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재청 산하 칠백의총관리소가 ‘칠백의총에 임진왜란 금산·청주 전투에서 전사한 의승(義僧) 역사를 누락했다’는 지적을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칠백의총’ 명칭 개정에 관해선 궁색한 이유를 내세워 불교계 의승 복권 요구를 거부했다. 또 조선 후기까지 별도로 존재했던 의승군 제향 공간 터를 인정하면서도 그 터의 위치가 분명치 않다는 핑계를 내세워 “복원 계획이 없다”고 했다. 이같은 칠백의총관리소 입장에 관련 학자들은 학문적인 타당성이 결여된 궁색한 변명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법보신문은 2월15일 문화재청에 ‘칠백의총 유적 종합정비 사업에 의승군 역사가 누락된 이유’ ‘의승을 위한 제향공간 승장사가 복원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 ‘칠백의총기념관의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에 의승군 관련 설명문이 서로 다른 이유’ ‘2015년부터 진행된 유적 종합정비 사업으로 의승군 역사가 송두리째 지워졌다는 비판에 관한 견해’ 등을 질의했다. 이에 류시영 문화재청 칠백의총관리소장이 2월16일 답변서를 보내왔다.
답변서에 따르면 ‘칠백의총’은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고유한 역사적인 권위를 갖는 명칭으로 이를 변경할 수 없다. 더구나 현재 2차 금산전투에 참전한 의승군 수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명칭 변경을 논의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은 ‘사료에 언급된 칠백의총이란 단어만 취사 선택해 마치 역사의 전체인 듯 고집하는 편협한 행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답변서에서 언급한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에는 ‘1천 명의 승려들이 돌진하니 모든 군(軍)이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선조실록·1592년 9월11일자) ‘이 군사가 아니었다면 청주의 왜적을 이길 수 없었을 것’(선조실록·1592년 9월12일자)이라며 영규대사와 의승군이 제1차 금산(눈벌)·청주성전투·제2차 금산(연곤평)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운 기록이 분명히 적시돼 있어 설득력이 전혀 없는 답변이라는 비판이다.
황인규 동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근현대 형성된 것이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행정 편의주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10개년 정비사업을 계획하면서도 역사 고증을 위한 학술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 자체가 모순이다. 조선시대 역사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궁색한 답변”이라고 지적했다. 이종수 순천대 사학과 교수도 “최근 발굴된 연구 성과만 살펴봤다면 금산전투 선양사업의 범위를 의승군을 배제한 700의병으로만 한정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칠백의총관리소는 또 ‘조선 후기까지 의승을 위한 제향공간(승장사)이 별실(別室)로 존재했음에도 종합 정비사업에서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는 지적에 대해 “의승을 위한 제향 공간인 승장사(僧將祠)가 있었다는 문헌 기록은 있으나 현재 건물 터를 알 수 없다”고 답했다.
뿐만 아니라 칠백의총관리소는 ‘현재 경내에 있는 사당(종용사)도 제 위치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에 대해 “당시 금산군민들이 정확하지 않은 건물 위치에 자체 복원했다”며 “절토(切土·깎거나 파는)와 성토(盛土·쌓거나 덮는)가 이뤄져 토지층이 교란돼 있어 승장사 터를 확인할 수 없다”고 책임 주체를 민간에 떠넘겼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도 납득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칠백의총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주요 전각이 한 번 철거됐고 그나마 남아 있던 전각도 1940년 일제 경찰의 항일유적 훼손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 칠백의총 경내에 있는 사당(祠堂)인 ‘종용사’부터 모든 설치물의 위치가 제 위치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칠백의총관리소는 “의승군을 별도로 모신 승장사는 없어졌지만 대신 종용사(從容祠)에 있는 위패 하나에 금산전투에 참전한 모든 의승 의미를 담았다”면서 축소한 의승 역사에 관해 적반하장의 태도를 견지했다.
김성순 전남대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는 “영규대사와 의승들은 당시 조헌과 의병들의 전략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전했다. 죽는 것을 알고 나선 것”이라며 “칠백의총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취지로 정비사업을 진행하면서 의승들 역사를 축소해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영규대사가 청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면 이순신 장군의 해군도 활약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승군의 공을 축소할 것이 아니라 당시 선조가 영규대사에게 내린 금란가사를 복원해 기념관에 전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칠백의총관리소는 ‘조헌의 700의병에만 역사를 한정하다 보니 하나의 기념관 내에서조차 역사서술이 일관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에 관해서는 일부 오류를 인정했다. 칠백의총관리소는 제1전시실에 ‘조헌과 영규의 700의병’으로, 제2전시실에는 ‘영규의 800의승’으로 다르게 설명된 부분에 대해 “불교계 입장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순차적으로 전시 패널 문안을 정비해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칠백의총’과 ‘칠백의사’는 고유 명사화됐기에 왜곡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주장을 꺾지 않았다. 또 “일부 패널에 800의승을 적시한 것이 금산전투 참전 의승 수를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했다.
이에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는 “조선시대가 숭유억불이라고 해서 현대사에서까지 의승군 역할을 제외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라며 “전에 안했다고 지금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금산·청주전투에서의 승병 활약이 분명히 기록돼 있는데 이를 외면하는 것이 엄연한 역사왜곡이다. 이제라도 불교계의 역할을 국가가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2015년부터 올해까지 칠백의총 유적종합정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칠백의총관리소가 지난해 7월 제출한 2단계 사업 추진 상황서에 따르면 칠백의총 유적 종합정비사업에는 56억8000만원이 투입됐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70호 / 2023년 3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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