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금산 칠백의총(錦山 七百義塚)’.[사진=국가유산청]](https://cdn.beopbo.com/news/photo/202504/328442_133339_3954.jpg)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의승군의 존재를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칠백의총’에 의승군 300명의 유해가 합사됐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가 발견됐다. 그동안 중봉 조헌(趙憲, 1544~1592) 선생과 의병 700명만이 묻힌 무덤이라는 일부 유림의 주장과, 의승군의 존재를 입증할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명칭변경 등에 미온적 태도를 보여온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칠백의총 명칭변경과 의승군 선양 사업 추진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주목된 사료는 임진왜란 당시 조헌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인봉 전승업(全承業, 1547~1596) 선생의 시(詩)·부(賦)·제문(祭文)·행록과 행적을 모은 유고집이다. 전승업의 10대손인 전조한(全朝漢) 선생이 문중 서고에 보관돼 있던 자료를 바탕으로 ‘인봉선생유고집’을 정리했고, 이를 전승업의 14대손인 한학자 전규호 씨가 2007년 ‘인봉전승업선생유고’라는 제목으로 국역·출간했다.
![전승업 선생의 제자 지암 남익명(男益明)이 찬술한 전승업의 행장에는 “(전승업) 선생은 곧바로 금계(錦溪, 금산)의 전장에 돌아와 동지 박정량과 같이 700명 의병의 시신과 승군 300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일기(一基)의 큰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고 명시돼 있다.[출처=인봉전승업선생유고]](https://cdn.beopbo.com/news/photo/202504/328442_133334_3219.png)
‘인봉전승업선생유고’ 118쪽에는 전승업의 제자 지암 남익명(男益明)이 찬술한 전승업의 행장이 실려 있다. 이 기록에는 “(전승업) 선생은 곧바로 금계(錦溪, 금산)의 전장에 돌아와 동지 박정량과 같이 700명 의병의 시신과 승군 300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일기(一基)의 큰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先生直還錦溪戰所 與同志朴公廷亮 收拾七百義骨及僧軍三百合爲一大塚 而祭焉]”라고 명시돼 있다.
![1734년(영조 34) 조정에서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당시, 금산을 관할했던 군수가 남익명이 찬술한 행장 내용을 발췌해 조정에 보고한 기록에는 “공[전승업]은 곧바로 금계의 전소(戰所, 전장)로 돌아와 중봉 선생의 시신을 거두어 옥천에 장사를 지내었고, 또 700명의 의골과 승병 300명의 의골을 거두어 하나의 큰 무덤에 쓰고 그곳에 제사를 지냈다”고 서술돼 있다.[출처=인봉전승업선생유고]](https://cdn.beopbo.com/news/photo/202504/328442_133335_3221.png)
또 책의 156쪽에는 1734년(영조 34) 조정에서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당시, 금산을 관할했던 군수가 남익명이 찬술한 행장 내용을 발췌해 조정에 보고한 사실도 기록돼 있다. 해당 부분에는 “공[전승업]은 곧바로 금계의 전소(戰所, 전장)로 돌아와 중봉 선생의 시신을 거두어 옥천에 장사를 지내었고, 또 700명의 의골과 승병 300명의 의골을 거두어 하나의 큰 무덤에 쓰고 그곳에 제사를 지냈다.[公直還錦溪戰所 還葬重峰於沃川地 又收拾七百義骨 僧軍三百合爲大一塚 而祭之]”라고 서술돼 있다.

이 같은 기록은 조종영 배천조씨문열공종회장 등 일부 유림이 주장해 온 “칠백의총은 조헌과 의병 700명이 묻힌 무덤이므로 현재 명칭이 타당하다”는 입장과 배치된다. 지난해 11월 8일 금산 청산회관에서 열린 ‘칠백의총 명칭변경 타당성 검토’ 용역설명회에서도 조종영 종회장은 “‘칠백의총’ 명칭은 전투 부대가 아니라 무덤에 누가 묻혔는지를 기준으로 붙여진 것”이라며 “명칭변경 논의는 후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강변했다. 이어 “새로운 사료나 중대한 사건 없이 변경을 추진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 불교계는 칠백의총에 영규대사와 의승군의 역사를 함께 복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꾸준히 제기해왔지만, 당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이를 유적종합정비사업(2012~2023) 계획에 반영하지 않았다. 2023년 2월 당시 류시영 칠백의총관리소장은 ‘조선왕조실록’ 등에 ‘칠백의총’ 명칭이 고유명사로 명시돼 있고, 의승군의 규모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명칭변경을 거부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황인규 동국대 교수는 “행정 편의주의적 발상”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번 사료에 대해 김상영 중앙승가대 명예교수는 “금산전투 후 의승들의 유해 처리에 대한 최초의 문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이 사료를 계기로 전승업 선생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물론, 칠백의총의 역사적 인식을 재정립하는 토론과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계종 문화부장 혜공 스님은 “내년에 유림과 국가유산청이 합의한 ‘칠백의총’ 내 승장사 건립을 추진할 예정”이라며 “새로운 역사적 사료가 나온 만큼 이해당사자들과도 협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한편, 인봉 전승업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중봉 조헌 선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전투 등에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헌과 함께 창의를 맹세했고 군복과 장정, 군량을 마련해 의병 활동에 앞장섰다. 청주성 전투 승전보를 조정에 전하기 위해 의주로 향하던 중 금산에서 조헌과 영규대사를 비롯한 의병과 의승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즉시 현장으로 돌아가 시신 수습을 진두지휘했다. 금산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용사 위패에는 모셔지지 않았지만,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으로 남긴 공로로 인해 이제라도 추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론된다.
박건태 기자 sky@beopbo.com
[1773호 / 2025년 4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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