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닌 것을 먼저 사랑하고 끊임없이 주위를 위해 베풀라 무아(無我)라고 한다. ‘나’라고 하지 않고 ‘나 아님’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나’는 ‘나 아닌 것’의 모임이기에 그렇다. 나를 속속들이 들여다 보면 ‘나’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온전히 ‘나 아닌 것’들의 모임일 뿐. 이를테면 지금의 ‘나’ 속에는 아침에 먹었던 음식이며 물과 과일들이 있고, 오전에 쬐었던 햇빛 또한 들어 있다. 또한 내 생각 속에는 부모님이며 선생님을 비롯한 온갖 사상가들의 이념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다. 몸에도 생각에도 어디를 찾아봐도 ‘나’는 없다. 오직 ‘나 아닌 것’들의 모임만이 있을 뿐. 그런데도 우리는 오직 ‘나’만을 아끼고 사랑한다. 나를 아끼고, 나만을 사랑하며, 나의 소
아름다운 음악, 음표-쉼표의 조화 올바른 충고도 적당한 때 가려야 여름 방학을 맞아 은사 스님이 계신 뉴욕의 절로 잠시 돌아 왔다. 새벽에 일어나 도량석을 하려고 나와 보니 커다란 보름달님이 하늘 중턱에서 웃고 계신다. 세상이 깨어나기 전, 이 신성한 시간에 달빛을 맞으며 치는 목탁 소리는 내 마음을 보다 밝고 고요한 의식 상태로 깨어나게 한다. 마치 먼 길을 떠났다가 마음의 고향을 찾아 돌아가는 느낌이다. 어제는 뉴욕 맨하턴 링컨 센터에서 하는 클래식 콘서트에 다녀 올 기회가 있었다. 여름 한달 동안 링컨 센터에서는 거의 매일 저녁 모차르트 음악을 주로 하는 콘서트 시리즈 (Mostly Mozart Series)가 열린다. 평소에 CD로만 즐겨 듣던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을 생생한 라이브
가난과 자족의 정신에 부응하며 살라 부처님은 수행자의 의식주를 책임진다 얼마 전에 한 신문에서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노후자금은 얼마나 될까를 물었더니 몇 억에서 몇 십억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했던 설문이 있었다.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노후자금이란 놀고 먹고 마음껏 소비하면서 보낼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생각해보라. 마음껏 놀고 먹으면서 소비하고 보내는 노후는 얼마나 비참하고 노망스러운가. 사람들은 그것을 삶의 행복으로 알겠지만 지혜로운 이라면 그러한 어리석은 노후를 과감히 버릴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세태는 어떠한가. 모든 사람들이 막강한 경제력이 뒷바침되는 행복한(?) 노후를 꿈꾸고 산다. 미래에 대한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걱정들이 많은 축적과 소유를 부채질하고 있다. 미
불교안의 기복 대승적으로 포용을 양질의 교육 통해 바른길로 인도해야 소위 공부를 많이 하셨다는 불자들과 대화하다 보면 가끔씩 불교를 진짜 불교와 가짜 불교로 나누는 경향을 접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깨달음을 향한 수행과 관련된 가르침은 진짜 불교에 속하고 보살님들이 절에 와서 집안 식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진짜 불교가 아닌 기복 신앙(祈福信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처님 형상에 대고 절을 하면서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나 길에 있는 나무나 돌에 대고 도와 달라고 하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반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이런 종교 신행 형태 때문에 불교가 다른 종교인들로부터 미신이다 뭐다 비판을 받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과거를 완전히 놓아야 한다 과거 개입되지 않으면 시비도 사라져 삶이란 관계다. 관계의 끊임없는 연장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참된 관계란 과연 얼마나 되는가. 과연 참된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한가. 참된 ‘관계’란 ‘나’가 끼어들지 않는 것이며, 과거가 끼어들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생각이나 관념이 개입되지 않은 관계다. 우리가 맺는 관계는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언제나 ‘나’라는 이기가 내제되어 있다. 관계를 맺을 때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 것인가’ 를 먼저 따지곤 한다. 만약 ‘나’라는 상 없이 상대와 관계를 맺게 된다면 우리는 평등한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좋은 사람, 미운 사람이라거나, 능력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등의 그 어떤 분별도 없이
‘동물엔 영적인 면 없다’는 기독교 ‘주인 반기는 강아지’죽일 수 있나 몇 일전에 내 책상 위로 뜻하지 않은 작은 손님이 찾아왔다. 물을 마시러 잠시 읽던 책을 막 덮으려고 하는데 책장 왼쪽 구석에 눈에 보일까 말까한 깨알만한 크기의 연녹색 벌레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창문을 통해 들어 온 것 같은데 크기가 너무 작아 하마터면 모른채 그냥 책을 덮어 작은 생명을 죽일 뻔한 것이다. 물을 마시고 다시 돌아와 그 이름 모를 연녹색 벌레 손님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벌레나 곤충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탓에 이것 저것 분석하거나 이름 붙이지 않고 그냥 그 작은 생명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몸통은 옅은 연두색에 다리가 여섯개쯤 되는 것 같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책장 위를 두리번거리며
마음 비울 수 있는 모든 것이 숲길 존재가 그대로 숲인 동시에 자연이다 장마 때가 되니까 깊은 감성에 잠기는 때가 잦아진다.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홀로 조용히 차를 한 잔 마시고 있다보면 시간이 그만 딱 멈춰서는 듯 아무런 바램도 없이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냥 그냥 지금 이 순간에 머물게 된다. 떨어지는 비소리를 온 몸으로 깊이 느껴 보았는가. 또 이런 날 축축하지만 생기어린 정신을 깨우는 메시지가 담긴 그런 숲 길을 거닐어 보았는가. 숲 속에서 나 또한 동떨어진 한 사람이 아니라 숲과 하나가 되어 숲 그 자체로써 남게 될 때 그 때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숲이란 자연이란 그대로 우리의 스승이고 선지식이다. 숲 길을
자금성 순례하다 만난 北 어린이 반가움과 긴장감이 함께 밀려온다 베이징(北京)시 산리툰(三里屯)이라는 지역에는 많은 외국 대사관들이 위치하고 있다. 저번 주에 택시를 타고 그 지역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 옆을 우연히 지나갈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택시 창을 통해 본 캐나다 대사관의 외부 벽은 거의 요새를 방불케 할 정도로 아주 높고, 뾰족하고, 층층으로 둘러 싸여 있는 것이다. 왜 이리 요새처럼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해서 중국 택시 기사한테 물어 보니 몰래 캐나다 대사관으로 들어가려는 ‘조선’ 사람들을 막기 위해 그렇단다. 조선 사람… 이 말을 택시 기사한테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해 지면서 알 수 없는 애잔한 감정이 들었다. 저 대사관의 담벽을 저렇게 높이 올려 만든 이유가 바로 내 민족
토진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스님은 7월 13일 오전 10시 30분 수국사 금법당에서 총무원장 법장 스님 등 종단의 지도자 스님들이 동참한 가운데 주지 취임 법회를 갖는다. 02)356-2002
『동의보감』에 이르기를 ‘차는 찬 성분이어서 여름에 마시면 열독을 없앤다. 맛은 달고 쓰며 독기는 없다. 기력을 내리고 체한 음식들을 삭힌다. 머리와 눈을 맑게 하며 갈증을 멈춘다. 또 뜸질하여 데인 독을 풀어준다’라는 기록이 있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 차 한 잔으로도 더위를 이길 수 있다. 그러나 마시는 차 한잔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차를 이용한 여름 요리로 지혜롭게 더위를 물리쳐보는 것은 어떨까. 차를 이용해 만든 요리들은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해 여름에도 쉽게 상하지 않고 이뇨작용과 식중독 등 여름철 질병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찻잎은 부드럽기 때문에 생찻잎, 마른찻잎, 가루 등을 이용해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루차는 밀가루나 쌀가루에 섞으면
“차를 마시며 나를 낮추는 것은 차인의 기본입니다. 차의 정신을 이어받은 차인으로서, 우리 회원들은 언제나 하심하는 마음으로 차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회원들 모두가 불자이기 때문에 생활다례를 통한 포교가 숙제입니다. 그래서 회원들과 함께 ‘차를 통한 포교’를 발원하게 됐습니다.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생활 다례법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포교하는 게 우리 회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열매와 같이 빛나는 교실’이라는 뜻을 지닌 여실원은 원장은 물론 회원들 모두 불자들로 이루어진 불자 다도 교실로 경기도 일산을 대표하는 다도교육원이다. 20여년간 차공부에 매진해 온 이목자(61·여실화)원장이 1984년도부터 21명의 회원들과 함께 매달 한 차례씩 가정법회를 열며 시작된 다도교육은
차맛의 변화를 알게 되면 이제 관(觀, 心眼)하기 시작합니다. 눈을 감고도 대상이 보인다면 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숙달이 되면 눈을 감지 않고도 차맛의 변화를 알게 됩니다. 이때 관(觀)의 대상은 ‘차맛의 다양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변화를 알면 변화 속에 변화 없음도 알게 되며, 관(觀)속에서 지(止)하는 것이니 삼매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체 생각을 버리고 그 버렸다는 생각마저 없어야 비로소 무미(無味)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차맛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은 차맛이라는 이미지를 꿰뚫는 첫걸음입니다. 맛이라는 가상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즉 차맛이라는 대상은 마음인 동시에 이미지로서, 차맛의 변화를 알아차리면 차맛이라는 고정된 이미지가 파괴되면서 차의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