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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칠백의총 정비사업서 800여 의승 순국 또 외면했다

  • 교계
  • 입력 2023.02.03 17:59
  • 수정 2024.11.08 18:01
  • 호수 1667
  • 댓글 13

임란 때 금산전투서 의승 800, 의병 700 등 1500명 전사
조선시대 내내 의승은 배제하고 조헌 등 700의병만 추모
올해 8월 마무리 앞둔 9개년 종합정비사업서도 개선 안 해
430년간 차별 지속…“나라 위해 희생했는데 이럴 수 있나”

임진왜란 금산전투에서 영규대사가 이끄는 800의승과 조헌이 이끄는 700의병이 왜군과 싸우다 함께 순절했지만 이들의 호국정신을 선양하는 사적·기념관은 조헌의 700의병에 한정한 ‘칠백의총’으로 불리고 있다. 이에 ‘800의승 공적은 송두리째 외면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문화재청은 2015년부터 9년 간 칠백의총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도 800의승 순국사실은 여전히 배제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문화재청은 임란 당시 의승장 기허영규(騎虛靈圭·?∼1592)대사와 의병장 조헌(趙憲·1544~1592)이 이끈 전투에서 순절한 시신들을 모두 거둬 합장한 무덤인 칠백의총(사적) 주변 정비사업을 오는 8월까지 마무리하겠다고 밝혔다.

칠백의총 사적 전경. [금산군]
칠백의총 사적 전경. [금산군]

하지만 ‘칠백의총’이란 명칭이 조헌의 700의병만 뜻하고 있어 800의승도 포함한 ‘천오백총’ 또는 ‘의승·의병의 총’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2011년 4월 문화재위원회의(사적분과)에서도 ‘칠백의총 명칭 변경의 건’을 주요 안건으로 다뤘지만 당시 위원들은 “고증 자료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수정 요구 사안을 철회했다.

문화재위원회 결정에 대한 반박도 동시에 제기됐다. 영규대사와 의승이 제1차 금산(눈벌)·청주성전투·제2차 금산(연곤평) 전투에 참전해 공을 세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국조보감’ ‘기재사초’ 등에 명확히 적시돼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혹독한 불교 탄압의 시기였다. 승려 신분은 양민 이하로 취급돼 사회적으로도 냉대 받았다. 그럼에도 스님들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발적으로 의승을 규합하고 많은 전투에서 크게 활약했다.

특히 제2차 금산전투 패배 원인은 충정심만으로 무모하게 돌진한 조헌의 전략 부족이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당시 영규대사는 조헌에게 의병군의 전열을 재정비한 뒤 관군의 지원을 받아 금산에 진격할 것을 요청했지만 조헌은 이를 무시하고 공략에 나섰다. 그럼에도 영규대사는 조헌을 혼자 죽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800의승과 참전했고 모두 그 전투에서 순국했다. 

비록 제2차 금산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의승의 활약으로 호남을 막아냈고 관군이 반격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해 군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선조는 청주성 승전에 막대한 공을 세운 영규대사에게 당상관 벼슬과 옷을 내렸지만 영규대사는 하사품이 도착하기도 전 순국했다.

금산혈전출진도(錦山血戰出陳圖). 임진년 8월 16일 조헌선생과 영규대사가 금산의 왜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에서 유성(儒城)을 거쳐 금산으로 진격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때 칠백의사들이 청주성을 탈환한 소식은 호남, 호서에 퍼져나가 백성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칠백의사를 우러러보며 아낙네들은 물과 음식까지 마련하여 바치기도 했다. [문화재청]
금산혈전출진도(錦山血戰出陳圖). 임진년 8월 16일 조헌선생과 영규대사가 금산의 왜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에서 유성(儒城)을 거쳐 금산으로 진격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때 칠백의사들이 청주성을 탈환한 소식은 호남, 호서에 퍼져나가 백성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칠백의사를 우러러보며 아낙네들은 물과 음식까지 마련하여 바치기도 했다. [문화재청]

‘선조실록’(1592년 9월12일자)은 영규대사와 의승군에 관해 “호령이 엄명하고 곧바로 전진할 뿐 퇴각함 없이 한마음으로 싸웠습니다. 이 군사가 아니었다면 청주의 왜적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하루 전 기사(9월11일자)에서도 “1천 명의 승려들이 돌진하니 모든 군(軍)이 이들을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쇄미록’ 저자 오희문(1539~1613)은 “공주에 있던 승려 영규가 모집한 800의승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며 돌입하자 제군(諸軍)이 승세를 타고 수급(首級) 15과를 참획(斬獲)했다. 남은 적들은 밤을 틈타 도망쳤다”고 썼다. 눈벌전투에 참전한 유팽로(1554~1592)도 ‘월파집’에서 영규대사가 이끄는 의승 수백명이 참전하자 고경명이 하늘의 도움이라고 감탄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칠백의총’ 명칭 변경이 문화재청의 무관심에 발목을 잡힌 것과는 달리 충남 ‘홍성 의사총’은 1906년 홍주전투에서 순절한 열사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홍성 홍주의사총’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전북 ‘남원 만인의총’도 정유재란 당시 병사 이복남 휘하에서 남원성 전투에 참여해 순절한 김억명·김억호의 추가 배향을 신청하자 문화재청은 ‘여지도서’ ‘호남절의록’을 근거로 이를 허가했다.

그런데 유독 칠백의총에 관해서 문화재청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않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1500명이 모두 전사했지만 조헌의 친지와 유생들은 800명의 스님들을 뺀 채 700명만 의사(義士)라며 ‘칠백의총’으로 명명하고 조선시대 내내 이들만 추모했다. 

전략회의도. 영규대사는 14세 때 큰 범을 잡은 용맹을 지니고 있었으며, 외모는 우둔한 것 같이 보였으나, 기발한 병법을 구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헌선생과 영규대사는 그의 막료들과 다가올 결전에 대비, 참모이며 부장인 이광륜(李光輪), 임정식(任廷式), 김절(金節), 이려(李勵), 곽자방(郭自防)등과 전략을 협의하고 있는 장면이다. [문화재청]
전략회의도. 영규대사는 14세 때 큰 범을 잡은 용맹을 지니고 있었으며, 외모는 우둔한 것 같이 보였으나, 기발한 병법을 구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헌선생과 영규대사는 그의 막료들과 다가올 결전에 대비, 참모이며 부장인 이광륜(李光輪), 임정식(任廷式), 김절(金節), 이려(李勵), 곽자방(郭自防)등과 전략을 협의하고 있는 장면이다. [문화재청]

문화재청은 이곳을 사적으로 지정하고 매년 9월23일 제향을 지내고 있다. 이에 단순 사적으로만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2월2일 법보신문과의 통화에서 “‘칠백의총’이란 명칭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것”이라며 “‘칠백의총’은 보훈시설이 아닌 사적지이기에 진정성이 있는 문화재가 되기 위해선 현 명칭이 적절하다”는 입장만 되풀이 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에도 금산전투에서 피를 뿌렸던 스님들의 복권은 이뤄지지 못했다. ‘칠백의총’에선 조선의 숭유억불이 진행형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열린 칠백의총 제향행사. [문화재청]
지난해 열린 칠백의총 제향행사. [문화재청]
지난해 열린 칠백의총 제향행사. [문화재청]

의승병 추모사업을 별도로 진행하고 있는 조계종 제6교구본사 마곡사 주지 원경 스님은 “몇 해 전 ‘칠백의총’에서 초청 공문이 와서 제향 행사를 찾았다”면서 “금산전투에서 스님들이 순국한 것은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임에도 마치 조헌 선생의 문중 행사 같았다. 700의병 공적만 기리고 의승 역사는 통째로 사라졌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에 대해 이렇게 홀대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탄식했다.

매년 영규대사와 제자들을 추모해오고 있는 금산 보석사 주지 장곡 스님은 “영규대사 등 스님들은 당시 국가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선봉에 나섰지만 전투가 끝난 뒤 시신 수습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면서 “오늘날까지 조선의 유생만 우선시하고 영규대사와 의승의 고고한 희생은 냉대하고 있다. 이제라도 국가는 영규대사 등 스님들에 대해 추모를 개별 사찰에 떠맡길 것이 아니라 국가차원에서 추모하고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했다. 

충북 가산사 주지 지원 스님도 “문화재청은 의승의 공적을 외면하고 있다”면서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라도 선양함이 마땅한 데 현재에까지 나몰라라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 방기다. 이제라도 영규대사와 의승들의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칠백의총(사적). [문화재청]
칠백의총(사적). 700의총이란 이름으로 의병만 기릴 뿐, 영규대사와 800의승의 기록은 없다. [문화재청]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67호 / 2023년 2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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