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는 부처님 원음이 생생히 담긴 보물 창고… 덤으로 사는 인생,부처님께 회향해야죠” 자신이 하는 일을 천직이라 여기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를 감내하면서까지 자신의 일에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무소의 뿔처럼 살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 전재성 박사. 80년대 유행했을 법한 롱코트에 헝클어진 머리, 정돈되지 않은 턱수염. 현대적 감각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외모만큼이나 그는 분명 이 시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당장 한 끼 먹을 것도 해결하기 힘든 가난과 생사를 넘나드는 병고에도 시대와 쉽게 영합할 줄 모르고 오직 자신의 길만을 걸어가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 경전 번역의 길을 무
폭력적인 시위 문화는 이제 그만 공감 얻을 수 있는 시위문화 필요 비가 내린 후 날씨가 좋아지는가 싶더니 밤부터 바람이 다시 강하게 분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거리를 헤치면서 걸으니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는 등 중무장을 해도 걷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길거리 휴지통에 얌전히 앉아 있던 쓰레기들도 불어치는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솟아 흩어지면서 길을 걷는 이들이 발길을 더욱 어렵게 한다. 바람이 부는 거리를 이렇게 걷고 있노라니 문뜩 어릴 적 읽었던 『해와 바람』이라는 동화가 생각난다. 해와 바람이 어느 날 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시합을 했다. 바람이 먼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 강한 바람을 불었다. 그러나 나그네는 바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외투 깃을 더욱
노천당 월하 대종사 임종게 일물탈근진(一物脫根塵) 두두현법신(頭頭顯法身) 막론거여주(莫論去與住) 처처진오가(處處盡吾家)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 두두물물이 법신을 나투네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말라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노천당 월하 대종사 행장 12월 4일 입적한 노천당 월하 대종사(老天堂 月下大宗師)는 1915년 4월 25일 충남 부여군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천(老天)은 법호(法號)이고 법명(法名)이 월하(月下)다. 대종사는 어릴 때부터 지혜와 자비가 몸에 익었으며 33년 7월 20일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해 차성환 화상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운수 납자의 길에 들어섰다. 부모 허락을 받지 않고 출가 득도했기에 부친과 형님이 세
“큰스님! 왜 출가 하셨는지요.” “그냥 불자가 되고 싶어서 절에 왔어.” “고향은 충청도 부여인데 어찌 금강산까지 가셔서 출가하셨는지요.” “그냥 금강산엘 한 번 가보고 싶었지.” 월하 대종사의 깔끔하고 소박한 그리고 어디하나 툭 튀어나옴이 없는 성품을 잘 드러낸 대화 내용이다. 대종사는 ‘사실’만을 말하고 그 말에 무언가 덧대기를 싫어했다. 늘 후학들을 향해 ‘부지런히 수행하고 말보다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아주 평범한 가르침으로, ‘말’에 앞서 ‘몸’으로 바른 길을 보이신 대종사는 불가에 몸담은 지난 71년 동안 한국 불교의 정화와 개혁, 청규의 실천, 선풍진작만을 위해 외길을 걸어 왔다. 60년대 한국 불교의 틀을 정비하고 다지는 정화 불사 땐 청담 스님을 비롯한 대휘 스님 등 당대의 대표
욕심 없는 공동체마을 젊은이들 소유 줄이고 만족 알아야 행복 가을 벼베기가 한창일 무렵 경기도 가평의 한 공동체 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일은 두고 두고 내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마을이라고 해 봐야 한 20여 명의 젊은 사람들이 소박하게 모여 살면서 함께 농사를 짓고 함께 마음을 나누고 먹을꺼리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아직은 거의 초보 단계의 공동체 마을이다. 마을의 주민 대부분이 주로 20, 30대의 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 다른 여느 마을과는 다른 점이다. 그러다 보니 아직은 농사일도 많이 서툴고 농사로 밥벌이를 하고 자급자족을 이어가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점이 있다. 그래도 이 마을 젊은이들은 완전한 자급자족을 꿈꾸고 있다. 스스로 자식들 교육까지도 시키려고 대안학교도
버터차와 짬짜, 야크의 배설물을 말린 연료, 가축의 말린 고기만 있으면 한겨울을 날 수 곳. 겨울이 여덟달이나 되는 히말라야 고원의 황량한 자연에 순응하며 천년전 티베트로부터 받아들인 불교문화를 지켜가는 사람들. 금발의 런던대 여대생이 찾은 라다크는 그 어떤 것도 풍족한 것이 없었지만 또 부족하지 않은 공동체 사회였다. 그들은 아르마니 양복·루이비통 핸드백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대신 스스로에게 만족한 채 이웃과 함께 일하고 춤추고 즐기면서 사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 자신들의 삶이 60년 동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우주, 동식물, 이 땅의 모든 존재들과 맞닿아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소수민족의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라다크의 한 시골마을에서 8년여의 생활을 하는 동안 그곳에도 서구
우리 마음은 도화지 같아서 마음 먹은대로 내게 새겨진다 부처님이 아닌 후에야 중생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한 두번씩 다른 사람의 흉을 볼 때가 있다. 그런데 흉이라는 것은 일단 흉을 잡으려고 치면 모든 것이 흉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 보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보면 돈 밖에 모른다고 흉을 볼 수 있고 그 반대로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자신과 수준이 맞지 않아 도저히 같이 못 돌아다니겠다고 흉을 볼 수 있다. 좋은 집에 초대를 받아 음식을 잘 먹고 나서도 돌아오는 길에서는 자기 잘 사는것 과시하려고 저런다고 흉을 잡기도 하고 좋은 클래식 음악 콘서트에 공짜로 초대받아 음악 감상을 잘해 놓고도 확실히 우리나라 전통 음악만 못하다고 핀잔을 늘어놓기도 한다. 스님들 세계에서도 교학(敎學)
오늘 날씨는 정말이지 너무 덥다. 그런 더위를 피하고자 나는 지금 방안에서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시원한 자연 바람을 쐬며 앉아 있다. 산 속 다실에서 시원한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며 저 숲을 응시하고 있자니 어느덧 더위는 물러가고 시원한 마음과 함께 저 자연과 하나되는 듯 평온과 고요가 차분히 내 마음을 적셔 준다. 더위도 자연과 공명하는 내 마음을 휘두르지는 못한다. 이런 더위뿐 아니더라도, 혹간 복잡하거나 잘 안 풀리는 일이 있거나,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나는 어김없이 자연을 찾는다. 숲 속으로 들어가 온갖 풀과 나무며 한 줄기 바람과 함께 하곤 한다. 때때로 다실 문을 활짝 열고 차 한 잔을 마시며 대자연을 호흡한다. 그러면 아무리 복잡하고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더라도 내 마음은 곧 평온을 찾
나는 박사 논문을 쓰면서 나 자신이 내 논문의 가장 엄격한 비평가가 되어 있음을 경험한다. 대학원에 들어 와서 초창기 3년 동안 공부한 것은 학계 안에서 지금까지 발표된 논문들을 읽는 것이었다. 다른 학자들의 논문을 읽어가면서 프린스턴과 하버드 교수님들은 나에게 그 글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을 가려내는 작업, 그 학자의 글 속에 숨어 있는 가정이나 편견에 관한 분석, 논문이 주장하는 요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요구했다.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아무리 훌륭한 논문이라도 그 저자가 주제를 접근하는 방식에 관한 한계가 보이게 되었고 박사 학위생 3명이 모여 토론하다 보면 아무리 훌륭한 논문이래도 헛점들이 드러나지 않는 글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살면서 괴로움 하나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한번쯤 가슴 미어지는 고통을 겪어 봤을 것이고, 또한 가슴 속에 파묻고 살고 있으리라. 지난 주에도 법회를 하는데 어떤 한 대목에서 한 사람이 유난하게 눈물을 글썽이며 흐느꼈다. 때때로 이런 사람들은 그 아픔을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 파묻고 살게 될 지도 모른다. 아무리 놓으라고 비우라고 해도 그것이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놓아야 하고 맑게 비워야 텅 빈 가슴으로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바로 놓고 비울 수 있는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번뇌며 욕심이며 집착을 놓으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왔다. 그러나 놓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도 놓아야 할 번뇌일 뿐, 깨닫고자 애쓰고 놓아버리고자 애쓴다는 것은 또다른 분리를 가져올 뿐이다
“차(茶)하면 다들 어렵고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여기잖아요? 전 그 부분이 가장 안타까워요. 제가 중국에서 차를 공부하며 가장 절실히 느낀 건 ‘중국인들은 차를 너무나 쉽고 편하게 즐기면서 마시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는 건강을 생각하고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것이지 격식을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니까요.” 김정연 씨는 4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차에 빠져 중국 유학생화를 마치고 중국차계도 인정하는 차인이 돼 돌아왔다. 늦은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절강농대 차학과, 중국차엽박물관에서 차를 전공하고 초·중·고급 다예사 자격증과 중급 평차원 자격증까지 취득한 김정연(52·청정시)씨. 2001년, 4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차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자’하는 생각으로 용감하게 중국으로 떠난
제주관향회와 일본 사뽀로우라센케이 미스이차회가 제주도에서 독특한 차 문화를 선보이고 있다. 제주의 전통 다도연구회인 제주도관향회(회장 김지순)는 제주에서는 유일하게 70여명이 넘는 회원들로 구성된 차회다. 1984년도에 관향차회(觀香茶會)라는 이름으로 청사 안광석, 라산 김시남 교수(부산여대)의 지도아래 6명의 회원들로 출발한 관향회는 제주의 차 문화를 활성화시키고 독특한 제주만의 차문화를 유지·발전시키자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오래된 역사만큼 활발한 활동이 돋보인다. 매달 셋째주 일요일이면 70여명의 회원들은 어김없이 제주 노형동에 위치한 관향회 차실(유향각)에 모여 차의 기본교리부터 예절 등 다양한 교양교육을 실시하며 차를 연구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차 학과 교수 혹은 유명인사를 초청해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