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라 그리고 그 흐름에 나를 맡기라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일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 즉 무상(無常)의 진리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한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 찰나로 흐른다. 어느 한 순간도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진리와 하나되어 흐르라. 그러면 어떻게 진리와 하나되어 흐를 수 있는가. 변화한다는 진리, 무상이라는 진리와 하나되어 흐르면 된다. 변화를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그 흐름을 벗어나려 하지 말라. 변화는 진리이다. 그러니 변화를 붙잡으려 하지 말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데서 온다. 변화
네온사인 번쩍이는 천안문에는 뿌리잘린 巨木이 표류하고 있다 중국은 도대체 한국에게 어떤 존재인가? 특히 21세기에 들면서 이 질문의 무게가 갈수록 더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각종 서적과 대중 매체들이 중국의 향후 미래를 여러 각도에서 점치고 있고 그런 각종 예측과 함께 언제부터인가 차이나 드림을 꿈꾸며 중국땅을 밟는 한국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중국 위기론을 내세워 앞으로 중국의 기술과 한국 기술의 차이가 10년 아니 5년 안에 따라 잡힐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다른 어떤 이는 상해나 북경의 생활비가 한국 웬만한 도시 생활비와 거의 맞먹는 수준에 왔다면서 이런 위기감을 더욱 부채질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런 상황이 ‘기회’라며 자녀들의 조기 유학을 중국으로 보내기도
온갖 느낌도 인연따라 온 환영일 뿐 그대로를 인정하고 느끼고 바라보라 저녁 노을이 질 때가 되면 난 해지는 풍경 속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요즘 같으면 찬바람이 휑하니 불어 내 안에서 피어오르는 느낌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때다.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외롭다고 할 수도 있겠고, 고요하다거나 평화롭다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애써 그것을 표현하지 않아도 좋다. 뭐랄까 내 안의 본래적인 감각을 온전하게 끌어내 주는 이 느낌에 가만히 마음을 모으다 보면 이 대자연의 숨결과 하나되는 듯 내 마음은 어느덧 선(禪)으로 향한다. 이러한 느낌은 참 소중하다. 그 느낌을 그저 휙 지나쳐 버리지 말라. 가만히 그 느낌에 마음을 모아 집중해 보면 그 모든 느낌들 속에서 명상의 연결점을 만
마음이 만들어내는 잡음을 멈추고 내 안에서 울리는 고요함을 들어보라 아직 세상이 깨어나지 않은 초겨울의 새벽이다. 방금 일어나서 그런지 정신이 비교적 맑고 고요하다. 습관처럼 가만히 좌복(坐服) 위에 앉아본다. 그리고 조용히 들어본다. 세상의 소리, 내 안의 소리 그리고 세상과 나를 너머 있는 소리. 아무 소리가 없는 정막도 사실은 가만히 들어 보면 방안을 가득 메우는 미묘한 파장의 떨림이 있다. 이런 고요함 안에 있는 진동을 느끼다 보면 세상 전체가 나와 하나가 되어 함께 진동하는 것 같다. 소리를 듣는다는 것,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잘 듣기 위해서는 마음 안에서 만들어내는 잡음을 일단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전을 펴 본다. 먼저 『법화경』에 나오는 「묘음보살품」(妙音菩薩品
계절의 변화에 고개돌린 당신 혹시 자연의 초대를 거절한건 아닌지 가을인가 싶더니 벌써 겨울의 한가운데로 와 있다. 지난주에는 벌써 첫눈을 맞이했으니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하얀 세상이 온통 내려앉게 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통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한껏 가을을 수놓고 있었다. 참 야속도 하지, 봄꽃들이 그러했듯이 가을 단풍 또한 한창 피어오른다 싶으면 그냥 바로 아쉬움을 남기고 잎을 떨군다. 지금은 도량 주위가 온통 낙엽밭이다. 겨울철에 수북이 쌓인 눈을 밟을 때 발이 쑥 들어가는 것처럼, 지금 산을 오르면 수북이 쌓인 낙엽들로 발길이 푹 푹 빠지곤 한다. 이맘때쯤 숲의 아름다움은 이런 낙엽에 있지 않은가 싶다.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그 길 없는 산길을 걷는 느낌. 그 바스락
나이들수록 마음의 평수도 늘어나니 나이드는게 과히 나쁜 것은 아닌 듯 출가자에게 무슨 생일이 따로 있으까 마는 그래도 다음주가 되면 나이를 한살 더 먹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모르는 새 단어를 외울 때 예전처럼 바로 바로 기억이 나지 않고 좋아하는 운동을 해도 예전만큼 실력이 나오지 않음을 느낀다. 세속으로 치면 더 이상 청년이 아닌 완전히 아저씨가 되어 버린 셈이다. 그래도 나이가 한두살씩 먹어간다는 것이 나는 그리 싫지만도 않다. 젊은 날의 왕성한 혈기는 없어도 경험으로 축적된 판단력이라든지 예전에는 없던 침착성이 어느덧 나이와 함께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5∼6년 전에만 해도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면이 많았던 것 같다. 한번은 법회 중에 찬불가를 할 때 목
성적·학벌·돈으로 내린 평가 행복 기준이라 더이상 속지말자 수능시험도 이제 끝이 났다. 그동안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어머님들은 기도하느라, 스님들은 축원하느라 모두들 고생이 많았는데 어쨌거나 이제 한 고개를 넘어섰다. 이제 다 끝났으니 남은 것은 그저 다 맡겨버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싶다. 그러나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경쟁은 정작 이제부터다. 과연 어떤 대학이 좋은 대학인가. 좋고 나쁜 대학은 없다. 다만 서로 ‘다른’ 대학이 있을 뿐이고, 서로 다른 학과가 있을 뿐이다. 다르다는 것은 좋고 나쁨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른 개성이 존중되어진다는 말이다. 이 대학을 가도 괜찮고 저 대학을 가도 괜찮다. 이 전공을 택해도 좋고 저 전공을 택해도 좋다. 어디에라도 고집하고 ‘꼭’ ‘반드시’
조건적 발생(緣起) 속에서 가동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원인과 결과이다. 연기법은 일상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조건적 발생의 예를 들어 자세하게 묘사될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발견되는 조건적 발생의 본질을 입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여기 하나의 오일 램프가 있다고 하자. 오일 램프의 불꽃은 심지와 기름에 의지해 타오른다. 심지와 오일이 존재할 때, 램프의 불꽃은 타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만 없어도 불꽃은 꺼져버린다. 여기서 오일과 심지는 조건적 발생의 원리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하나, 식물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식물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씨앗과 토지, 습기와 공기, 그리고 햇볕이 있어야 한다. 씨앗이나 햇볕 등 요인들 중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식물은 자라날 수 없다. 이처럼 모든
내민족 타민족 가르는 분별 또한 중생 스스로 마음에 그려넣은 것 중국에 와서 보니 내가 한국인임을 자각시키는 일들이 종종 생긴다. 어제는 청화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생과 점심 공양을 같이 하게 되었는데, 대화 도중 최근 한국과 중국간의 쟁점이 되고 있는 고구려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중국 친구는 고구려 멸망 이후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이 중국으로 귀속했다는 점, 고구려 땅의 반 이상이 현재 중국영토에 속해 있다는 점들을 들어 중국 입장을 대변하였다. 더우기 그 친구는 한국 문명이 중국의 문명에서 나왔으므로 두 나라는 먼 친척 간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속에서 무언가 뭉클하면서 갑자기 기분이 언짢아지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몇년전에 이와 비슷한 경험이
인생에 준비과정은 없다 바로 이순간만이 존재할 뿐 우리의 인생에서 준비는 필요 없다. 그 어떤 준비과정도 진리와 멀어지게 할 뿐이고, 수행과 멀어지게 할 뿐이다. 모든 일은 낱낱이 ‘바로 그것’이 되어야지 그것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선 안 된다. 참선·염불·독경·진언·절 등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지 말라. 참선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이미 본래성품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깨달음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선수행을 하기 위해 선방에 가는 순간도 그것이 절에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로 가는 그 걸음 걸음의 순간 또한 그대로 본래 성품을 드러내는 순간이고, 깨달음을 위한 과정이 아닌 바로 깨닫는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한다. 주말에
넘치는 관심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적당함의 미덕은 만물 살리는 지혜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찬바람에 계절의 변화를 감지한다. 애석하게도 북경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가을이 되어도 단풍이 들지 않는 품종으로만 골라 심어져 있는 듯 하다. 하늘을 바라보니 오늘밤은 유달리 달이 밝다. 평소에는 공해 때문에 하늘 속 모습을 잘 볼 수 없었는데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덕에 북경의 하늘도 모처럼 깨끗하게 세수를 한 듯 하다. 조금은 차가운 공기를 마시면서 달을 보며 걸으니 정신이 맑아지면서 예전에 비해 많이 단순해진 북경에서의 내 삶에 감사함이 느껴졌다. 지난주에 나는 작은 화초 하나와 금붕어 다섯 마리를 내 방의 새 식구로 맞아 드렸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노상에서 파는 화
불교라는 이름조차 버린 때부터 불자로의 온전한 삶이 시작된다 얼마전 신문에서 보았더니 우리나라 종교인구가 8천만명이 넘는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만큼 부풀리기도 쉽고 또한 정확히 집계 내기도 어려운 것이 종교신자이다. 또한 나라에서도 매년 종교별 인구분포를 데이터화해 내고 그 숫자에 종교계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곤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진리에는 울타리가 없다. 내 것 네 것이 없고, 내 종교 네 종교의 차별이 없다. 불법이라는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안에 있는 이들만이 불교신자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불법의 이해이다. 『금강경』에는 ‘불법이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즉 불법에도 집착하면 안되고, 불법이라고 고정된 어떤 실체도 있지 않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