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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침략한 왜군 신부도  가톨릭 이유로 혈세 들여 공원 조성”

  • 기고
  • 입력 2022.09.23 21:15
  • 수정 2022.09.30 09:54
  • 호수 1650
  • 댓글 19

[특별기고] 한국 가톨릭 역사의 민낯-상

한국 천주교사 이승훈 세례로 시작됐지만 주어사로 자생설 강조
조선 침략한 세스페데스 신부 위해 창원 왜성도 혈세로 성지화
나라 위협한 황사영 백서와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박해로 둔갑해

서울시가 최근 재개장한 광화문 광장의 역사물길에 조선불교 중흥조 보우 스님의 죽음을 ‘처벌’로, 김대건 신부의 죽음은 ‘순교’로 편향 기술하고 주요 유적지·관광지마다 가톨릭 성지 간판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또 서소문 역사공원까지 가톨릭 신자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이 ‘한국 천주교의 어두운 역사’에 관한 기고문을 보내와 이를 3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임계점이라는 말이 있다.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상(相) 변화를 할 때 저온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한계 온도와 압력’을 뜻하는 물리학 용어인데, 한국 천주교가 보여주는 행동 때문에 ‘임계점에 이르러서 더 이상 참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목숨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천주교도들을 숨겨주었던 스님들에게 사은비를 세워 고마운 마음을 드러내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선조 교도들을 숨겨주었던 절을 차지하여 성지를 만들겠다고 하고 그곳에 모셔져 있던 스님의 부도비를 훔쳐가기도 했으니 배은망덕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밥을 주고 옷을 입혀주었으면, 집 주인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살만해 진 뒤에 “내가 그 집에서 밥과 옷을 챙길 수 있었으니 그곳은 내 집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렵게 지내던 시절을 추억하는 기념관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우겨대는 억지와 다를 바 없는 일을 현재 한국 천주교 일부에서 저지르고 있는 데에다가 중앙정부와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이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고 있어서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갈수록 위험해지는 현실을 보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단지 특정 교구장이나 신부들의 잘못된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종교 ‧ 신앙과 문화 전통은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인 문화 유전자가 있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최근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에 조성한 ‘역사물길’ 사업 등에서 역사 왜곡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보고 천주교 역사를 제대로 알고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이 문제를 간략하게 쓸 예정이다. 첫 번째 글에서는 1900년 이전 천주교가 어떤 일을 하였고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정당했는지 살필 것이다. 두 번째 글에서는 1901년 제주 이재수의 난에서부터 1945년 8월 민족해방까지,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글에서는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 천주교의 적나라한 모습을 살필 것이다.

한국 천주교 역사의 시작은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1784년으로 여겨왔지만, 일부에서는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끌려갔던 소현세자 부부가 예수회 소속 신부 ‘아담 샬’과 교류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였고 귀국할 때에 교리서와 용품을 갖고 왔다면서 “한국 천주교 출발 시점을  더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이후 천주교계 일각에서 “1770년대 권철신이 이벽·이승훈·정약용 형제 등과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교리를 공부했으므로 이 때를 한국천주교의 출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제 교회 내부에서는 그것이 정설로 굳어져가고 있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동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리하면서까지 그들이 천진암을 성역화하고 주어사도 성지로 조성하려고 하는 배경에는 한국천주교 출발점을 20여 년 끌어 올리고 자생(自生)설을 확실히 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일각에서 ‘한국 천주교 역사를 임진왜란 시기까지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조심스럽게 추진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해전을 다룬 영화 ‘명랑’에서는 십자가를 새긴 깃발을 앞세운 일본군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천주교도였던 일본 침략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침략군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3년 12월에 천주교도로 이루어진 일본군들을 위해 스페인 출신 예수회 소속 세스페데스(1551~1611)를 종군 신부로 불러들여, 1595년 6월까지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웅천왜성에서 미사 집전과 세례‧고해성사 등 사목 활동을 하게 하였다. 웅천왜성은 임진-정유재란 당시 울산에서 순천 사이의 남해안 요충지에 일본군이 쌓은 성 31곳 중 하나다.

2015년 10월 천주교 마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주관 웅천왜성 산상미사.
2015년 10월 천주교 마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주관 웅천왜성 산상미사.

이곳에서는 천주교 마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2009년부터 매년 산상(山上) 미사를 연다. 2013년까지는 ‘한국 최초의 사목 터 성역화’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드러내고 진행하다가 그 뒤로는 비판 여론을 의식하여 ‘성역화’라는 말을 피하고 ‘전란 중에 세스페데스 신부를 통해 깃들었던 하느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왜성 축조에 동원된 조선 백성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라고 바꾸었다. 그러나 마산교구의 모 신부는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 2000여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고 나가사키에 조선인 천주교 연합회가 있었던 점, 일본 내에서 유일한 조선인 천주교회인 성 라우렌시오 성당이 건립된 것도 세스페데스와 동료 선교사들이 있어 가능했다”면서 ‘비록 왜군 종군신부로 조선에 왔지만 세스페데스와 그가 속한 예수회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 선교 의지가 있었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한국 천주교 전래 출발 시점을 200여년 끌어 올리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세스페데스 공원 입구의 조각. 싸움터에 오는 종군신부가 평화 사절단처럼 묘사돼 있다.
세스페데스 공원 입구의 조각. 싸움터에 오는 종군신부가 평화 사절단처럼 묘사돼 있다.

그런데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드러내놓고 세스페데스 현양 사업을 펼치기 어려운 마산교구가 이 꿈을 펼칠 수 있게 날개를 달아준 곳이 창원시이다. 예산 수억 원을 들여 웅천왜성 아래에 ‘세스페데스 공원’을 조성하고 2015년 11월 30일 개장식 자리에 스페인과 중남미의 스페인어 사용국가 주한 대사들뿐 아니라 세스페데스의 고향 주민들까지 초청하는 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웅천왜성과 세스페데스 신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2019년 2월8일 아침 일찍 세스페데스 공원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1993년에 세스페데스 고향인 스페인 툴레도 사람들의 성금으로 세운 ‘세스페데스 신부 방한 400주년 기념비’가 있다. 침략군의 일원이었던 종군신부의 ‘방한기념비’를 건립한 것도 문제인데, 창원시가 많은 예산을 들여 조성한 세스페데스 기념공원에 세운 조각 작품을 보면 “내가 우리나라 땅에 있는 게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탁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 오는 그가 배에서 내리는 장면을 마치 ‘평화 사절’로 이 땅을 찾아오는 것처럼 새겼기 때문이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소재한 세스페데스 방한 400주념 기념탑.
경남 창원시 진해구 소재한 세스페데스 방한 400주년 기념탑.

“명나라 정벌을 명분으로 조선 땅을 짓밟은 일본군은 사령관을 비롯해 대다수 병사가 가톨릭 신자였다. 이들은 세스페데스 신부와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 낮에는 전쟁터에서 무고한 조선 백성을 학살하고 밤에는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라크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야 한다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자연스레 겹친다.” ‘헌법의 풍경’ 저자인 법학자 김두식이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 한 말이다.

김두식이 이 책을 낼 때에 기념공원 조성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도 창원시의 행위를 심하게 질책했을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광화문에 역사물길을 만들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만용을 부린 데에는 창원시와 천주교 마산교구가 큰 어려움 없이 이런 일을 저질렀던 전례를 보고 “천주교 신부들 마음에 들기만 하면, 민족의 자부심은 팽개치고 역사 왜곡을 해도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교과서와 일반 역사서에서 ‘황사영백서사건’이라고 부르는 1801년 천주교도 탄압사건도 그들은 ‘신유박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살펴야 한다. 그 당시 프랑스 민중들이 왕실과 귀족뿐 아니라 천주교회에 절망하여 혁명을 일으켜 성당을 파괴하고 신부들을 죽였던 사실을 모른 무지까지 탓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군함 몇 척 보내어 이 나라 조정을 쓰러뜨려 달라는 비밀 편지가 발각되었는데도 그냥 넘어갈 정부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상상해 보자.

1900년 5월6일 명동성당에서 촬영한 페롱신부 사제 수품 50주년 기념 사진. 맨 앞 줄 가운데 의자에 앉은 사람이 페롱신부. 
1900년 5월6일 명동성당에서 촬영한 페롱신부 사제 수품 50주년 기념 사진. 맨 앞 줄 가운데 의자에 앉은 사람이 페롱신부. 

국민들에게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라고 알려진 역사도 잘 살펴야 한다.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 무역 교섭에 실패한 독일인 오페르트가 조선정부를 압박하려고 주도한 일이라고 하지만, 임금의 할아버지이자 최고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 도굴을 하러 오는 길을 안내하고 적극 참여했던 사람들이,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제독 로스의 강화도 침범 때에도 안내인 역할을 했던 프랑스 신부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들이었다. 교과서에서는 그 이후 더 강화된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을 강조하며 근대화가 늦어지고 식민지로 전락한 책임을 흥선대원군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같은 일이 천주교 국가에서 일어났으면 그들은 훨씬 더 가혹하게 탄압했을 것이다.

역사가 이러한데도 천주교인 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천주교, 특히 ‘아씨시의 성자’라고 하는 프란체스코가 세운 수도회와 현 교왕이 속한 예수회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다른 나라 사례 두 가지를 보면서 그 환상을 깨자.

1549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온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란다 수도사는 수도원 12곳과 성당 200곳을 세워 선교에 나섰는데도 선주민들을 개종시키는 데 실패하자 두 발에 큰 돌을 묶어 매달아 놓은 채 채찍질하고 몸에 뜨거운 촛농을 뿌렸으며, 아름다운 마야 건축물들을 허물어뜨렸고 상형문자로 기록된 책 수백 권을 압수하여 불구덩이에 집어 던져 태워 마야 문명의 자취를 말살하였다. 

1884년에 청불전쟁이 발발하자 베트남 접경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신자를 파견하여 정탐활동을 하고, 신자들을 무장시켜 프랑스 군을 돕게 유도하였으며, 프랑스인 뮈텔 주교가 수장으로 있던 조선 천주교회도 매우 적극적으로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배를 정당화‧미화하였다. 역사가 이렇게 생생하게 보여주는데도 이들을 믿을 수 있을까.(계속)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1650호 / 2022년 9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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