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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어느날 홀연히 사라진 해남 대흥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및 복장물

기자명 이숙희

조성발원문 발견돼 제작자와 연도 명확한 성보

1991년 도난된 후 25년 만에 서울 사립박물관장 수장고서 발견
삼국 시대~고려 초 유행한 전형적인 ‘목조아미타삼존불상’ 양식
17세기 후반 조성돼 상원암 봉안…색난 스님의 가장 이른 작품

사진1) 해남 대흥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 조선후기, 높이 본존불 52.4cm, 관음보살좌상 44.3cm, 대세지보살상 44.7cm. 문화재청 제공.
사진2) 본존 아미타불좌상 복장물. 최선일선생 제공.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1991년 8월22일 도난된 후 2016년에 서울 한 개인의 사립박물관장 수장고에서 되찾았다(사진1). 발견 당시 불상은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었으며 아미타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조성 발원문과 개금중수기·후령통·주서다라니·‘법화경’ 등은  따로 보관돼 있었다(사진2).

해남 대흥사는 신라시기 창건된 사찰이다. 옛 이름은 대둔사(大芚寺)다. 18세기 말 서산 휴정 스님(1520~1604)의 의발(衣鉢)이 전해진 후, 이름난 고승들이 주석해 왔다. 선수행과 강학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자 산내암자만 12개가 된다. 경내에는 북원(北院), 남원(南院), 별원(別院)으로 나눠진 전각이 건립돼 있을 만큼 사세가 크고 연륜이 오래됐다. 

각 전각에 봉안된 불상·불화는 그 수만 해도 상당하나 대웅보전의 ‘석가여래삼불좌상 및 괘불탱’, 대광명전의 ‘삼불상’, 응진전의 ‘삼존불상 및 십육나한상’, 명부전의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천불전의 ‘천불상’ 등은 모두 조선시대 작품이다. 국가·시·도지정문화재도 여럿 포함돼 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아미타불상을 본존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이 배치됐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 유행했던 아미타삼존불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이 불상은 남원의 중심 불전인 천불전(千佛殿)의 주존불로 봉안됐던 것이다. 하지만 도난된 후엔 근래 제작된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이 놓여 있고 그 주위로는 경주 불석(佛石)으로 조성된 천불상이 모셔져 있다. 

불교에서 ‘천(千)’이란 숫자는 매우 많다는 상징적 의미이다. 1000명의 부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의 부처를 뜻한다. 이는 부처의 수가 많을수록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사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대흥사 천불상에 대한 재밌는 일화가 전해온다. 19세기에 기록된 ‘천불조성약기’와 ‘일본표해록’에 따르면 천불전은 1811년 큰 화재로 지장전·팔해당·용화전·적조당·대장전·약사전·가허루 등과 함께 불타버렸으나 다행히 1817년 완호 스님이 화주가 돼 이를 재건하고 천불 조성을 발원했다고 한다. 

이때 천불상은 조각승 현정(賢正) 스님이 주도해 경산 화원 9명, 영남 화원 24명, 전라도 화원 11명 등 조각승 44명과 경주 기림사에서 1817년 8월에 조성해 11월에 완성했다. 천불상 가운데 일부는 배에 실어 해남으로 옮기다가 태풍을 맞아 일본 대마도 등에 표류됐다가 이듬해인 1818년 7월 대흥사로 돌아왔다. 실제 대흥사 천불상은 44명의 조각승이 제작했던 만큼 비슷하면서도 일부 다른 다양성을 보인다. 표류됐다 돌아온 불상 일부는 어깨에 ‘일(日)’ ‘일본(日本)’이라는 붉은 글자가 적혀 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을 조사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있다. 이 불상은 19세기 전반 천불전과 함께 조성됐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 천불상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됐고 원 봉안처도 천불전이 아니었다. 대흥사 산내암자인 상원암(上院庵)이었다. 1991년 도난당할 당시부터 줄곧 천불전에 봉안돼 있었던 탓에 천불전 주존불로 잘못 여겨왔던 것이다.

본존인 아미타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조성발원문에 의해 1670년 봄 대흥사 상원암에서 아미타불상과 관음·대세지보살상을 조성할 당시 조각승 천신(天信) 스님과 색난(賾蘭), 충옥(忠玉) 스님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상원암은 언제 창건됐는지 알 수 없으나 대흥사 사적기인 ‘대둔사지(大芚寺誌)’에 강희년간(康熙年間, 1662~1722) 화악 대사에 의해 중건됐다는 기록이 있어 18세기 초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상원루(上院樓)라는 누각이 있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암자였다. 대중을 모아놓고 불경을 강론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17세기 후반에 조성돼 18세기 초까지 상원암에 봉안됐을 것이나 언제 천불전으로 옮겨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흥사 아미타삼존불상은 원봉안처, 불상 존명, 조성 연대가 밝혀졌다. 조각승 색난 스님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 불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색난 스님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했던 대표적인 조각승이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 작품 다수가 남아 있다. 

그동안 색난 스님의 기년명 불상 가운데 1680년 제작된 화순 영봉사 목조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가장 앞선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대흥사 아미타삼존불상의 출현으로 색난 스님의 가장 오래된 작품을 볼 수 있게 됐다. 

응진전의 석가삼존불과 십육나한상도 최근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의해 1701년 5월 조성된 색난 스님의 작품인 것이 확인됐다. 충옥 스님과 천신 스님 역시 색난 스님의 계보에 속하는 조선 후기 조각승들로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불상을 제작하고 개금 작업에 참여했다.

본존불인 아미타불좌상 높이는 52.4cm로 고개를 앞으로 숙인 채 신체비례가 적당하고 안정감 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육계와 구분이 없고 위·아래에 계주 2개가 놓여 있다. 얼굴은 턱이 둥근 장방형이다. 이목구비가 단정해 부드러운 인상이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식(通肩式)으로 입었고 오른쪽 어깨 위에 걸친 옷자락은 배 부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늘어져 있다. 특히 왼쪽 무릎 위 넓게 펼쳐진 옷자락은 조각승 색난 스님이 제작한 불상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좌우 보살좌상은 보관 장식 일부가 파손됐으나 얼굴표현이나 앉아 있는 자세, 법의의 착의법, 옷주름 표현 등에서 본존불과 거의 유사하다. 다만 두 손은 아미타불과 같은 설법인을 하고 있으나 좌우의 위치가 반대로 되어 있다.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은 보관에 장식된 화불(化佛) 또는 정병(淨甁)에 의해 구분되는데 대세지보살상의 경우 정병이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상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대흥사 대광명전의 삼불상 역시 대좌의 조성기에 의해 산내암자인 진불암(眞佛庵)에 봉안되었던 것이나 조각승이 알려져 있지 않다. 불상 양식상 유사하나 크기나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불로 구성된 삼불 형식과는 차이가 있다. 

이렇듯, 해남 대흥사는 전에 없이 다양한 구성과 형식의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어 조선 후기 불교의 복합적인 신앙형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찰이라 할만하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579호 / 2021년 3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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