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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 수좌가 희유한 ‘속리산 마애나한님’ 찾았다

  • 성보
  • 입력 2021.03.05 19:51
  • 수정 2021.03.25 09:25
  • 호수 1576
  • 댓글 10

보은 속리산 정상부 아래에서 첫 발견
3월3일, 법보신문·불교문화재연 답사
“바위에 새겨진 나한상은 희귀한 사례”

겨울 안거를 지내기 위해 속리산 법주사 총지선원을 찾은 수좌 정만 스님. 스님은 선원 도반으로부터 ‘속리산 산골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마애불이 있다더라’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대략적인 위치는 물론 단서조차 없는 상황. 정만 스님은 ‘부처님을 친견하겠다’는 원력 하나로 틈만 나면 산행을 시작했다.

올해 1월24일, 스님은 소문이 실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가여래 삼존불과 익살스런 십육나한상, 쌍 상투를 튼 동자 두 존이 새겨진 마애불을 발견한 것. 그간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순간이었다.

법보신문과 불교문화재연구소는 3월3일 예사롭지 않은 ‘속리산 마애나한님’이 있다는 현장을 찾아갔다. 마애불·나한상은 법주사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능선 상부, 속리산 서쪽 골짜기 민판동에 있는 여적암 동쪽 능선 정상부, 바로 아래에 위치했다.

마애불·나한상은 거대한 암벽에 새겨져 있었다. 높이 약 4m, 폭 7.5m의 바위에 지름 324cm의 원이 선각돼 있었고, 마애불·나한상·동자상까지 모두 21구가 부조로 표현돼 있었다.

높이 약 4m, 폭 7.5m의 바위에 상단에 석가여래·협시보살의 삼존불이, 중단에 나한상 8구가, 하단에 나한상 8구와 그 사이 동자상 2구가 있었다.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이들은 상·중·하단으로 구성됐다. 상단에 석가여래·협시보살의 삼존불이, 중단에 나한상 8구가, 하단에 나한상 8구와 그 사이 동자상 2구가 있었다.

작지 않은 크기의 마애불·나한상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스님은 “예전엔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다니며 봤을 수 있지만 현재는 이곳이 선방으로 연결돼 있고 길이 나 있지 않아 수많은 바위의 하나로 생각했을 것”이라면서 “아니면 인연 있는 자들이 찾아와 보라고 부처님과 나한님들이 그동안 꽁꽁 숨어있으셨나 보다”라며 웃어보였다.

정만 스님이 이학성 연구원과 유명우 연구원에게 마애불·나한상 발견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꽁꽁’ 숨어있던 덕에 마애불·나한상의 보존 상태는 훌륭했다. 나한상의 회화·조각은 여럿 전해지나 암벽에 새겨진 건 매우 희귀한 사례.

현재 천안 성불사의 마애석가삼존·십육나한상(충남 유형문화재 제169호)이 국내 유일의 마애나한상으로 꼽히긴 하나, 마모가 심해 형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속리산 마애불·나한상은 달랐다. 익살스러운 표정과 각양각색의 자세, 착의법, 손모양 등은 육안으로 봐도 선명했다.

그렇다면 누가 새겼을까. 박영민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사는 “그림을 그린 듯 워낙 세밀하게 구현돼 있어 당대 유행했던 화본이나 회화 작품을 모본(模本)으로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속리산 마애불·나한상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각양각색의 자세, 착의법, 손모양 등은 육안으로 봐도 선명했다.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그의 말대로 중단의 다섯 번째에는 등을 긁는 듯한 나한상이, 하단의 세 번째에는 긴 눈썹에 한쪽 무릎을 세워 앉은 나한상이, 그 옆으로는 금강저를 든 나한상이 표현돼 있었다. 그 사이로 쌍 상투를 틀고 가슴 앞에 방형 합을 든 동자상도 보였다.

이외에도 노인 모습, 젊은이 모습, 웃는 얼굴, 서역인 모습 등 21구의 존상 하나하나에 들인 정성이 예사롭지 않는 게 박 연구사의 설명이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정밀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육안으로 봤을 땐 본존인 석가모니불을 협시하는 보살의 보관(寶冠)이 두 겹으로 보인다”며 “둥근 앞 보관에는 삼각형 3~4개가, 그 뒤로는 깊이가 다른 새김이 한 겹 더 있다”고 했다.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상단의 삼존불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어 법주사 경내 ‘앉아 있는 미륵불’로 알려진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본존인 석가모니불을 협시하는 보살의 보관(寶冠)도 눈길을 끈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정밀조사를 해봐야겠지만 육안으로 봤을 땐 보관이 두 겹으로 보인다”며 “둥근 앞 보관에는 삼각형 3~4개가, 그 뒤로는 깊이가 다른 새김이 한 겹 더 있다”고 했다.

화려한 겹 보관과 흩날리듯 옆으로 벌어진 관대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에 유행했던 양식으로 알려져 있어 제작 시기가 조선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화려한 겹 보관은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 1620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외에도 나발과 육계, 상호, 본존의 겉옷인 대의(大衣)와 그 안의 승기지(僧祇支) 등이 조선 전기 양식에 가까워 보인다는 게 연구소의 설명이다.

나한상이 새겨진 마애불은 속리산에 뿌리 내린 신앙 형태도 보여준다. 박 연구사는 “나한신앙은 통일신라 후기 유입돼 고려 후기 오백나한신앙과 함께 크게 유행했고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많은 나한상이 조성됐다”며 “17~18세기 속리산을 유람한 선비가 ‘수없이 많은 나한이 봉안된 석굴(중사자암 인근에 있는 어느 암자로 추정)을 방문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속리산 나한신앙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마애불·나한상이 발견된 이곳이 조선시대의 산내 암자였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박 연구사는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 남쪽 자락에 89개소 암자가 있었다는 구전이 있으며 조선후기 속리산을 유람했던 문인들의 유람록에도 산내 암자를 언급한 사례가 많다”며 “1686~1687년 속리산 일원에 머물렀던 우담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에는 산내 암자 31개소가 언급돼 있고 1624년 간행돼 1873년 재간됐던 ‘속리산대법주사사적기’에도 59곳의 암자명이 기록돼 있어 마애불·나한상이 있는 이 장소도 조선시대 운영됐던 산내 암자일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반영하듯 현재 속리산 주변에 확인된 절터만 43여개에 달하며 이 가운데 고려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곳도 적지 않다. 속리산 곳곳에서 토굴, 기와편, 축대 등이 쉽게 발견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정만 스님과 불교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은 정밀조사가 가장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임 학예연구실장은 “조선시대 제작된 마애불 가운데 나한상을 새긴 희귀한 사례라는 점, 나한의 모습이 다채롭게 구현된 점, 보존 상태가 우수한 점 등을 볼 때 하루빨리 정밀조사를 실시해 도상을 분석하고 제작 시기를 파악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법보신문과 불교문화재연구소가 3월3일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 위치한 '마애나한님' 현장을 찾아갔다. 왼쪽부터 수좌 정만 스님, 임석규 학예연구실장, 박영민 연구사, 유명우 연구원, 이학성 연구원.
정만 스님은 “인연 있는 자들이 찾아와 보라고 부처님과 나한님들이 그동안 꽁꽁 숨어있으셨나 보다”라며 웃어보였다. 정만 스님과 박영민 연구사가 마애불·나한상을 바라보고 있다.

보은=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576호 / 2021년 3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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