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는『대승기신론』에 열중하여 그에 대한 『기신론 소』2권, 『기신론 별기』1권, 『기신론 이장장』(이장의) 1권, 『대승기신론 종요』1권, 『대승기신론 요간』1권, 『대승기신론 대기』1권, 『대승기신론 사기』1권 등 7종의 연구서를 내었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이론의 실천을 통해 당시 신라사회에서의 문제 상황을 해결하려 했다. 그는 과연 『기신론』의 어떤 점에 주목하여 그의 대중 불교화 운동의 이론서로서 『대승기신론』을 선택하였을까. 당시 신라사회의 불교계는 왕실이나 귀족 중심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출·재가 모두에 불성 있음 알아야 승려들은 성내(城內)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면서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는 거의 무관심하였다. 승려들은 자기네들만이 ‘진여’의 세계에 안주하면서 스스로를 ‘세속’에 머물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무려 7종의 연구저서를 낼 정도로 이 논서에 심취했던 원효는 『기신론』의 성격을 다음의 세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첫째, 『기신론』은 인간의 마음이 원래 청정한 것임을 강조하는 중관학파와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현실적으로는 깨닫지 못하여 물든 상태에 있으며 이를 분석, 관찰하는 데 주력하는 유가학파, 이 두 학파의 주장을 지양·종합한 논서임을 주장한다. 원효, “기신론은 삼세·아라야식설” 실제로 『기신론』은 일심, 즉 중생심에는 마음의 자성청정을 밝히는 심진여문과 현실의 물든 마음을 긍정하고 이를 분석하여 종국에는 청정심을 얻을 수 있다는 심생멸문의 두 가지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일심이문의 구조는 『기신론』 전체의 대전제로 설정되어 있으며, 『기신론』이 중관·유가학파의 지양
지난번에 이어 관을 닦는 네 가지 방법 가운데 두 번째인 대비관(大悲觀)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② 대비관 : 일체의 중생이 무시의 때로부터 모두 무명의 훈습을 받는다. 이 훈습에 의해 마음이 생멸케 되어 이미 모든 심신의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한계가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건만 이를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처럼 매우 가련한 것임을 늘 생각해야 한다. ③ 서원관(誓願觀) :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大) 서원을 세워야 한다. 즉 원컨대 내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함으로써 시방에 두루하여 일체의 모든 선한 공덕을 수행케 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의 고뇌하는 중생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열반·제일의
지난 번 마음을 고르게 하는 것의 아홉 가지 심주 중 ⑤조순까지 밝혔다. 이어 ⑥적정(寂淨) : 갖가지 욕구하는 마음, 진에의 마음, 남을 해치는 마음 등 여러 나쁜 심사(尋思)와 탐욕개(貪慾蓋: 자기 뜻에 맞는 것을 탐내어 구하는 정신작용에 의해 우리의 심식을 덮어서 선법을 발생하지 못하게 함) 등의 수번뇌(隨煩惱)가 있어 마음을 요동케 하는데, 앞의 조순에 의해 그 허물을 더욱 깨달아 저러한 여러 가지 심사와 수번뇌들을 근심거리의 생각으로 여겨서 이러한 생각의 증상력에 의해 저러한 것들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다. ⑦최극적정(最極寂淨) : 위의 적정의 마음을 놓침으로 해서 여러 나쁜 심사와 여러 수번뇌들이 잠시 현행할 때에 곳에 따라 일어나지만 차마 받지 아니하고 이윽고 토해 내는 것이다. 이 중에
지난 번 지관문을 밝히면서, 지(止)를 닦을 때에는 첫째 고요한 곳에 머물러야 함을 말했다. 오늘은 이어서 두 번째의 이야기를 가지고 시작하기로 한다. 지(止)를 닦을 때에는 둘째, 단정히 앉아서 뜻을 바르게 해야 한다. 단정히 앉는 것은 몸을 고르게 하는 것이오, 뜻을 바르게 하는 것은 마음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먼저 몸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는 ① 앉는 곳을 편안케 하는 것이니 오래도록 방해가 없게 한다. ② 다리를 바르게 해야 한다. 만약 반가좌(半跏坐)할 경우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두어서 몸 가까이 끌어당겨 왼쪽 다리의 발가락이 오른쪽 넓적다리와 가지런하게 하며, 만약 전(全)가좌를 하려면 곧 위의 오른쪽 다리를 고쳐서 반드시 왼쪽 넓적다리 위에 두고 다음엔 왼쪽 다리를 오른쪽 넓
지난 번 분별발취도상에서 신성취발심으로부터 해행발심, 증발심 등은 부정취인 중에서도 수승한 이들이 차례로 닦아나가는 모습이었다. 이제 수행심신분에서는 부정취인 중 열등한 이를 위하여 네 가지 신심(信心)과 오문(五門)의 행을 닦을 것을 권장한다. 만약 이 열등한 이가 믿음을 닦아 네 가지 신심을 성취하면 다시 발취분중의 세 가지 발심에 의해 나아가게 됨은 물론이다. 먼저 네 가지 신심이란 첫째, 근본 즉 진여법을 믿는 것이다. 진여법이야말로 모든 부처의 귀의할 바이며 모든 행동의 근원이다. 둘째, 부처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믿어 항상 부처를 가까이 하고 공양, 공경하여 선근을 일으켜 일체지를 구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어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정의를 밝혀 드러내고(顯示正義), 삿된 집착을 다스리는(對治邪執) 부분을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모든 부처님들이 증득한 도를 향해 모든 보살이 발심해서 수행해 나아가는 뜻을 밝혀보겠다. 도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양을 분별하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서 도에 발심하는 모습에 또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은 십신의 자리 중에서 신심을 닦아 익혀서 신심이 성취되어 결정심을 일으켜 십주(十住)에 들어가는 것이다. 둘째 해행발심(解行發心)은 십행(十行)의 자리 중에서 법공을 잘 알고 법계를 수순하여 육도행을 닦아서, 이 육도행이 순결해지고 성숙되어 회향심(廻向心)을 일으켜 십회향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셋째 증발심(證發心)은 초지 이상으로부터 십지까지의 자리에서 법신을 증득하
지금까지 해석분 가운데 바른 뜻을 밝히는 부분(顯示正義)에서 먼저 뜻을 풀이하였다. 이제는 생멸문으로부터 바로 진여문에 들어가는 부분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우리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오음(五陰)은 크게 색과 심으로 나뉜다. 색음을 추구한다면 모든 색을 부러뜨려서 극미에까지 이른다 해도 그 실체를 영구히 얻을 수가 없다. 육진경계라는 것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서는 생각할 만한 모양이 없는 것이다. 또한 수·상·행·식음의 심(心)도 형상이 없어서 시방(十方)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다. 중생은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동념(動念: 즉 망념)을 추구해 본다면 이미 없어졌거나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오, 중간에 머무는 바가
지금까지 생멸문에서의 심생멸, 생멸인연, 생멸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 생멸의 현상들은 근본적으로 훈습의 작용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훈습이란 옷에 원래 향기가 없지만 향으로 훈습하면 향이 옷에 배어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몸과 입으로 표현하는 선악의 말이나 행동, 또는 뜻에 일어나는 선악의 생각들이 일어나는 그대로 없어지지 않고 반드시 어떠한 인상이나 세력을 자기의 심체에 머물러두는 작용이다. 『기신론』에서는 훈습에 정법(淨法)으로서의 진여, 일체 염인(染因)으로서의 무명, 업식인 망심(妄心), 육진인 망경계의 네 가지 법을 들고 있다. 진여정법(본각)에는 본디 염이 없으나 무명의 훈습 때문에 염상이 있고 무명염법(불각)에는 본래 정업이 없으나 진여로 훈습하기 때문에 정용(淨用)이 있다.
앞서 설명한 6염심에 덧붙여 번뇌애와 지애에 대해 간략히 밝혀 보겠다. 원효는 그의 『기신론·소』에서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그의 저서 이장장(二障章=二障義)에 미루고 있는데, 우선 명료한 인식을 위해 도표에 의지하면서 설명하겠다. 번뇌애와 지애는 은밀문에서의 구분이고 번뇌장과 소지장은 현료문에서의 구분인데 『기신론』은 은밀문의 입장이기 때문에 번뇌애와 지애를 말했다. 번뇌애란 앞서 밝힌 여섯 가지 염심 즉 지말무명이며 이는 근본무명에 의해 움직인 염심(무명업상)이 전식, 현식, 지식으로 변전해 나가 근본지의 능·소평등을 어기므로 진여의 근본지를 막는다고 한다. 지애란 근본무명을 말하며 본래의 법성자리는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상이 없으나 무명불각(근본무명) 때문에 법성을 혼미케하여 세간의 후득지를
시각의 마지막 단계인 구경각이 바로 본각이며 이 본각에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의 두 가지 모습이 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이 수염본각(隨染本覺) 즉 생멸문에서 본 본각의 성질임에 비해 성정본각(性淨本覺) 즉 진여문에 있는 본래부터 자성청정한 본각의 성질에 네 가지가 또 있다. 첫째 여실공경(如實空鏡)은 모든 마음의 경계상들을 멀리 여의어서 나타낼만한 법이 없는 것을 뜻한다. 둘째 인훈습경(因熏習鏡)은 여실불공(如實不鏡)이니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지만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으며 잃지도 깨지지도 않아 일심에 항상 머무른다. 그리하여 이러한 성공덕으로 바른 인연을 지어서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 불과(佛果)에까지 이르게 한다. 셋째 법출리경(法出離鏡)은 위의 불공법이
지난번에는 아라야식의 이의(二義) 중 불각의에 의한 염법연기 즉 삼세육추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삼세육추로 물들여진 우리의 현실심을 어떻게 치유하여 심원(心源)의 자리에 되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에 관한 문제, 즉 아라야식의 이의 중 각의에 의한 정법연기를 검토할 차례이다. 각의(覺義)란 깨닫지 못한 데서 오는 허망한 생각을 여읜 것, 즉 본각을 의미한다. 이 본각에 의해 불각이 있는 것이며 또 불각에 의해 시각(始覺)이 있다고 하겠다. 시각이란 ‘비로소 깨달아 간다는 뜻’으로 우리가 불각심을 여의고 본각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시각의 네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앞서의 삼세육추가 세(細)에서 추()로 진행된 것과는 달리 이제 이 정법 연기에서는 추에서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