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산의총(금산 칠백의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 씁쓸하네요.”
폭염 특보가 발효된 8월3일 오전 11시. 임진왜란 의승장 영규대사의 묘 앞에 선 정덕·호암·화평·성원·종봉 스님은 탄식을 터트리고 이내 한숨을 삼켰다. 내려쬐는 햇볕에 열기가 층층이 쌓여 숨이 턱 막히는 듯 했지만 조계종 중앙종회 ‘영규대사 및 800의승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 스님들은 묘 주변을 맴돌며 걸음을 쉬이 옮기지 못했다.

‘영규대사묘’(충청남도 기념물) 일대 광경은 올해 5월 둘러본 ‘금산 칠백의총’(사적)의 정돈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돌계단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수풀이 우거져 있었고, 묘소로 오르다 마주한 ‘기허당영규대사 순의실적비’는 마을 주민의 경운기 주차장(?)으로만 활용되고 있었다. 영정각엔 빗자루가 내던져 져 있는가 하면, 나무로 만든 제단에선 곰팡이가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를 뿜어댔다.



특위 스님들은 이날 영규대사 묘에 과일·청수를 올리고 반야심경을 봉독한 뒤 “이름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스님들의 역사를 바로세울 수 있게 도와달라”고 발원했다.

영규대사 묘는 ‘금산 칠백의총’의 성격을 선명히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특위 위원장 정덕 스님은 “조헌 선생의 묘소가 옥천에 있고 영규대사의 묘소가 이곳(공주)에 있다”며 “그렇다면 금산의총(칠백의총)의 성격은 청주성·금산성 전투에서 희생한 무명(無名) 의사들의 합장 유적이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칠백의총에서 조헌 선생과 700의병만 한 번 더 추모할 뿐 의승은 완전 배재하고 있다. 반쪽짜리 역사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했다.
실제 금산 칠백의총은 '무명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충절을 기리겠다'던 건립 취지와 달리, 사적지에 '중봉 조선생 일군순의비' '중봉 조헌과 칠백의사 순절 기념(한글)비' 등 조헌 선생과 700의병 관련 유물만 전시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온전한 임진왜란 역사를 반토막 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치우친 역사서술은 칠백의총기념관에서 한결 뚜렷해진다. 기념관 소장유물(175종) 가운데 80% 이상이 조헌 선생 관련 유물이다. 그러나 정작 조헌 선생의 묘는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산63-1번지에 별도로 모셔져 있고, 현재 충청북도 기념물로도 관리되고 있다.
특위 스님들은 영규대사 묘소를 내려오며 "금산의총(칠백의총)은 본래 성격에 맞도록 무명 의사들을 위한 온전한 공간이 돼야 한다"며 "금산의총이라는 공간에서 의승·의병이 양쪽 날개처럼 균형을 잡고 공존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목격한 처참한 광경은 '영규대사 묘' 뿐만 아니었다. 계룡면 행정복지센터(면 사무소) 주차장 입구에 세워진 '영규대사 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도 마찬가지였다. 높이 93㎝에 너비 43㎝의 자그마한 비석이지만, 몸체 한 가운데 파손 흔적이 뚜렷했다. 스님들은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한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1995년까지 이 비석은 전각 안에 있다가, “정려각(효자·충신 등 행적을 기르고자 세운 정각) 안에는 비석을 둘 수 없다”는 지역 인사의 근거 없는 주장으로 비석이 전각 바깥에 배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후 별다른 보호 장치 없이 도로와 주차장이 만나는 위치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가 결국 차량과 충돌하며 두 동강난 것으로 알려졌다. 시에서 뒤늦게 축구공 모형의 대형 화분을 비석 바로 앞에 세웠지만, "원래 위치로 이전하라"는 비판은 사그라 들지 않았다. 이에 다시 전각 안으로 재배치한 것으로 파악됐다. 비석은 조선 순조 13년(1813) 건립한 것으로 앞면에 ‘의병 승장영규지문(義兵 僧將靈圭之門)’이라고 기록돼 있다.

간사 호암 스님은 “청주성·금산 전투에 나선 스님들의 활약으로 호남 지역이 지켜졌고 관군이 반격할 시간적 여유도 갖게 됐는데, 공적에 비해 남아 있는 유적들이 너무 초라하다”면서 “우리 스님들 잘못도 있지만 금산의총(칠백의총)에서부터 의승 역사가 무너져 있으니 관련 유적들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대목은 마곡사 주지 원경 스님이 ‘영규대사 묘’ 일원을 정비하고자 최근 공주시와 협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후 2시 무렵 마곡사에서 만난 원경 스님은 “영규대사묘 일대를 조사하고 정비하고자 기념사업회가 노력하고 있다”며 “영규대사 선양은 우리에게 맡겨달라. 종단 차원에서는 칠백의총 명칭을 금산의총으로 바로잡고 사라진 800의승 명예를 회복하는 데 앞장서달라”고 당부했다. 사단법인 승병장영규대사기념사업회는 마곡사 주지 원경, 갑사 주지 탄공, 신원사 주지 중하, 동학사 주지 정엽, 관촉사 주지 혜광, 고산사 주지 규봉, 보석사 주지 장곡 스님 등 영규대사 관련 사찰·스님들이 결합한 단체다.


이에 따라 영규대사를 선양하는 작업은 마곡사 등 지역사찰이, 800의승 명예회복과 사적 명칭 변경(칠백의총→금산의총) 사업은 특위 스님들이 맡기로 했다. 마곡사에 앞서 찾은 갑사에서도 주지 탄공 스님이 “특위 스님들 활동을 적극 지지한다. 갑사도 정보 제공 등에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조계종 총무원도 종단 차원의 발빠른 실무 협력을 약속했다. 이날 동행한 공승관 문화부 차장은 "호국의승군 연구를 위한 예산을 수립중이며, 문화재청이 매년 9월23일 칠백의총에서 개최하는 순의제향 행사에도 불교계가 배제되지 않도록 요구하겠다"고 했다. 이경미 중앙종회 사무처 행정관도 “9월 종회가 열리기 전, 현안이 진척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특위는 오전 10시부터 5시간에 걸쳐 계룡면 행정복지센터 영규대사비, 영규대사묘, 갑사 표충원·수장고 영규대사 진영, 마곡사를 답사하고 일정을 마무리했다. 또 8월 중•하순경 한 차례 더 모임을 갖고 업무 추진 내용을 공유하기로 했다.
공주=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92호 / 2023년 8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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