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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 해인사 강주 수진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청량 화엄경’ 완역해야 내 일대사 한 가름

80화엄경의 주석서 하면 ‘통현장자의 합론(合論)’과 ‘청량(淸凉)스님의 소초(疏抄)’를 일컫는다. 거사였던 통현장자(通玄長者)의 ‘합론’이 선이 굵다면 청량 스님의 ‘소초’는 섬세하다고 한다.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합론’을, 교가에서는 ‘소초’를 선호했는데 아마도 선교가 갖는 독특한 가풍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화엄경소초』를 지은 청량 스님의 눈에 비친 『화엄경』은 어떠했을까!

“비록 텅 비고 텅 비어 자취가 끊어졌으나 진리의 하늘에는 뭇 별들이 찬연히 빛나고, 맑고 맑아서 말을 붙일 수 없으나 가르침의 바다에는 그 물결 호한(浩瀚, 넓고 크다)하기 이를 데 없다.” 

청량 스님의 마음을 꿰뚫은 것일까! 부산 해인정사 주지 수진 스님이 ‘청량 화엄경소초’ 전권 역해에 나섰다. 재가불자도 통현장자의 ‘합론’은 원력만 세우면 지금이라도 볼 수 있다. 탄허 스님이 번역과 함께 강론까지 펼친 바 있고, 그 강설집은 『신화엄경 합론 탄허 강설집』(불광출판부)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청량 스님의 『화엄경소초』는 그 번역본조차 없는 현실이다. 『화엄경』의 개략적인 주석이라 할 수 있는 ‘소’는 물론 그 ‘소’의 또 다른 주석이라 할 수 있는 ‘초’까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역해가 가능하기에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엄경소초』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수진 스님은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지상과 천상을 누비며 장대하게 설해진 경이 『화엄경』입니다. 그러한 중중무진의 『화엄경』을 청량 스님은 자신의 탁월한 상상력으로 또 다시 한없이 펼쳐 갑니다. 경전에 새겨진 부처님 말씀 한 구절과 청량 스님의 견해를 보태어 음미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말 그대로 화엄세계에서 노니는 겁니다.”

청량의 탁월한 상상력
중중무진의 화장 장엄
‘一心’ 보면 ‘원융무애’
四法十玄도 알수 있어

14세에 출가한 수진 스님이 『화엄경』을 처음 본 것은 강원에서다. 그러나 강원에서도 현담, 즉 『화엄경』 서문에 해당하는 8권만 보았을 뿐 『화엄경』의 본래면목은 맛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1977년 통현장자의 『화엄경 합론』을 한글로 번역한 탄허 스님이 이를 기념으로 『화엄경 합론』 100일 법문(강설)’을 열었다. 당시의 강설을 동국대 교수 해주 스님이 3년 동안의 각고 끝에 정리해 펴 낸 것이『신화엄경 합론 탄허 강설집』이다. 당시 오대산 수도원(월정사)에서 화엄세계가 드러난다는 소식을 접한 10대 후반의 수진 스님은 곧바로 오대산으로 향했다.

60여명의 대중이 운집했는데 스님은 워낙 나이가 어려 말석에 앉았다고 한다. 『화엄경』을 처음 접한 수진 스님은 그 때의 감흥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화엄경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대로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수많은 불보살님들이 운집하는 광경부터 부처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환희심을 내는 대중의 미소까지도 감지되는 듯했어요. 하루의 강설이 끝난 후에도 법설은 물 흐르듯 그대로 제 가슴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3개월 강설을 모두 들은 수진 스님은 마하사로 돌아와 당시 공부한 『화엄경』을 정리해 나갔다. 『화엄경』 증득을 향한 수진 스님의 첫 걸음이다.
1981년 금산사에서 열린 화엄학림에 30여명의 학인이 모였다. 그런데 교재가 또 『화엄경 합론』이었다. 이에 수진 스님은 청량 스님의 『화엄경소초』를 교재로 택하자고 청했다. 이유인 즉, 청량 스님의 『화엄경소초』가 비록 방대하고 어렵다 하지만 기왕에 원력을 세워 공부할 것이라면 남들이 잘 하지 않는 교재를 한 번 독파해 보자는 것이다. 마치 산을 오르는 사람이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해 가는 것처럼 말이다. 3년간의 여정에서 80화엄경 중 60권, 10지품까지 끝냈다. 『화엄경』은 ‘10지 품’까지가 어렵지 이후는 독학으로도 가능하다고 한다.

화엄산림에서 내려온 스님은 1984년 곧바로 선방으로 발을 돌렸다. 왜일까!
“호랑이 뿔 때문입니다.”
출가 직후부터 장자, 사서삼경 등 동양철학은 물론이고 범어사, 해인사 강원 등에서 10년 동안 대 강백의 가르침 아래 공부에만 진력한 스님이 갑자기 경을 내려놓고 걸망 하나 멘 채 선문을 연 것이다. 한 참 공부에 맛을 들일 때 은사 문성 스님이 뜬금없는 질문을 하셨다.
“호랑이가 참 무섭지?” “무섭지요!” “그 호랑이에 뿔까지 나면 어떨까?” “더 무섭습니다.”

순간, 무릎을 탁 쳤다. 교(敎)에 정통하면 호랑이지만 여기에 선(禪)까지 겸비하면 뿔까지 가진 선지식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긴 물음이었던 것이다. 두 말 없이 스님은 교를 통찰한 후 선에 들어가 수행한다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선택했다. 그런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길을 선택한 배경 하나가 또 있다.

“강원서 공부할 때 선어록도 봅니다. 고구정녕 촌철살인의 한마디 한마디를 접하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경 던지고 좌복에 앉아 있고 싶을 정도로 속에서 불이 납니다. 금방이라도 깨칠 것 같거든요. 그러나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게 착각입니다. 의기만 있으면 선병만 불러요. 꾹꾹 눌러야 합니다. 나름대로 불교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명철하게 세워야 해요. 불교기본 교리부터 연기, 중도, 공, 누가 물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근기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불교철학(소양)을 초석으로 단단히 다져 놓고 선 수행에 들어가야 소식이 빠릅니다.”

김천 수도암을 시작으로 봉암사, 통도사, 쌍계사 등의 제방선원에서 10년간 16안거를 성만했다. 해제 때는 금산사 화엄산림에서 다 보지 못한 10지품 이후 20권의 『화엄경』을 독파해 갔다. 선방서 내려 온 스님은 1993년 해인사에서 7년간의 강주 소님을 맡으며 후학을 양성했다. 

부산 해인정사 불사까지 회향한 스님은 2006년 1월 10일 다시 『화엄경』을 펼치며 청량 스님의 『화엄경소초』를 10년에 걸쳐 역해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현재 30권까지 마치고 31권을 집필 중이니, 약 50권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청량소초를 택한 것일까?
“청량 화엄경소초는 점점 잊혀져 갑니다. 아니 이미 사장됐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원각경』 예를 들어 볼까요? 보통 원각경 공부한다 하면 함허 스님의 소만 봅니다. 물론 그 소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규봉 선사의 원각경 소초는 번역조차 되어 있지 않을까요? 대승기신론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도 대부분 원효 스님 것만 보려 합니다. 왜 현수(賢首)의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는 보지 않습니까? 승가든 재가든 학자로서의 길을 걷는 다면 방대하고 어렵다는 이유로 경전의 논서를 소홀히 하지 않았나 돌아봐야 합니다.”

수진 스님은 이 『화엄경소초』를 완역해 세상에 내 놓아야 자신의 일대사를 한 번 가름할 수 있다고 한다. “밥값 하는 겁니다. 부처님 은혜, 스승의 은혜, 시주의 은혜를 이것으로나마 조금이라도 갚아 보려는 마음 하나 뿐 입니다.” 
10년의 선 수행 후 다시 경전을 펼쳐 보니 역시 남다르다고 한다. 옛 스승들은 한결같이 선을 닦은 후에 반드시 경을 보라 했다.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여럿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수행 전의 부처님 말씀과 수행 후의 부처님 말씀이 다시 들린다고 한다.
 
“죽었던 고기가 다시 살아나는 듯합니다. 그 전에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화엄의 정취가 느껴집니다. 선교를 겸하라는 선지식 분들의 말씀은 맞습니다. 부처님과 공자 말씀은 모두 다 가르침이지만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고 봅니다. 공자 말씀은 상식 선에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상식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체험을 한 후 설해 놓은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정도는 아니어도 비슷한 길이라도 걸어봐야 불법(佛法)을 좀 더 가슴 깊이 체득할 수 있습니다.”

역해도 번역이 있어야 가능한데, 다른 사람의 글을 번역할 때는 적어도 원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해야만 한다. 더욱이 주석까지 완벽하게 번역하려면 원저자의 사상까지도 명철하게 파악해야 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사상뿐만 아닙니다. 그 사람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제야 청량 스님의 집필 모습이 그려집니다. 지금 10주론에서 범행품으로 들어갔는데 이 경전을 번역하며 소초를 지을 당시 청량 스님의 책상에 어떤 경전이 놓여 있는지 확연하게 그려집니다. 지금 스님의 책상에는 열반경과 유마경이 놓여 있습니다. 이 경을 언제까지 보고 계실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화엄경소초』에 동원된 인용문에는 대소승의 모든 경론이 망라돼 있다. 법화경, 열반경, 금강경, 해심밀경, 보살본업경 등의 대승경전은 물론 성유식론, 대지도론, 섭대승론, 유가지사론, 중론, 아비달마구사론 등이 수시로 등장한다. 여기에 노자, 장자, 논어, 주역, 시경 등의 외전도 인용된다. 『화엄경소초』를 보는 데 있어 이러한 참고 경전 보기를 꺼린다면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 수진 스님은 그러한 경전 하나하나도 찾아보는 게 흥미롭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청량 스님과 함 몸이 되어 소초를 다시 써 간다는 말이다. 1000여년의 시공을 넘나드는 것이다.

『화엄경』에 밝은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다.『화엄경』에서 말하는 사법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법계는 사(事)법계와 이(理)법계, 그리고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인데 왜 이사무애에서 끝나지 않고 사사무애일까?
“걸림 없는 게 무애인데 말은 쉽지만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는 또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사를 물질적, 이를 정신적이라 하면 이사무애는 정신과 물질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겁니다. 조화롭다는 것은 이미 자체적으로 걸림이 없는 것이니 이것으로 된 겁니다. 그러나 다시 사사무애입니다. 정신이랄 것도 물질이라 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꽃은 꽃대로, 불은 불 그대로 자유롭다는 겁니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그 다리를 짧게 하면 안 되고, 뱁새 다리 짧다고 길게 하면 안 됩니다. 학의 다리는 뱁새 다리에 비해 길 뿐이고, 뱁새 다리는 학의 다리 비해 짧을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다 자유롭고 장애가 없는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사무애에서는 ‘이’나 ‘사’는 절대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냥 그 자체일 뿐입니다.”

현 강원서도 잘 안 봐
번역하지 않으면 사장
10년 대 장정 불사
80권 중 30권 마쳐

 
청량 스님의 ‘화엄경소초’를 역해하고 있는 수진 스님은 현재 80권 중 30권을 마쳤다.

수진 스님은 사법계를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육상원융(六相圓融)으로 들어갔다. 이도 어렵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무애, 원융 다 같은 말이라는 점에 착안해 보라 했다.
“무애해야 원융하고, 원융해야 무애합니다. 『화엄경』에 ‘일체무애 일도출생(一切無碍 一道出生死,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일도출생사’ 하려면 ‘일체무애’ 하라는 말입니다. 원융, 무애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수진 스님은 『화엄경』을 말하며 일심(一心)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일심도 ‘마음’하나면 충분한데 확실하게, 의심하지 말라고 ‘일(一)’을 넣은 것이라 했다. 어쩌면 ‘사사무애’도 ‘사무애’하면 그만인 것을 굳이 ‘사사무애’라 한 것은 ‘확실함’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일심을 간파하면 원융무애를 체득해 사사무애 경지를 맛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쯤이면 10현연기도 알 수 있으리라.

『화엄경』에서는 ‘커다란 가르침의 그물을 펴서, 세상과 천상의 고기를 건진다’고 했다. 원효 스님도 자주 애용한 말씀인데 이는 다시 말하면 『화엄경』이라는 그물을 펴야 세상과 천상의 사표가 될 만한 인재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경전 중의 경전이 『화엄경』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통 선지식들은 아함, 유식, 반야 공부를 한 후 『화엄경』을 보라 권한다. 화룡점정의 『화엄경』 공부에 청량 스님의 소초까지 접할 수 있다면 복중의 큰 복일 것이다.

봄바람 한 점이 방안으로 들어와 수진 스님이 펴 놓은 『화엄경』에 닿자, 책 한 쪽(페이지)이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 때 『화엄경소초』를 역해 하려는 수진 스님의 원도 읽을 수 있었다. 고독한 산(山) 사람의 길을 걸으려는 것이다. 누구도 택하지 않은 길을 걸어 수미산 정상에 오르려 하고 있다. 수미산 가는 길에 새 이정표를 세워 대중들로 하여금 기존의 『화엄경』보다 더 장엄한 화장세계로 안내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대작불사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수진 스님은

현재 해인정사 주지. 1971년 부산 마하사에서 문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 범어사 강원을 졸업한 후 금산사 화엄학림을 이수했다. 1984년 김천 수도암 안거를 시작으로 봉암사, 통도사 등 제방선원에서 10년간 수행에 매진한 후 1993년부터 해인사 강원 강주를 7년간 맡아 후학을 양성했다. 조계종 11대 중앙종회 의원, 조계종 교육위원, 교재편찬위원, 전국승가대학 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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