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가 어려울 때도 은사 스님이 계셨고 종단이 어려울 때도 스님이 계셨습니다.”
동고당 문성대종사의 독립유공자 추서를 위해 앞장서 온 스님의 상좌이며 부산 해인정사 주지 수진 스님은 8월24일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회고했다.
수진 스님은 “은사 스님께서는 일제강점기 출가자의 신분으로 나라의 독립을 발원하며 항일 운동을 이끄신 실천적 수행자”라며 “또한 100세에 가까운 고령에도 좌선과 울력, 포행, 오후 불식 등 젊은 수행자도 쉽게 따르지 못하는 정진력을 보여주시며 평생 무욕의 청정 비구로 보현행을 실천하신 분”이라고 전했다.
이어 “스님의 반일운동, 항일 운동의 기록이 인정되어 늦게나마 국가유공자로 추서되신 만큼 스님의 생애와 가르침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추모와 선양 활동에 더욱 매진할 것”이라며 “무엇보다 은사 스님의 독립유공자 추서를 계기로 일제강점기 항일 불교의 역사를 정립하고 위상을 공고히 세우는 활동에 불교계가 적극적으로 앞장서 주길 바란다”고 발원했다.
해인사 강주를 지냈으며 현재 조계종 고시위원장, 동명대 석좌교수인 수진 스님은 1971년 13세의 나이로 문성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던 부산 마하사에서 출가했다. 당시 문성 스님은 75세의 나이에 조계종 감찰원장을 지내고 있었으며 1972년에는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추진하는 중추적인 역할도 담당했다. 수진 스님은 출가 후부터 1997년 문성 스님이 원적에 들기까지 25년 동안 스님을 가까이에서 모셨고 95세 때인 1992년에는 스님의 구술을 녹취해 한국불교의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는 역할을 담당했다.
문성 스님의 원적 이후에는 매년 추모재를 봉행하며 은사 스님과 관련된 기록을 수집해 온 스님은 2016년 7월2일 부산 동명대 동명관에서 ‘제1회 문성 대종사를 기리는 학술 세미나’를 개최해 스님의 애국, 애종심을 재조명한 바 있다. 스님은 그동안의 자료를 취합해 지난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추서를 요청했고 신청 1년 만에 추서 공문을 받을 수 있었다.

“은사 스님께서 항일 운동을 하시던 시기에 ‘하라’라는 이름의 일본 경찰 간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하라, 내가 내 나라 독립하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이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또렷한 음성으로 회고해 주셨습니다. 당시 그 경찰에게 직접 하신 말씀인지 상징적으로 하신 말씀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 말씀이 많은 독립운동가에게 회자되었고 힘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수진 스님은 문성 스님의 강직함이 해방 이후에도 지속됐음을 강조했다. “노사께서는 옥천사 주지를 지내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종군 포교사로 철원의 전쟁터에 나가 군인들에게 호신불을 목에 걸어주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전쟁 상황에서 수행자가 해야 할 역할을 직접 실천하셨다”며 “최초 군법당인 도원사가 만들어진 것도 스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또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의 회복과 발전을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셨다”며 “1954년 옥천학원 설립허가를 신청하며 중학교 건립을 추진했으나 허가 반려로 인해 그 꿈은 이루지 못하셨지만 의지 만큼은 확고하셨다”고 언급했다.
“은사 스님께서 정화 직후인 1962년부터 1974년까지 10년 넘게 불교계 사법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감찰원장에 재직하신 것도 일제 잔재의 대처 친일승려 정리를 위함”이라고 밝힌 스님은 “추후 포상전수 일정 등이 결정되면 은사 스님의 가르침을 알리고 추모하는 법석을 마련해 청빈하고 올곧은 수행자의 삶과 사상을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1646호 / 2022년 8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