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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표충사 주지 진각 스님

업력을 닦아서 원력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부처의 길

마음속에 원불과 경전 모시고 ‘부처 되겠다’는 원력 갖춰
참선‧염불‧간경‧사경‧주력‧절 수행으로 정진의 힘 키우길
수행으로 업 닦으면 나쁜 업‧장애 소멸돼 부처 가까워져

진각 스님은 “스스로 삼보를 갖추고, 수행으로 자신의 마음 닦고 성불의 방편으로 삼아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진각 스님은 “스스로 삼보를 갖추고, 수행으로 자신의 마음 닦고 성불의 방편으로 삼아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 죽비 소리에 맞춰서 삼배하고 입정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사 스님 같으면 이 순간 법문이 끝난 겁니다. 여기서 삼배를 올리는 것은 내가 가진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을 다 내려놓고 온전하게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삼보란 무엇일까요?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성립되려면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그 종교를 창시한 교주가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단체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종교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불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불교의 교주는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은 팔만대장경,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단체는 승가입니다. 이것이 삼보입니다. 불교의 모든 의식이 삼귀의(三歸依)로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스스로 삼보를 갖추어 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부처님은 어떻게 모실까. 경전에는 무수한 불보살님이 나옵니다. 사찰에서는 불보살님을 전각에 모시고 예경을 올립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마음속에 어떤 불보살님을 모시는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 아미타부처님을 항상 머리에 이고 공경하듯이 나는 어떤 부처님을 마음속 스승님으로 삼을 것인가. 원효 스님께서는 아미타불이 원불이었고 의상 스님은 관세음보살, 자장 율사께서는 문수보살이 원불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부처님이 원불입니까?

관세음보살을 염하시는 분들은 관세음보살이 될 수 있고 지장보살을 부르는 분들은 지장보살이 될 수 있고 아미타불을 지송하는 분들은 아미타불이 원불이 될 수 있습니다. 원불이 없으신 분은 인연 닿는 한 분을 마음속에 모시는 것이 곧 불보(佛寶)를 모시는 것입니다. 사찰에서 천불을 모신다, 만불을 모신다, 이것은 좋은 공덕을 짓기 위한 것임으로, 자기 나름대로 마음속의 원불을 모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관세음보살을 원불로 모신다면 잘 때도 관세음보살과 같이 자고 깨어날 때도 같이 깨어나고 밥 먹을 때나 옷 입을 때나 시장 볼 때나 차 타고 다닐 때나 항상 관세음보살이 마음속에서 끊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가르침은 어떻게 모실까. 팔만대장경의 모든 경전을 다 보기란 막막합니다. 그중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한 경전을 마음속에 모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금강경’을 나의 스승으로 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금강경’을 항상 보고, 법문도 듣고, 100일 동안 1000독을 하겠다, 이렇게 해서 한 경전이라도 누가 물으면 확실하게 설명해 줄 만큼 새기고 그 가르침을 따른다면 법보(法寶)를 모시는 것입니다. 

승보(僧寶)는 어떻게 모시면 됩니까? 그냥 좋아하는 스님을 모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너무 일반적인 얘기입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사부대중을 승가라고 합니다. 곧 나도 부처가 되겠다는 원력을 갖고 공부하는 단체입니다. 공부 방법으로 한국 불교에서는 참선, 염불, 간경, 사경, 주력, 절 이렇게 보통 여섯 가지를 강조합니다. 어느 것이든 자신이 마음을 닦고 성불하는 방편으로 삼으면 됩니다. 간경을 통해서 열심히 수행하겠다고 마음먹은 분들은 매일 수지 독송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으면 됩니다. 스님께 화두를 받아서 공부하겠다면 참선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으면 됩니다. 절을 해서 업장을 소멸하겠다, 매일 바른 자세로 앉아서 사경을 하겠다 등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한 가지 수행 방법을 택해서 열심히 밀고 나가면 그것이 곧 승보를 모시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삼보를 모시게 되는 겁니다. 

저는 수행방법 여섯 가지를 해보니까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참선과 염불인 것 같습니다. 참선은 망상을 피우고 있다가도 ‘아, 내가 망상을 피우고 있었네. 화두 잡아야지’ 하면서 바로 ‘이뭣고’ ‘무’ 이렇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염불도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소리를 내거나 마음속으로 염불하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잠시 생각이 다른 데 팔려있다가도 언제든지 수행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경험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강원을 졸업하고 은사스님의 암자에서 100일 관음정근 기도를 했습니다. 나름대로 규칙도 정했습니다. 첫째 도량을 벗어나지 않겠다. 둘째, 철저하게 계를 지키겠다. 셋째, 신문과 TV를 보지 않겠다. 넷째, 삼분 정근을 지킨다. 다섯째, 법당에서만 아니라 눈 뜨고 있는 시간, 꿈에서까지도 24시간 기도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100일 동안 기도가 무척 잘 되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원주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시장도 보고 밭에 가서 일도 하면서 지냈습니다. 초하루 전날에는 차를 몰고 울산역으로 시장을 보러 다녔습니다. 차에서도 관세음보살 정근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염불 소리가 듣기 싫었습니다. 막 짜증이 났습니다. 꼭 염불 소리가 제 머리를 목탁 채로 두드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머리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너무 고통스러워 테이프를 딱 껐습니다. 그때 큰스님들께서 하신 법문이 생각났습니다. 

기도나 수행 중 어려운 고비가 오는데 그때가 바로 당사자의 업이 넘어갈 때니까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내 업장이 넘어가는 단계에서 오는 장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염불을 틀었습니다. 머리가 아프든 말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일주일 동안 염불을 계속 들었습니다. 고통은 지속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주일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시원해지면서 염불 소리를 들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밤새 들어도 멀쩡할 정도로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그 뒤로 시장에 갔는데 자동차 소리, 물건 파는 소리, 온갖 소리가 관세음보살 정근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또 하루는 울산으로 장을 보러 갔는데 새벽이니까 차도 없었습니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어도 그냥 달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빨간불 앞에서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멈추고 보니까 한 여중생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등골이 서늘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신호를 무시하고 달렸다면 그 여중생은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했습니다. 큰 사고가 났다면 저는 평생 죄책감으로 중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가피력이구나. 관세음보살님의 자비심이 나를 구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더 열심히 정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선방에 가게 되었습니다. 선방에서는 염불과는 다른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서 상월선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상월선원이 위치한 위례신도시는 굉장히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천막 안에서 무문관 형태로 지냈는데 천막 앞쪽에서는 아파트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공사하는 분들이 우리 사정을 봐주겠습니까? 사정없이 두드리고 쏟아지고 거의 폭격기 수준의 전쟁터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저는 소리에 대한 느낌을 관세음보살 정근할 때 이후로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월선원의 소음 속에서 정진하다 보니 그 소리를 화두 공부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소음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의문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든 소리가 화두를 더 세게, 더 강하게 의심으로 가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저는 수행방법을 바꾸면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고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가지 수행법으로 이만큼 정진의 힘을 키워놓았다면 다른 수행법을 통해서는 바로 이 단계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처음에는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절하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며 여러 가지 수행을 하셨을 겁니다. 그것이 헛되지 않습니다. 사경이나 간경을 해서 이만큼 올려놨다면 그다음 염불할 때는 그 수준에서 다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행은 왜 하는가. 축원문에 보듯이 가족의 화목, 사업이 잘되길 바라는 것은 작은 원력입니다. 작은 소원은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징검다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큰 원력은 무엇인가. 공부의 목적을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님과 같은 삶에 두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우리가 다른 건 부처님은 원력으로 사시고 우리는 운명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았는데 깨치고 나니까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으므로 큰 틀에서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에게 집착하고 살 때는 나에게 좋은 것,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추구했습니다. 모두 내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좋은 일도 하게 되고 나쁜 일도 하게 하다 보니 업력이 쌓입니다. 

나 때문에 업력이 쌓였는데 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진리를 깨치고 나니까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나구나. 이 우주와 내가 하나구나.’ 이때부터는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원력으로 살게 됩니다. 이렇게 나의 업력을 원력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불자로 살아갈 목표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좋은 업도 있지만 좋지 않은 업도 있습니다. 병고로 아프다든지,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는다든지 이런 일들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여섯 가지 수행방법을 통해 열심히 정진해서 업이 녹으면 자기가 받아야 할 어떤 업이 다가올 때 그대로 다 받지는 않습니다. 방망이로 한 대를 맞아야 하는데 솜방망이로 한 대 맞으면 아프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공부하면서 제일 어려울 때, 힘들 때가 자기 업이 녹아갈 때입니다. 그 고비를 잘 넘기면 업이 잘 녹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아야 할 업을 받더라도 가볍게 충분히 감당해낼 수 있는 업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자기 업이 닦아지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도 공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도 밝아지고 좋은 인연들이 찾아오고 나쁜 업은 점점 소멸이 되니까 살아가는 데 장애도 줄어서 궁극적으로는 부처가 되는 길입니다. 이보다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모두 업력을 닦아서 원력으로 승화시키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6월26일 부산 여래사불교대학 주최 ‘선지식 친견 성지순례- 제1차 밀양 표충사 순례’에서 표충사 주지 진각 스님이 ‘삼보를 모시는 방법’을 주제로 설한 내용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1640호 / 2022년 7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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