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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여수 용문사 목조관음보살좌상

기자명 이숙희

도난 23년만에  개인 운영 사립박물관서 발견

얼굴 상·옷주름·문양 등에서 조선후기 보살상 특징 나타나
복장에서 조성발원문 발견 안돼 조각승·조성시기 불확실
비슷한 유형 조선후기 보살상 상당수 2000년대 연쇄 도난

사진1) 용문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 후기, 높이 53.5cm. 문화재청 제공.
사진1) 용문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 후기, 높이 53.5cm. 문화재청 제공.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용문사길 91 용문사(龍門寺) 관음전에 봉안되었던 목조관음보살좌상 1구가 1993년 12월 15일에 도난되었다(사진 1). 이 보살상은 어떤 방식으로 도난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2016년 10월 서울 경찰청과 문화재청이 공조수사하던 중 서울의 한 개인 사립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어 회수된 것이다.

여수 용문사에 관한 기록은 1914년에 적은 ‘용문암중수서(龍門庵重修序)’에 유일하게 나온다. 이 현판에 의하면, 용문사는 조계산에 있는 오래된 암자로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절의 연혁이나 유래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1761년(영조 37)과 1846년(헌종 12)에 각각 중수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사세가 기울어 퇴락하였고 1914년 경담 스님에 의해 암자로서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1964년에 이르러 혜월스님이 다시 불사(佛事)를 일으켜 오늘날의 사격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관음전, 설선당, 연화당, 삼성각, 요사 등이 있으나 이렇다 할만한 불교문화재가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관음전에 있었던 목조관음보살상이 가장 오래된 유물이었는데 도난되었으니 황망했을 것이다.

사진2) 용문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현재 봉안). 용문사 제공.
사진2) 용문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현재 봉안). 용문사 제공.

관음전(觀音殿)은 2001년에 건립된 것으로 언제 초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부에는 근래에 제작된 목조관음보살상이 주불로 봉안되어 있다(사진2). 관음전은 대개 사찰에서 주불전이 아닐 때 부르는 명칭이나 주불전의 역할을 하는 경우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 한다. 이러한 전각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단독으로 안치되는 경우가 많으나 양류관음, 백의관음, 해수관음, 천수관음상 등이 봉안되기도 한다. 관음보살은 자비로써 고통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제해 주는 존재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여 예배대상으로 많이 조성되었다. 관음보살상의 협시로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이 그려진 불화가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음보살은 ‘법화경’의 ‘보문품’을 근거로 하여 고려 이전에는 아미타불상을 협시하는 역할에 불과했으나 관음신앙이 유행하게 되면서 단독상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 인도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상상의 산)에 거주하는 관음신앙을 바탕으로 주불로서의 관음보살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유사’ 제3권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조에 의상(義湘)이 7세기 중반에 관음진신이 상주한다는 양양에 낙산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있고 고려 후기의 불상과 불화에 그 예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는 보타락가산의 관음신앙이 널리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 송대에 성행했던 관음신앙과 미술이 고려에 유입되었던 것과도 관련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본래 모습이었을 재난구제의 현세이익적 관음신앙과 보타락가산의 진리세계로 이끄는 구도적 관음신앙이 융합되면서 관음보살상은 구제자의 역할보다는 부처와 같은 절대자로서 중요하게 인식했던 것같다. 이는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해 준다는 단순한 관음보살의 역할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부처와 같은 권위와 힘을 가진 존재로 바뀌면서 단독상으로 예배되었음을 말해준다.

용문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높이 53.5cm의 아담한 크기로 머리와 신체의 비례가 적당한 편이다. 머리 위에 쓴 보관은 장식판이 일부 떨어져 나갔지만 다행히 꽃잎과 구름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고 양 옆으로 튀어나온 관대 표현도 입체적이다. 관음보살의 상징적 표식인 화불(化佛)은 원래 없었던 것인지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보관 밑으로 앞머리가 내려와 있고 양 귀를 감싸면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까지 내려와 있다.

얼굴은 각이 진 역삼각형에 가깝고 두툼한 눈두덩이의 표현으로 순한 인상이다. 몸에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식(通肩式)의 옷을 입었는데 옷깃은 모두 접혀 있고 오른쪽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가슴 아래까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내려와 있다. 다리 사이에는 옷주름이 넓게 펼쳐져 있고 오른손 소매자락이 무릎과 밀착되어 연꽃모양을 이루고 있는 점 등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의 조선 후기 보살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가슴 위로는 수평으로 입의 내의(內衣)가 보인다. 두 손은 위, 아래로 들고 엄지와 셋째손가락을 살짝 맞대고 있는 아미타불이 주로 취하는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있다.

용문사 목조관음보살상은 아쉽게도 복장에서 조성발원문이 발견되지 않아 조각승과 조성시기를 알 수 없다. 또 원래 봉안되었던 곳이나 단독상인지 삼존불의 협시보살상 중 하나였는지 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도 얼굴 형태나 착의법, 옷주름 표현 등 보살상의 특징을 보면 용문사가 중수되었던 1761년경 즉 조선 후기적인 조형감이 느껴진다. 크기가 아담하고 화려한 보관을 쓴 보살상 형태이며 여래식의 착의법과 설법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조선 후기 보살상의 특징이라 할 정도로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런 스타일의 조선 후기 보살상들은 2000년대에 연쇄적으로 도난되었다. 전라도 구례 화엄사 보광전 목조관음보살좌상(2006년 7월 4일 이전)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안동 개목사 목조보살좌상(2001년 8월 5일)과 영주 영전사 목조관음보살좌상(2001년 12월 23일 도난, 2002년 1월 26일 회수), 충청남도 청양 정혜사 목조관음보살좌상(1999년 10월 20일 도난, 2002년 1월 26일 회수) 등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일부는 끈질긴 추적 끝에 다시 돌아왔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590호 / 2021년 6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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