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산 칠백의총에 조선후기까지 의승(義僧)을 위한 제향공간이 별도로 있었음에도 정부가 이를 복원하지 않고 외면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구나 문화재청은 “종용사 오른편에 별실(別室)로 승장사(僧將祠)가 존재했다”는 박범 공주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을, 자체 발간한 보고서에 수록하면서도 정작 칠백의총 종합정비사업에는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 가톨릭이라는 이유만으로 왜적 종군 신부 세스페데스가 머물렀던 창원에 기념 공원을 조성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문화재청이 2021년 9월23일 발간한 ‘칠백의사 그 충절의 기록들’에 따르면 조헌·고경명 등 21위의 위패를 안치한 종용사 서쪽에 영규대사와 의승군을 위한 사당도 있었다. 이름은 승장사이다. 내부엔 영규대사와 승장사졸 위패가 좌우로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박범 교수가 언급한 사료(금산군읍지·이재난고·여지도서·각부청의서존안 등)를 종합해보면 조정은 봄과 가을 마지막 정일(丁日) 종용사에 제향을 올렸다. 이때 제물은 관아에서 마련했고 승장 영규와 의승에겐 고기 제물 대신 두부를 올려 예를 갖췄다고 한다. ‘각부청의서존안’에선 “종용사의단은 춘추 제향에 60원, 승장 별단에 17원이 필요하다”는 청원서 기록이 있는데 이 사료를 통해 의승을 위한 제향이 대한제국 광무2년(1898) 7월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총독부 식민지 정책 강화로 칠백의총이 훼손됐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2차 성역화사업으로 1970~1976년 칠백의총을 복원·정비했지만 이때 조헌 선생 선양이 강화된 것과 달리 영규대사와 의승 공적은 누락됐다.
학계·지역사회·불교계에선 2000년대 후반부터 “조헌의 700의사와 영규대사와 의승의 역사도 복원해야 한다”고 지적했음에도 문화재청은 유적종합정비사업에서 이를 배제했다.
문화재청은 2012년도 종합 정비기본계획 용역에 3000만원, 2014년도 토지매입·실시설계비에 5억2000만원, 2015~2023년 종합 정비기본계획에 113억원을 투입했다. 그럼에도 일제가 훼손하기 전 모습을 찾기보단 박정희 정부 성역화 사업을 계승하는 데만 치우친 모양새다. 이에 무명의사(無名義士)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충절을 기리겠다는 본래 취지와는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화재청이 조헌의 700의병 선양에 몰두하는 사이 영규대사의 800의승 흔적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사적지 내 건립된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 ‘중봉조헌과 칠백의사 순절 기념(한글)비’ 등에서 영규대사가 간간이 언급되긴 하나 조헌의 조력자로 전락한 상태다.

청주·금산전투에 관한 왜곡은 2019년 개관한 칠백의총기념관에서 더욱 심화된다. 기념관은 전체면적 2442㎡에 지하 2층부터 지상 1층의 규모이다. 유물 관리 수장고, 전시실, 4차원 입체(4D) 영상관, 학예연구실 등을 갖췄다. 전시공간은 크게 두 곳이다. 1전시실은 임란 개요와 1차‧2차 금산전투의 전개 과정 등을 소개한다. 2전시실은 당시 전투를 이끈 의병장에 관한 소개의 공간이다.


하지만 영규대사의 의승들 흔적을 지우고 ‘칠백의총’이란 사적지 명칭에 맞춰 임진왜란사를 재단하다 보니 하나의 기념관 내에서조차 일관성이 없는 역사서술을 보여준다. 1전시관에선 “중봉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끈 칠백의병”이라고 영규대사를 700의병에 포함해 설명하는가 하면, 2전시관에는 “영규대사가 승려 800여명으로 의승군을 조직하고 조헌이 이끄는 칠백의병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면서 800의승을 별도 부대로 안내하고 있다. 더구나 입체 영상관에서 하루 세 번 상영되는 애니메이션에선 조헌의 절개를 강조하느라 영규대사가 조연으로 전락한 모양새다.


10분짜리 영상의 6분30초무렵 전투에서 왜군이 조선군에게 조총을 쏘아대자 영규대사가 조헌에게 헐레벌떡 뛰어가 “적의 숫자가 예사롭지 않사옵니다. 단단히 큰일이 난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상에선 조헌만 두드러질 뿐 영규대사·의승·의병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치우친 역사서술은 칠백의총기념관의 소장유물(175종) 가운데 80%이상이 조헌 관련 유물이라는 데서 분명해진다. 문화재청도 주요 소장품으로 조헌이 1574년 쓴 일기책(‘조천일기’)과 1567년 문과에 급제해 받은 ‘교지’, 1883년 고종 황제가 조헌의 문묘에 배향하도록 명한 ‘교서’, 조헌의 전기·저술·포전을 수록한 ‘중봉전집’, 조헌이 임란 때 쓴 ‘화살통’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칠백의총기념관이 금산전투 순국자를 위한 추모 공간이 아닌 조헌 박물관이냐”라는 지적이 나온다.
![창원 세스페데스 공원. [법보신문 DB]](https://cdn.beopbo.com/news/photo/202302/314465_91088_1837.png)
한편 조선 백성을 지키고자 목숨 바쳐 싸우고도 국가로부터 외면 받은 영규대사·800의승과는 달리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 고니시 유키나가(?~1618)의 종군신부 세스페데스(1552~1611)는 창원시가 세금 3억원을 들여 ‘세스페데스 공원’을 만들어 선양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칠백의총 정비를 시작하던 2015년 창원시는 1만4129㎡의 부지에 왜군의 종군신부 역사를 새겨 이를 기념했다. 당시 한 시민은 창원시청 홈페이지에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는 조선 백성을 무참하게 학살한 왜군 고니시의 초청으로 미사를 하고자 조선에 들어온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조선 영토를 유린하고 학살을 자행한 왜적을 위해 기도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세스페데스공원은 여전히 주요 관광지로 안내되는 실정이다.
조계종 문화부장 탄원 스님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을 정부가 외면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마곡사·보석사·가산사 등 지역사회에서 의승 명예회복에 노력하고 있다고 들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 문화부도 적극 나서겠다”고 말했다.
장정화 대한불교청년회장은 “영규대사와 의승은 불교만을 위해 희생한 게 아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라며 “없었던 사실을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아닌데 왜 역사서에 나오는 진실조차 허구로 만드는가. 의아하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도록 청년불자로서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금산=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68호 / 2023년 2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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