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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구장 “이토 죽음은 불행”…안중근 평신도 자격까지 박탈

  • 기고
  • 입력 2022.09.30 12:30
  • 수정 2022.09.30 20:35
  • 호수 1651
  • 댓글 6

[특별기고] 한국 가톨릭 역사의 민낯 - 중

“총독 은혜도 모르는 한국인들”…종부성사 요청도 차갑게 거절
1901년 천주교 횡포 저항한 제주 민군 주둔지가 가톨릭 성지로
바티칸수장 비오12세, 히틀러 적극 지지…제국주의 밀착이 본성

천주교인들이 성지순례 코스에 들어가는 ‘황사평 순교자묘역’(제주민란 천주교 희생자들 묘역)

외세를 믿고 행패를 부리던 천주교에 저항했던 제주도민들의 억울한 넋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의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를 읽었거나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이재수의 난’을 본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현기영은 소설가의 상상으로만 이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조선 말 정계의 주요 인사로 프랑스와의 수교 교섭 책임자였던 김윤식이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 쓴 일기 ‘속음청사(續陰晴史)’를 기본 사료로 하고 천주교 측에 보관된 관련 자료들도 꼼꼼하게 살폈다고 한다.

프랑스(당시 법국) 신부의 권력을 등에 업은 일부 천주교인들 행패가 심해져서 제주도민들 입에서 “법국(法國) 놈들…”이라고 하면서 분노가 높아지고 있던 데에다, 조정에서 파견한 세금 징수관헌이 보조원으로 고용한 천주교인들의 횡포까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천주교의 폐단을 고치라!”는 격문을 내걸고 평화 시위를 펼쳤다. 하지만 천주교인들과 주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프랑스 신부와 교인들이 총기를 사용하면서 민란으로 발전해 제주도 전역으로 확산된다. 프랑스 신부를 등에 업은 천주교인들에 대한 반감이 신분 고하를 가릴 것 없이 팽배해 있어서 유생과 지역 유지, 대정 군수, 관리들, 기생과 무녀, 그리고 나중에 민란의 중심인물이 되는 관노(官奴) 이재수 등 거의 모든 제주도민이 봉기에 동참했다. 이들이 제주성을 함락하는 데까지 이르지만, 1901년 4월25일(음력) 프랑스 군함의 무력 시위와 관군의 개입으로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한 달여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봉기 과정에서 도민들은 교인 700여명을 살해하며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인에 대한 분노·증오를 드러냈다.제주도민 반감을 고려해서인지 천주교 측은 차마 ‘박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제주신축교난(辛丑敎難)’이라고 부른다. 당시 천주교 쪽에서 금전 피해 보상 외에 민란참가자들이 진을 쳤던 황사평을 요구해 이때 희생된 천주교인들의 ‘순교자 묘역’(?)을 만들고 ‘천주교 황사평 성지’라고 부른다. 이곳을 답사한 정치학자 손호철이 묻듯, “이곳이 ‘성지’이고, 묻힌 사람들이 ‘순교자’들인가?”

천주교가 광화문 광장에서의 시복식을 강행하고 서소문 공원을 자신들만의 순교성지로 만들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 오래 전 제주도에서 있었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제주항쟁이 일어난 지 100년 지난 2003년이 되어서야 천주교 쪽에서 ‘서구제국주의의 선교과정에서 제주민중에 대한 과거의 잘못’을 사과했다고 하지만, 과연 진정으로 잘못했다고 참회하고 용서를 빌었을까.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뮈텔이 조선 교구장 재임기간(189. 8. ~ 1933. 1.) 중 프랑스어로 쓴 일기 번역.

안중근 의사의 평신도 자격을 박탈하고 고해성사 내용을 일제에 밀고한 천주교

1993년 8월21일 저녁 서울 종로구 혜화동 가톨릭 신학원 대강당에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는 ‘안 의사 추모 및 복권미사’가 열렸다. 교구장은 “안 의사의 행동은 조국과 민족의 방어를 위한 의거로서 단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며 복권을 공식 선언했다. 

일반인들에게는 종교계의 ‘신도 자격 복권’이라는 낱말 자체가 생소하겠지만 교도에 대한 파문과 복권을 통해 천주교가 갖고 있는 막강한 권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왜 안중근 의사를 파문하여 평신도 자격을 박탈했고, 83년 만에야 신도 자격을 복원시켰을까. 그 배경에는 스스로 제국주의의 일원으로 세계 곳곳에서 선주민들을 탄압‧학살하고 식민 통치를 하고 있던 프랑스 출신 조선교구장(뮈텔·재임기간 1890~1933)과 로마교왕청의 입장이 있었다.

1924년 뮈텔 주교(앉은 사람).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는 세례명이 토마스(Thomas)인 안중근이 을사늑약을 주도해 국권을 강탈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17세에 세례를 받은 독실한 신도 안중근이 “나는 천주교인이다”고 밝히자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과 교회당국에서는 “살인은 악”이라며 안 의사의 평신도 자격을 박탈하는 결정을 내렸다. 

현재 천주교 일각에서는 “당시 교회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뮈텔주교 일기’(1909년 10월26일자)에 “이토의 죽음은 공공의 불행이다. 증오를 일으켜야 할 사건이다.…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서 많은 공적을 쌓고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는데 한국인은 은혜를 모르고 있다”고 솔직한 심정을 남기고 수녀 세 명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을 애도하러 추도식에 달려간 증거가 남아있으므로 결코 ‘상황 논리’로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심지어 뤼순의 일본 재판부에서 뮈텔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안중근에게 종부성사를 해줄 신부를 파견해달라”고 했는데도 뮈텔이 이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전국 천주교회에 “누구도 종부성사를 하러 가서는 안 된다”는 공문을 보냈다. 일본 재판부조차 안 의사의 마지막 소원인 종부성사를 허락해주었지만 차갑게 거절한 것이다. 

뮈텔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서울 용산 신학생들을 만나고 나서 “어떤 학생들은 울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고 정말로 무서운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들에게 질서를 지키도록 간청했고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차라리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뮈텔 일기) 자신이 속한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문서에서는 “선의의 소수 애국자를 제외하면 자칭 ‘의병’들의 대부분은 약탈자이거나 산적들인 것이 틀림없다”고 하여 독립운동 자체에 대한 불신과 멸시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조선교구장 뮈텔의 죄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10년에는 안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 “테라우치 총독을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 일을 고해성사에서 신부에게 알렸는데 이 사실을 보고받은 뮈텔이 눈 내리는 겨울 밤 명동성당에서부터 현재 남산한옥마을 자리에 있었던 일본군헌병사령부까지 걸어가 헌병사령관 아카보에게 밀고하여(뮈텔 일기· 1911년 1월11일자), 암살계획이 초기 단계에서 실패하였을 뿐 아니라 이듬해인 1911년 1월1일부터 안명근을 비롯해 105명이 일본군에 끌려가 극심한 고통을 겪게 하였다(역사책은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천주교인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신부가 고해성사에서 평신도에게 들은 내용을 발설할 수 없다”고 알고 이것을 상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1911년의 ‘105인 사건’ 발생 배경에는 우리 민족을 힘들게 한 천주교의 어두운 민낯뿐 아니라 ‘고해성사 내용을 외부에 발설’하여 교회 내부 규율을 어긴 중대한 배신행위도 있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독일주재 대사 시절의 비오 12세.
독일주재 대사 시절의 비오 12세.

‘히틀러의 교왕’ 비오12세의 악행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2019년에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3·1 운동 정신의 완성은 참평화’라는 담화문을 통해, “백년 전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설 때에)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였다”면서 당시 한국 천주교지도부가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해방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외면한 채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고 과거사를 고백·반성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천주교회는 ‘정교분리 정책’을 이유로 일제에 적극 협력한 것이 아니다. 조선 교구뿐 아니라 전 세계 천주교회 중심인 로마 교왕청과 예수회를 비롯한 주요 수도회와 프랑스‧스페인‧독일‧포르투갈 등 제국주의 국가의 천주교회가 거의 모두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주민들에 대한 약탈‧탄압과 식민 지배를 당연시하고 있었으며, 당시 조선교구도 그 흐름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1939년 3월부터 1958년 10월까지 바티칸의 수장인 교왕으로 권좌에 있었던 비오 12세(Pius XII)를 인터넷에서 찾으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세계 평화 회복과 자선 사업에 노력하였고 전임 교왕 비오 11세가 추진한 유대인 구제 사업을 이어받아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특히 나치 독일에서 피난해 온 유대인들을 여러 방면으로 많이 도와주었다”고 언급되고 있다(출처=위키피디아). 

아마 교회의 공식 입장을 담아 올린 것일 터인데 실상을 알고 보면 비오12세는 이와 정반대 행위로 일관한 인물이다. 독일 주재 교왕청 대사 시절 유대인들과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나치에 공감하며 독일 주교와 평신도들에게 ‘나치와 협력하라’고 권고하였을 뿐 아니라,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 마지막 과정의 걸림돌이었던 독일의 천주교 중심당(The Catholic Center Party) 해산을 종용하고 무력화시켜 히틀러에게 막강한 권한을 갖게 하는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의 군사사절단을 반갑게 맞이하는 비오12세(1939).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의 군사사절단을 반갑게 맞이하는 비오12세(1939).

히틀러가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는 유대인 절멸 정책에 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는 독일 주교들을 무마하였고, 교왕청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에는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비오 11세의 회칙 발표와 배포를 가로막았으며, 교왕 재위 시절인 1939년에 주민 대다수가 천주교인인 폴란드를 독일이 침공하려는 명분을 만들려고 할 때에 오히려 폴란드를 향해 “더 많은 양보를 하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50만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며 쿠데타를 일으켜 유혈 내전 끝에 스페인 민주공화정을 무너뜨린 프랑코에게 전보를 보내 “스페인 천주교의 승리”를 축하한 인물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이들이 비오 12세를 ‘히틀러의 교왕(Hitler's Pope)’이라 부르는데, 이런 ‘제국주의 세력과의 밀착'이 세계 천주교의 솔직한 모습이 아닐까.

[1651호 / 2022년 10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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