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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서산대사 청허휴정의 발원

기자명 고명석
  • 연재
  • 입력 2020.03.17 10:15
  • 호수 1529
  • 댓글 0

“왜적 침입으로 중생 죽어가니 어찌 구하지 않겠나”

33세 승과 합격하고 36세 교종판사와 함께 선종판사도 겸해
판사 버리고 49세 묘향산에 입산하니 제자 끝없이 모여 들어
그때부터 서산대사라 했으며 무의 자리에서 중도적인 삶 실천

밀양 표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기허대사 등 삼대성사의 충혼이 살아있는 유서깊은 도량이다. 
밀양 표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기허대사 등 삼대성사의 충혼이 살아있는 유서깊은 도량이다. 

“죽음이라, 누굴 위해 죽었으며 / 태어남이라, 누굴 위해 태어났단 말인가. 삶과 죽음 본래 오고감의 자취 없건만 / 애오라지 온 생명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네. 오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 오고 / 가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 가니 오고 가는 오롯한 한 주인공이여/마침내 그 어디에 머무는가.” (환향곡(還鄕曲)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은 조선 중기 때의 선승으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전국의 승군들을 이끌고 나라를 구하는 고귀한 역할을 한다. 

그는 왜 이렇게 생명 살상을 큰 죄업으로 여기는 불가에서, 그것도 승려로서 전쟁터로 나가는 상처를 냈을까? 

그것은 위 ‘환향곡’에서 밝히듯 중생을 연민하여 이익을 주기 위함 때문이었다. 중생이 아파한다면 그 아픔으로 뛰어들어 상처를 치유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낸 것일 게다. 나아가 그는 억불의 시대 법의 터전으로서 사찰을 보전하기 위해 여러 사찰의 중창과 개축, 기와 불사, 범종 등의 법구를 새롭게 조성하는데 따른 모연이나 그 공덕을 치하하는 글을 다수 남긴다. 그것은 사실 불사 발원문과 공덕문이었다. 

휴정은 조선 중기 중종 15년(1520)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다. 그의 속명은 최여신(崔汝信)이며 법명은 휴정(休靜), 청허(淸虛)는 호이다. 그는 10세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는 고독과 아픔을 맛본다. 12세 때 서울로 올라와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했지만 과거급제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5세 때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들과 함께 남쪽으로 여행 끝에 두류산(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어느 날 숭인장로(崇仁長老)로부터 “그대는 기골이 맑고 빼어나 보통사람과 다르다. 마음을 돌려 마음이 공을 꿰뚫는 급제(心空及第)를 이루고 세상의 명리를 끊어 버려라”라는 말을 듣고 불법 공부를 시작하여 21세에 발심 출가한다. 남원 지방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가다 한낮에 우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깨닫는다.

33세 때 승과에 합격하고 36세에 교종을 아우르는 교종판사(敎宗判事), 그리고 선종을 총괄하는 선종판사가 되었지만 2년 뒤 그 두 자리에서 모두 물러나 철저하게 명리를 떠난다. 그는 명리에 관계없이 삶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머무르매 여여하고 걸어가매 느릿느릿 / 우러르며  웃어 보고 굽어보며 숨을 쉬네. 나고 드는 문 없으니 천지가 나그네 집.” (자락가(自樂假)

휴정은 이후 금강산,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등을 주유한다. 49세부터 묘향산에 들어가 머물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때 세상에서 그를 서산대사라 불렀다. 서산은 묘향산의 다른 이름이다. 73세의 노구에도 휴정은 승병들을 총지휘하여 국가를 구한다. 그는 선사였다. 교와 염불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그의 지향은 선이었다.

“부처님은 활 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걸림 없는 법이란 바로 한 맛으로 돌아감이라. 이 한 맛의 자취마저 떨어버려야 조사가 보인 한 마음이 드러난다.”(선가귀감)

선은 모든 개념화, 실체화를 거부한다. 어떤 분별의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휴정 역시 모든 이성적 사유의 틀을 부수고 무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선의 그러한 무사유는 일절 사유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사유에 걸리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휴정은 선의 그 자취 없는 무의 자리에 서면서도 절을 짓고 탑을 세우며 타자에게 이익을 주는 중도적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갔다. 

다음의 글을 보자.

“불상을 만들고 경판을 만들며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것을 우리의 조사 달마대사는 유루(有漏)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람’은 하나에만 집착하는 자에 대한 나무람입니다. 유루와 무루(無漏)는 본래 둘이 아닙니다. 만일 무루에 집착하여 유루를 나무란다면, 또한 달마의 꾸중을 듣게 될 것입니다.”(금강산 도솔암기)

그의 이러한 삶의 흔적은 그가 지은 모연문(募緣文), 경찬소(慶讚疏), 상량문(上樑文) 등에 잘 실려 있다. 경찬소란 공덕을 찬탄하는 글을 말한다. 사찰 중창에 참여할 경우, 사찰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곳이고 만나기 어려운 법을 전하는 곳이며 사람들의 심신을 편히 쉬게 하는 곳이고 무언의 설법을 하는 곳이기에 그 불사 참여는 매우 복된 일이라고 치하했던 것이다. 그는 훌륭한 보시의 공덕을 찬탄하여 그 공덕의 행복한 결과는 자기 마음 속의 밝은 그림자라고 했다.

“마음이 거울이라면 업은 그 그림자입니다. 탐욕의 악은 지옥에 들어가고 보시의 선은 천당에 오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모연하는 사연을 밝힘) 바라건대 단월들은 한 말 재물을 아끼다가 눈먼 거북(캄캄한 영혼)의 업보를 받는 일이 없기를 엎드려 빕니다. 행복하고 행복할지니.”(모연문)

“이 공덕으로 시주들은 허무의 밖으로 생사를 몰아내고, 적막한 물가에서 열반을 깨트리며, 대승의 옷을 입고 정각의 평상에 앉으며, 보리의 물을 마시고 선열의 밥을 먹으며, 복의 바다는 넓고 깊어 온갖 물결을 뜻대로 삼키며, 목숨의 산은 높이 빼어나 뭇 봉우리 가운데 우뚝 솟게 하소서”(보현사 보광전 개와경찬소)  

휴정은 지리산 화개동 골짜기의 물 위에 다리를 겸한 누각 능파각(凌波閣)을 지은 두 스님의 공덕을 기리면서 아름다운 글을 남긴다. 

“누각에 올라 수려한 경관을 감상하거나 밭가는 사람들이 편히 이용하기를 바란다. 바람 불고 비가 올 때나 얼음이 얼고 눈이 올 때에도 사람들이 물을 건너게 하는 그 공덕 또한 크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즐거운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절과 누각, 종, 불상 등이 사라진다고 해보자. 그들을 품은 국토나 사람들이 사라진다고 해보자. 그것은 끝없는 추락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몸에 상처를 내며 상처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넉넉하고 걸림이 없었다. 공(空), 그 자취가 멸한 무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고명석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 kmss60@naver.com

 

[1529호 / 2020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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