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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되살린 보우 스님에 ‘처벌’이라니

  • 기고
  • 입력 2022.08.26 21:46
  • 수정 2022.08.27 07:02
  • 호수 1646
  • 댓글 1

기고-이기룡 포교사단 서울지역단 불교문화해설포교팀

‘역사 물길’ 등장한 보우 스님은
유림 모함으로 순교한 수행자
임진왜란 영웅 서산·사명 양성해
광화문에서는 지금도 불교차별

광화문 광장이 근 2년 동안 대대적인 구조조정 공사를 끝내고 8월6일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돌아왔다. 그곳에 가면 조선조의 혹독했던 불교탄압의 집단광기와 함께 아직도 진행 중인 이 땅의 불교 차별 잔혹사를 침묵으로 증언하는 연표석을 확인할 수 있다.

정부서울청사 정문 부근의 옛날 육조거리 ‘예조(禮曹)터’에서 시작, 북에서 남쪽방향으로 물길이 흐르도록 조성된 ‘역사의 물길’에는 1392년 태조즉위(조선건국)로 시작해서 올해까지 꼭 630년 동안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사건을 새긴 연표석이 깔려있다. 그런데 이곳을 둘러보며 참담함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565(명종 20년) 문정왕후 사망, 보우 처벌, 윤원형 추방’

‘역사적 인물’ 3명의 이름과 ‘역사적 사건’의 내용이 새겨진 까만돌(烏石)이 흐르는 물길 속에 잠겨있다. ‘왕후의 사망’과 그 왕후의 친정동생인 ‘윤원형 추방’은 왕조시대 주요사건 목록에 오를 일이지만, 뜬금없이 ‘보우 처벌’은 무엇이란 말인가? 일체의 직함이나, 별다른 서술도 없는 ‘한 사람’이 왕실의 로열패밀리와 나란히 이름이 올라있다는 게 어찌 예삿일이겠나.

허응당 보우 스님 진영(봉은사 소장).
허응당 보우 스님 진영(봉은사 소장).

결론부터 밝히면 여기의 ‘보우’는 문정왕후와 함께 조선조의 혹독한 억불정책에 맞서, 멸실 직전의 불교의 법맥을 살려내려다 유림의 모함을 받고 유배당한 제주에서 생을 마감한 고승이며 수행자다.

1507년(중종2년) 출생인 보우는 조실부모하고 어린나이에 용문사로 동진출가, 금강산 마하연에서 사미계를 받고 25세에 금강산 이암굴에서 크게 깨달았다. 득도 후 큰 뜻을 세우고 운수납자로 전국을 돌때 사찰이 마구잡이로 헐리거나 불에 타고, 스님들이 이유도 없이 구타당하고 노역에 끌려 다니는 험한 꼴(불교계는 ‘무술(1538)법란’으로 기록)을 지켜보며, 이 땅 어디에도 갈 곳이 없음을 통탄하며 금강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때의 심경을 읊은 선시에는 통한의 눈물자국을 흥건하게 읽을 수 있을 정도다.

‘불교가 쇠퇴하기 이 해보다 더 하겠는가/ 흐르는 피눈물이 갈건을 흥건하게 적시누나/ 구름 뒤 산속에서도 발붙일 곳 찾을 수 없으니/ 티끌 같은 세상 어느 곳에 이 한 몸 맡길 수 있으랴’

이 선시를 읽어본 문정왕후가 출중한 인재임을 알아차리고 1548년 왕실의 원찰인 서울 봉은사의 주지로 발탁했다. 48년 동안 철폐되었던 선·교(禪敎) 양 종을 다시 일으켜 세워 봉은사를 선종수찰로, 봉선사를 교종수찰로 복원시키는 등 발군의 실력을 보여 1551년 판선종사대도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에 올랐다.

1552년에는 한동안 중단되었던 출가자 선발전형 제도인 승과(僧科)를 부활시키는 인재불사를 일으켜서 청허당 휴정(서산대사)을 필두로 송운당 유정(사명대사)에 이어 처능·처영 등 출중한 종장과 인재들을 발굴 배출했다. 후일 임진·병자호란 등 외침 시 승병을 이끌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호국불교’의 기틀을 닦았다는 후학들의 평가를 받았다.

빛이 크면 그늘도 깊다고 했던가. 한편으로는 왕후와의 ‘줄대기’를 하려다 거절당한 지방토호들과 척불세력인 유림들의 집요한 질시와 모함을 피하지 못했다. 46세에 봉은사 주지에서 스스로 물러나며 자신이 발굴한 제자인 서산대사에게 후임을 맡겼다. 청평사에서 7년을 머무르다가 53세에 문정왕후의 간청으로 선종판사의 소임을 다시 맡았다.

결국 1565(명종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스님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전국각지에서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중에는 한때(1554년 금강산에서) ‘의암義庵’이라 자호하며 ‘머리를 깎았던’ 율곡이이가 보우 처벌을 청원하는 상소문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정도로 맹렬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승적마저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 그해 가을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최후를 맞았으니 세수 56세, 법랍49년이다. 제주목사 변협과의 악연을 암시하는 문중의 구전에 의하면 변협이 제주로 가기 전 경기도 광주(현재의 봉은사 관할)목사 시절 왕후와의 줄을 대보려고 3번이나 찾아갔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조실부모로 출가하여 이렇다 할 피붙이도 없고, 유림과 조정의 눈 밖에 난 ‘죄인’으로 생을 마감한 비구 수행자의 사후 뒤처리가 변변했을 리 만무하다. 그렇게 보우는 잊혀지고 사라져갔다.

그 죽음으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1950년대 후반, 일본 천리대학에서 보우 스님의 글 600여편이 수록된 ‘허응당집’이 발굴되며 생전의 업적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보우스님 입적 후 10년쯤 지나 문도 태균 스님이 편찬한 이 책에 발문을 쓴 사명대사는 “우리 스승 보우는 동방의 외지고 좁은 땅에서 태어나 100년 동안 전해지지 못했던 법(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었다. 오늘날 학인들이 보우로부터 나아갈 바를 얻었고, 불도가 끊기지 않게 하였다. 대사(보우)가 아니었으면 영산의 풍류와 소림의 곡조가 사라질 뻔 했다”고 헌사를 썼다. 서산대사도 추모사에서 “우리 스승 보우께서는 눈에는 색(色-세상의 물정)에 집착하지 않는 공부가 있었고, 귀에는 소리에 끌려 다니지 않는 심지가 굳었다. 그럼으로 스님은 언행과 용모가 한 결 같았다”고 스승을 기렸다.

‘아, 불세출의 스승, 보우스님이시여! 미련스럽고 불민한 후학들인 저희들은 스님이 순교하고 448년이 지난 2013년이 되어서야 봉은사 불자들의 뜻을 모아 부도밭에 추모탑과 일주문 옆에 좌상을 겨우 세우고 다례재를 봉행하고 있답니다.’

광화문광장 ‘역사의 물길’ 속에 화석처럼 박혀져있는 ‘보우 처벌’ 네 글자 속에 불교를 믿고 포교했다는 이유만으로 유배형 끝에 죽음으로 내몰았던 조선조 유림들의 집단광기가 숨겨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울러 ‘종교적 사범(?)’이라는 똑같은 이유로 생을 마감했는데도 보우 스님은 ‘처벌’이라하고, 김대건 신부님은 ‘순교’라고 이중 잣대로 평가하는 이 땅의 뿌리 깊은 ‘불교차별’의 잔혹사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라고 확인하는 감회가 불자들에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1646호 / 2022년 8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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