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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정부 석림사 회주 보각 스님

폐허 속 도량에 바친 60년, 인재불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보각 스님 별명은 ‘수락산 호랑이’다. 길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오던 산속에 살면서도 무서운 줄 모르고 험난한 불사 이끌어 왔으니 그 별명 붙을 법도 하다. 하지만 스님은 “살구 따러 동네 사내들이 장대를 들고 몰려오면 나무 다 부러뜨릴까 싶어 야단을 쳐 보냈는데 그래서 붙은 별명”이라며 웃어 넘긴다. ‘호랑이’라 하기에는 그 웃음 너무 소박하다.

1958년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수락산 계곡으로 오르는 길은 변변치 않았다.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한참 걷고, 징검다리를 건너 또 한참 올라야 했다.
“도대체 이번엔 어떤 절을 맡으셨다는 건지….”
은사 부름을 받고 한달음에 동학사에서 올라온 휴봉보각(休峯寶覺) 스님은 걸음을 재촉했다. 은사 상인 스님은 의정부 석림사에서 상좌를 기다리고 계셨다.

석림사는 1671년 서계 박세당의 시주로 석현 화상과 치흠 화상이 창건한 석림암이 그 시초다. 박세당은 조선 중기의 대유학자였다. 당쟁에 휘말려 풍파를 겪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지금의 석림사 입구에 초막을 짓고 칩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 인생만큼 석림암 역사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1698년 대홍수로 사찰이 유실된 후 가까스로 복원됐으나 1745년 또 다시 홍수로 참화를 입었다. 근근이 명맥을 이었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격은 결국 참담하게 쇄락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지 불과 5년 뒤, 상인 스님과 상좌 보각 스님이 이곳을 찾았다.

‘팔상록’ 읽고 16살에 발심 출가
은사스님 주지로 석림사 인연
반쯤 기울어 비 새는 인법당에
살길도 막막한데 간첩까지 출몰

 

미군 원조로 시작한 중창 불사
각종 규제 걸려 툭하면 ‘철거’

메주 만들어 팔아 불사하면서도
어린아이·노인 20여명 한솥밥
“도량 세우는 목적은 인재 양성
나는 일 않고 남 시킬수 있나”

▲처음 와 본 석림사의 모습은.
“주저앉게 생긴 세 칸짜리 집이 반은 옆으로 누워있었다. 마루는 딛는 곳마다 발이 쑥쑥 빠졌다. 구들장도 다 깨져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 틈새로 그을음이 올라왔다. 가운데 칸에 법당을 꾸미고 한 자 크기 부처님을 모셔놓았는데 그곳에도 얼마나 연기가 스며들었는지 부처님이 새까맣게 그을려 계셨다. 부뚜막에 걸려있는 솥단지 두 개는 다 뚫어졌고 쓸만한 살림살이라고는 숟가락 하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 주지를 맡으셨는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1954년 출가한 보각 스님은 곧바로 은사를 따라 부산 청련암으로 갔었다. 범어사 큰절 옆이니 동산 스님 가르침 받을 생각에 잔뜩 기대하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전쟁 통에 청련암도 꼴이 말이 아니었다. 수년을 매달려 얼추 사격을 갖추자 은사는 서둘러 상좌를 강원으로 보냈다. 처음엔 선암사, 이후 동학사 강원으로 자리를 옮겨 공부했다. 보각 스님이 석림사에 첫 발을 들인 것은 아직 대교과정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부산 청련암서 고생하던 은사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곳에 비하면 청련암은 대궐인 셈이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할지, 아니 이런 곳에서 당장 무엇을 먹고 살겠다는 것인지. 은사스님 걱정에 강원으로 돌아갈 생각은 저만치 달아났다.

▲은사스님은 왜 서둘러 강원으로 보내셨나.
“내가 첫 상좌였다. 그야말로 쥐면 깨질까, 불면 날아갈까, 보기에도 아깝다할 정도로 끔찍이 상좌를 아끼셨다. 그런 상좌가 ‘얼굴이 허연 것이 잘 생겼으니’ 혹시라도 중노릇 못할까 걱정이 태산이셨던 것 같다. 비구니스님들 공부하기엔 강원만한 곳이 없다며 나를 보내 놓으시고도 사흘이 멀다고 편지를 보내셨다. 소소한 일상도 적었지만 내 걱정, 당부가 태반이었다. 은사에게 그렇게 아낌 받는 학인은 강원에서도 드물었다.”

당시 비구니강원이 있는 곳은 선암사뿐이었다. 만허 스님이 강사, 명성 스님이 중강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처승들이 절을 장악했다. 하루아침에 선암사에서 밀려난 학인들 대부분은 동학사강원으로 옮겨갔다. 동학사강원도 문을 연지 얼마 안 되었을 때지만 그곳에는 경봉 스님이 조실로 계셨다. 경봉 스님은 사교·대교반 학인을, 나머지는 묘엄 스님이 중강을 맡아 가르치셨다.

대중은 30여명이나 되었다. 학인들이 각자 쌀 한가마니씩 탁발을 해 와야 먹고 살 수 있었다. 학인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인연처를 찾아 가는데 보각 스님은 경주 스님과 짝을 이뤄 부산으로 향했다. 찾아는 왔지만 당장 하룻밤 잘 곳이 없었다. 동래온천 옆에 금천암이라는 비구니사찰이 있다해 찾아갔다. 노스님 두 분만 계신 절이라 객승을 받기가 여의치 않았다. 부산까지 오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을 거듭한 끝에 딱 하룻밤만 신세질 것을 허락받았다. 노숙을 피할 수 있게 됐으니 어찌나 고마운지,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도량석과 예불을 올리고 보각 스님은 청소를, 경주 스님은 노스님들 아침공양을 차렸다. 그 모습이 노스님들 눈에 딱 들었다.
“오가는 객스님들한테 수없이 밥을 해먹였지만 자네들처럼 부지런한 이는 본적이 없네. 탁발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게.”
천성이 부지런한 보각 스님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일을 지나치지 못했고, 시작하면 끝을 봐야했다. 그러니 강원에서 뿐 아니라 어딜 가나 어른들의 예쁨을 받았다. 그렇게 부지런한 천성이 석림사와 인연을 맺었다.
은사스님은 “새 절 짓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오래된 절을 다시 세우는 것도 부처님 은혜 갚는 길이니 우리가 한번 살아보자”고 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사방에 쌓여있는 쥐똥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때가 덕지덕지 앉은 마루를 몇날 며칠 닦았지만 도무지 태가 나지 않았다. 그나마 마루 닦을 짚단도 마을에 내려가 얻어야 했다. 그뿐인가. 시내에 나갈 때면 미군부대서 나온 통조림 깡통까지 몽땅 얻어 들고 왔다. 그런데도 비만 오면 천장에서 줄줄 떨어지는 빗물 받을 깡통이 부족했다. 급한 대로 함석판을 사다 지붕을 덮었다. 턱도 없었다. 집을 허물고 다시 지어야 했지만 당장 들어가 이슬 피할 곳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얼추 3년을 버텼다.

사흘이 멀다고 탁발하는 처지에 불사 벌일 길이 막막했다. 은사스님은 “간첩이라도 하나 잡으면 포상금 받아 절을 지을 텐데, 간첩도 하나 안 오나”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간첩’이 나타났다. 6월 장마에 비가 억수로 쏟아 붓던 밤이었다. 군복 차림에 소위계급장을 단 이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문을 두드렸다. 말도 없이 연필을 달라더니 ‘산에서 내려왔는데 옷 좀 말리고 갈 테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써서 내밀었다. 그 종이쪽을 받아드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작은 골방에 들어가 옷부터 말리라고 안심시켜 놓고 그길로 산을 달려 내려갔다. 절에는 은사스님과 겨우 13살 먹은 사제, 그리고 허리가 꼬부라진 일꾼 할아버지뿐이었다. 시간을 끌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냇물이 불어 옷이 허리춤까지 떠오르는지도 몰랐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 가장 가까운 군부대로 가 쪽지를 내밀었다. 그 남자는 정말 간첩이었다. 군인들이 들이닥치자 순순히 손을 들고 나왔다.

은사스님 소원대로 간첩을 잡았지만 곧이어 함구령이 떨어졌다. 막상 진짜 간첩을 잡고 보니 겁이 덜컥 나신 게다. “여기서 간첩 잡았다고 소문이 나면 우리는 죽은 목숨일 테니 간첩은 부대에서 잡은 것으로 하고 우리는 입 밖에도 내지 말자”고 신신당부를 했다. 결국 공은 군부대로 돌아갔지만 그 덕에 불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은사스님 원력이 절반은 이뤄진 셈이었다.

▲불사는 어떻게 시작했나.
“비가 줄줄 새던 지붕이 결국은 일을 벌였다. 간첩을 잡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하필 그날 절에 왔다 하룻밤 자게 된 신도 한 명이 무너진 지붕에 깔려 다리가 부러졌다. 죽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다가는 전부 죽겠다 싶었다. 며칠 후 은사스님이 탁발하러 출타한 틈을 타 부서진 지붕기와며 썩어빠진 서까래를 몽땅 끌어 내렸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지붕에 손을 대니 집이 제풀에 무너져 내렸다. 사람이라고는 사제와 노인뿐이니 지붕에 올라가 힘쓰는 일은 내 몫이었다. 그때만 해도 기운이 장사였다. 썩은 지붕과 벽채를 다 헐어내고 나니 이제야 일이 좀 될 것 같았다.”
▲은사스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일을 벌였나.
“은사스님이 와서 보시고는 큰일 났다며 걱정을 하셨다. 한참을 걱정하시다 커다란 군용천막을 사오셨다. 그 천막을 쳐서 임시로 살 움막을 만들어 놓고 불사를 시작했다.”

간첩 잡은 공을 톡톡히 본 부대장이 팔을 걷어붙이고 불사를 도왔다. 군인들 50여명이 찾아와 부서진 집을 치우고 터를 새로 닦았다. 계곡 높이와 비슷해 큰 비만 오면 수해를 입던 법당 터가 계곡 위로 훌쩍 높아진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그렇게 군인들이 터를 닦는 동안 보각 스님은 허물어진 법당 자재 속에서 쓸만한 목재며 기왓장을 골라냈다. 그 목재를 다시 이어 붙여 법당 뼈대를 세웠다. 요즘에는 문화재의 역사성을 계승하기 위해 일부러 옛 자재를 활용해 복원한다지만 당시로서는 불사비용을 한 푼이라도 줄여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터를 닦고 기둥을 세웠지만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이 잇따라 터졌다. 시국이 어수선하니 그나마 불사 동참을 약속했던 신도들도 줄줄이 손을 들었다. 시절인연이 야속했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은사스님은 무턱대고 미군부대를 찾아갔다. 그곳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막연한 소문이 전부였다. 생면부지, 미군을 만나겠다고 나섰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미군 장교를 찾아간 일은 어떻게 됐나.
“몇날 며칠을 미군부대 앞에서 얼쩡거리다 구멍가게 주인 소개로 군부대 통역관을 만났고, 그 통역관 소개로 진짜 미군장교를 만났다. 와이트대장이라는 분이었는데 우리 절에 와서 사정을 듣고 나서는 합판이며 목재, 못까지 불사에 필요한 각종 자재들을 보내주었다. 그분에게 우리가 해드린 것이라고는 처음 절에 오던 날 감자를 삶아 말린 부각을 대접한 게 고작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인연이었다.”

미군 구호물자로 법당불사가 시작됐다. 군부대에서 실어온 합판이며 목재를 석림사 입구 계곡 가에 쌓아놓으면 지고 나르는 일은 보각 스님 몫이었다. 차가 들어오질 못하니 수십, 수백 번 목재를 지고 오르내려야 했다. 매일 밤 발가락이 터지고 몸살이 났지만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또 거뜬했다. 감사한 마음에 힘든지 몰랐고 시은이 무거우니 게으를 수 없었다.
합판으로 법당 마루를 깔고 목재로 문짝을 짜서 달았다. 이제 남은 것은 기와였다. ‘망월사 신도 중에 서울대병원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또 무작정 찾아갔다. 김동익 박사 내외였다. 사정을 듣더니 손가락에 끼고 있던 쌍가락지를 팔아주었다. 그 돈으로 헌 기와를 사 모아 지붕을 얹었다.

꼬박 3년, 석림사와 인연 맺은 지 6년 여 만에 38평 인법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호물자로 만든 문짝은 틈이 맞지 않아 덜커덩거리고 전국에서 쓸어 모아 얹은 중고 기와는 이가 맞지 않아 삐뚤빼뚤했지만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해보면 꿈같은 일이었다.
은사스님 세납이 적지 않았지만 이만하면 지내시기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선방으로 가야겠다’ 결심했다. ‘팔상록’을 보며 환희심이 일어 출가한 것이 16살이었다. 초발심 가득했던 그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 아무리 고되게 일을 하면서도 ‘이러려고 출가했다’ 싶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보니 미뤄뒀던 공부 생각이 간절해졌다. 은사스님도 그간의 고생을 위로하며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19살에 동산 스님으로부터 받은 화두를 이제라도 참구하리라 마음먹었다. 해인사 약수암, 범어사 대성암에서 정진했다. 성철 스님, 자운 스님의 가르침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만성 스님, 법희 스님과 같은 비구니대선사의 가르침은 평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연로한 은사스님 부름에 또다시 석림사로 돌아왔다. 얼기설기 이어 만든 법당이 또 다시 삐거덕 거리고 있었다. 보각 스님이 선방에 가있는 3년여 동안 어린 상좌 하나 데리고 살던 은사스님이 이리저리 보수를 했지만 더 이상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1972년, 보각 스님은 다시 석림사로 돌아왔다. 처음 왔던 그때처럼 석림사 지붕에서는 또 비가 새고 있었다.

▲ 수락산 석림사 전경. 큰법당 옆으로 요사채와 종각이 자리를 잡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은사스님 병세가 심상치 않았다. 차가 들어오지 못해 리어카에 스님을 모시고 계곡을 오르내리며 병원을 다녔지만 차도가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이 시급할 것 같아 상계동에서부터 전화를 끌어왔다. 그리고 서둘러 길을 만들었다. 개발제한구역이니, 군사작전지역이니, 무슨 무슨지역이니 하면서 발목을 잡는 규제조항들을 한 손에 꼽기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길을 막고 있는 돌을 깨어 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길을 뚫어 놓고 계곡에 차 한대 건널 수 있을 만한 다리를 놓았다. 은사스님이 입적하시면 운구차가 들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차가 못 들어오면 관을 메고 계곡 길을 걸어 내려와야 할 판이었다. 다리에 부어놓은 시멘트가 다 굳기도 전에 은사스님이 입적하셨다. 다리를 떠받치고 있던 버팀목을 철거하기도 전에 그 다리로 운구차가 들어왔다.

은사스님이 떠나고 이제 석림사 불사는 오롯이 보각 스님의 몫이 되었다. 1973년 석림사 주지에 취임하고 본격적인 도량 불사 준비에 들어갔다. 1975년 전기가 들어왔고 차가 들어올 수 있게 도로도 포장했다. 1979년에는 요사채로 쓸 적묵당이 완공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허가였다. 허가도 없이 불사를 시작했으니 시도 때도 없이 단속반이며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주지는 숨고 어린스님들이 나가 하소연 하고. 그런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됐지만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허가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가을이면 콩을 수십 가마씩 사서 메주를 만들어 팔며 불사금을 한 푼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일주문과 범종각도 새로 세웠다. 그래도 대웅전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허가가 나왔나.
“1996년이었다. 10년 넘게 끌어온 일이었다. 나는 오직 부처님 가피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었고 백방으로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기도 가피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매달릴 곳이라고는 부처님밖에 없었다.”

구호물자로 받은 목재에 재활용 기와를 얹어 세웠던 인법당을 해체하고 1, 2층 큰법당을 새로 지었다. 1998년 완공됐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문수,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그야말로 환골탈태였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석림사에서는 더욱 놀라운 불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석림사서 아이들을 많이 키웠다.
“형편이 어렵다며 절에 맡기는 아이들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은사스님 계실 때부터 아이들을 한둘씩 맡아 키웠는데 내가 주지가 된 후에는 이런 저런 인연으로 절에 들어오는 아이들이 자꾸 늘어났다. 갈 곳 없는 노인들도 한두 분씩 모시다 보니 어느새 사중에 식구가 20여명이나 되었다. 이곳에서 지내다 돌아가셔서 내 손으로 장례를 치른 어르신이 여섯 명이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키운 아이가 일곱 명이었다. 그중에는 지금 시집가서 잘 살고 있는 아이들도 있고 출가해 스님이 된 아이들도 둘이나 있다.”

돌아보면 어떻게 살았을까 싶은 세월이다. 치매를 앓아 사람을 못 알아보는 어르신도 있었고 주민등록을 하지 않아 장례를 치르기가 막막했던 분도 있었다. 산골짜기에서 뛰어놀고 들어온 아이들 옷은 늘 흙투성이였고 아침이면 학교에 들고 갈 도시락을 10여개씩 싸야했다. 한겨울에도 냇물서 빨래를 하고 밤이 기울도록 뚫어진 양말을 꿰맸다. 그래도 그 아이들 웃음소리가, 허리 굽은 어르신들의 오가는 발자국 소리가 좋았다.
인재불사는 도량 밖에서도 계속됐다. 1980년대 초반 보각 스님을 비롯해 의정부 지역 비구니스님들의 모임인 의정부 비구니자비회가 꾸려졌다. 얼마 후 한 불자가 의정부 시내에 있던 건물을 희사해 그곳에 불교 유치원을 만들게 되었다. 스님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았지만 그래도 부족한 것은 의정부 시장에서 탁발을 해 보탰다. 의정부 지역 비구니 모임서 최초로 만든 ‘자비유치원’이었다. 1993년에는 석림사 부설 봉연유치원을 개원해 어린이 포교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또 여력이 닿는 대로 군포교와 장학사업에도 힘을 보탰다. 석림사 불사는 도량 밖에서도 더욱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불사가 힘들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힘 안 드는 일이 어디 있겠나. 그래도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싶은 생각을 해본적은 없다. 불사가 많으면 많은 대로 하고, 아이가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키우고, 유치원 만들어야 하면 만들었다. 내가 싫다고 안 하면 불사는 누가 하고 아이는 누가 키우겠나.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하는 것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 그래도 돌 깨서 밭 만들고 똥지게 지어 나르며 농사 지은 이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일을 많이 하기는 한 것 같다.”
▲석림사가 어떤 도량이 되길 바라는지.
“도량을 만드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사람을 하나 바르게 키운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도량을 세우는 것도 사람을 키우기 위함이다. 좋은 수행자를 키우고 좋은 불자들을 만드는 도량이 되어야만 진짜 불사다.”

1958년 처음 석림사에 왔으니 내년이면 꼭 60년이다. 길도 없고 전기도 없던 산중에 들어와 살면서도 무서운 줄 몰랐다. 기운도 장사여서 어지간한 돌덩이는 번쩍 들어 옮겼다. ‘수락산 호랑이’라 불리던 그 세월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보각 스님은 2013년 석림사 회주로 추대됐다. 이제는 상좌 능인 스님이 주지소임을 맡아 절을 이끌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전국비구니회 원로의원에 추대됐다. 하지만 스님은 오늘도 검정고무신을 신고 바삐 걸음을 옮긴다.
“에휴, 스님 이제 힘든 일은 그만 하세요.”
“나는 안 하면서 남을 시킬 수 있나”
‘수락산 호랑이’ 푸른빛은 여전히 성성하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떠올리면 가슴 먹먹 … 때로는 친정엄마 같아
내가 본 보각 스님

석림사 주지 능인 스님=은사스님을 보면 수행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고 계행이 철저하지만 후학 양성과 포교에는 한없이 헌신적이셨다. 특히 어렵게 석림사 불사를 하던 시절에도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키우고 노인들을 모시며 살던 은사스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오랜 세월 석림사를 지켜본 이들은 한결 같이 도량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겠지만 수행자를 키우고, 인재를 양성하고, 이웃을 돌보았던 인재불사야말로 은사스님이 이룩한 가장 큰 공덕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은사스님의 원력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내게는 은사스님의 모습 그대로가 가르침이고 수행자의 표상이다.

김덕이 석림사 신도회장=처음 석림사와 인연 맺은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주지였던 보각 스님은 비구니스님이지만 비구스님 못지않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인물이 훤한 것도 그랬지만 무슨 일이든 척척 밀어붙이는 것이 ‘세간에 살았으며 큰 사업가가 되셨을 것’이라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큰법당 불사를 준비하면서 메주를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콩을 수십 가마 사오면 스님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콩을 삶았다. 도량 주변에 텃밭을 만들어 밭농사도 지었는데 그렇게 수확한 상추며 고추를 신도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스님의 즐거움이었다. 그럴 때면 힘든 것도 다 잊으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아프다, 힘들다 내색도 안 하셨지만 살이 쑥 빠져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제발 이제는 힘든 일 좀 그만하셨으면 좋겠다.

진성선 수자타합창단장=석림사 봉연유치원에 첫 아이를 보낸 것이 인연이 됐다. 올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내 가족처럼 대해주시는 따뜻함이 석림사를 더욱 푸근하게 만들어 주었다. 신도들이 오면 무엇이든 챙겨주고 싶어 애를 쓰셨지만 당신의 삶은 검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한번은 꽃꽂이를 하신다기에 도와드리려고 꽃다발 묶은 노끈을 가위로 툭 잘랐는데 나중에 스님이 그걸 보시고는 ‘빨랫줄로 쓰면 될 텐데’ 하며 노끈 조각을 하나하나 엮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근검절약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을 워낙 예뻐하셔서 요즘도 아이들이 절에 오면 엉거주춤 춤도 추면서 같이 놀아주신다. 불자가 줄어들어 걱정이라며 가족들과 함께 신행활동을 하라고 당부하시는 모습에서 포교에 대한 스님의 원력을 읽을 수 있다.

 

 [1380호 / 2017년 2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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