돌려 말하는 법도 없지만 그런 성품이 아니라면 어떻게 역경이라는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스님들이 안정적으로 역경불사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이 종단차원에서 마련된다면 한국불교 발전을 위한 큰 주춧돌이 될 것이다.

김시열 도서출판 운주사 대표=법성 스님의 첫 책인 ‘불자가 꼭 읽어야할 기본 경전’을 출간한 인연으로 20여년간 스님의 책을 펴내고 있다. 손익계산을 따지거나 명성을 얻겠다는 식의 욕심이 있었다면 아마 책 홍보나 판촉에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런 성격이 아니다. 출가자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구분이 매우 엄격하다. 스스로에게도 그렇지만 남들에게도 그러니 때때로 사람들과의 어울림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책을 내고 홍보에도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면 좋겠지만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또 그런 엄격함이 있었기에 역경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성격은 책에서도 보인다.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책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스님이 직접 수행해본, 정말 불자나 스님들이 꼭 읽어야 된다는 확신이 생긴 경전이나 불서들을 주로 번역하신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고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앞으로는 대중강연이나 법문 등을 통해 대중들과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해나가셨으면 좋겠다.

[1375호 / 2017년 1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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