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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50. 학교

기자명 법보신문

1906년 5월 8일 개교한 동국대 전신 ‘명진학교’

자비·수선 교훈 … 한용운·권상로 등 배출
불교학은 물론 종교학·농업·생물도 교육

 

 
명진학교가 문을 연 동대문 밖 원흥사 전경. 현재 창신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한국불교100년

불교교육은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강원 교육이 바로 그것이고, 사찰에서의 법문이 또한 재가불자들을 위한 교육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정규교육과정에 해당하는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나선 것은 일제강점기를 앞두고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아 이뤄지게 됐다.

1876년 개항 이후 서구 문명과 문물이 들어오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일본불교 역시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상륙했다. 특히 일본 정토종은 1898년 경성에 교회소를 설치하고 교세 확장에 주력하면서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일본 정토종의 개교사였던 히로야시 싱쓰이는 1902년 원흥사 창건식 축사에서 “불법 중흥은 가람의 건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 발전에 있다. 지식을 발전시키려면 먼저 승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성문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고 경성에 불교학교를 세워 승려를 교육시켜야 한다”면서 불교계의 학교설립과 근대식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때 이미 일본 정토종의 종지가 한국불교의 전통과 흡사하다고 여긴 화계사 홍월초, 봉원사 이보담 등은 정토종 개교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불교연구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6년 2월 5일 불교연구회 총무 이보담을 비롯해 홍월초, 월해 등 승려 9명이 학교를 세우겠다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신학문을 연구하는 단체인 불교연구회가 운영하는 신식학교 개교 설립을 청원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불교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敎)’의 태동이었다. 그리고 내부(당시 정부) 또한 이 청원을 승인함에 따라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을 개발해 자비와 수선에 힘쓰겠다는 취지를 받아들였다.

2년 과정에 학년별 35명 정원

이에 따라 1906년 2월 19일자로 학교의 설립인가가 났으며, 이는 곧 학교설립의 주체인 불교연구회를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당시 불교연구회는 “원흥사에 근대학문의 기초를 교육시키는 보통과 학교를 설립하겠다”는 허가원을 정부에 제출해 인가를 받았으며, 1906년 3월 25일(음력 3월 1일)부터 서울 인근 사찰의 청년승려들을 모집해 수업을 시작했다.

원흥사에서 명진학교 개교를 주도한 운영진은 4월 10일 전국 주요 사찰에 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한편 학생들을 보내달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그리고 5월 8일에 드디어 정식으로 명진학교를 개교했다. 당시 입학생들은 대부분 30~40대의 학생들로, 강원의 대교과 과정을 마친 고급인재들이었으며 원흥사에 기숙하면서 불교와 신학문을 배웠다.

당시 명진학교와 관련 「황성신문」은 1906년 7월 3일자 보도에서 “문명의 세계에 즈음하여 승려들을 교육하기 위해 명진학교를 설립했는데 학생이 100여명에 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명진학교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활발하지 못해 관련 자료가 미흡한 상황이고, 때문에 당시 학교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명진학교를 최초로 연구한 학자로 알려진 남도영이 「구한말의 명진학교」라는 연구보고서를 남겨 그 일면을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1907년 8월 17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명진학교 설립 취지서. 사진=한국불교100년

「구한말의 명진학교」에 따르면 학교의 교훈은 ‘자비(慈悲)·수선(修善)’이었으며, 교육목적 또한 “종승(宗乘), 여승(餘乘), 신학문을 교육시켜 승려의 고덕(高德)을 증대하고 포교 전도의 인재를 양성한다”고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 또 학교의 수업연한은 2년이며, 1년은 2학기로 운영됐다. 이때 학기는 3월~6월, 9월~12월을 각각 한 학기로 정해 지금의 학기제와 흡사했다.

그리고 명진학교의 학년별 정원은 35명이었으며 특별하게 학과를 준비하는 정원 20명의 보조과를 두기도 했다. 또한 입학자격은 13세에서 30세로 대교과 수료자 또는 중법산 추천자로 제한했다. 다만 보조과에 한해서는 사교과 수료 증명자의 입학을 허락했다. 그러나 실제 입학생들의 나이가 30세 이상이 주류를 이뤘던 점을 감안할 때 나이 제한은 원칙과 달리 자유로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명진학교의 특별한 점은 역시 교육과목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불교학교라는 특성에 맞게 불교학은 물론 신학문을 대거 교과목으로 채택한 것. 『삼부경』, 『범망경』, 『능가경』, 『화엄경』, 『열반경』, 『전등록』, 법계관문, 염송 및 설화, 포교법, 매일 2시간의 참선과 근행 등 불교과목은 물론이고 다양한 신학문이 교과목으로 등재돼 있다.

종교학, 종교사, 산술, 역사 및 지리, 생물, 주산, 농업초보, 일어, 체조, 측량, 법제대요, 철학 및 철학사, 경제대요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보조과에서는 측량학, 일어를 가르치고 역시 매일 2시간씩 참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종단이나 교단에 의지하지 않은 명진학교는 재정이 미약하고 불교계의 후원이 부족함에 따라 운영상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또 명진학교를 설립한 불교연구회가 초기에 일본불교 정토종과 관련돼 친일의혹을 산 것도 불교계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이어 교장이 비불교계 인사로 바뀌면서 오히려 관심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했고 결국 학교 운영권은 1908년 3월 6일 등장한 원종 종무원으로 넘어갔다.

이어 1908년 12월에는 명진학교 부설 명진측량강습소가 설립됐고, 1909년 2월 1일에는 수업연한을 3년으로 조정했다. 하지만 학교는 강사가 퇴임하고 학생들이 줄어들면서 1910년 4월 간판을 내려야만 했다.

명진학교는 1906년 개교한 이래 1910년 문을 닫을 때까지 4년 동안 2회에 걸쳐 모두 1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 중 가장 크게 주목받은 인물은 바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만해 스님이다. 그리고 초대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권상로와 식민지 말기 종무총장을 지내고 해방 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낸 이종욱 등도 명진학교 졸업생이다.

지방 20여 곳에 보통학교 설립

이들 세 사람 이외에 첫 번째 졸업생으로는 강용선, 안진호, 최용식, 강대련, 김선은, 임해운, 최환허 등이 있고 2회 졸업생으로 김환응, 박보봉, 이운파, 이설월, 김남파, 서진하, 김상숙 등이 있다.

불교학은 물론 근대적 지식까지 두루 갖춘 졸업생들은 대부분 일제시기 본사 주지를 지냈거나 강원의 강사로 활동한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항일운동의 대표주자였던 만해가 있었는가 하면 친일학승의 대표주자인 권상로 등이 있었던 것처럼 행보는 저마다 엇갈렸다.

한편 명진학교를 설립한 불교연구회는 곧 이어 학교 설립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명진학교 분교 설치에 주력했다. 이와 관련 「대한매일신보」1906년 5월 27일자는 “불교연구회에서 명진학교의 개교에 이어 전국 13도 유명사찰에도 학교를 설립하도록 촉구했다.

 
사립불교사범학교 교전.

전국 각처의 학교설립은 불교의 근대화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일면 사찰의 재산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다”고 보도해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에 따라 합천 해인사에 명립학교, 동래 범어사 명정학교, 고성 건봉사 봉명학교, 수원 용주사 명화학교 등이 1906년에 설립됐다. 이어 1907년에는 전주 봉익학교, 경상북도 경흥학교 등이 세워졌고 1909년에 신명학교와 송광사 보명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렇게 지방에서 문을 연 보통학교가 20여 곳에 달했고 서울 인근 양주 흥국사, 성사, 봉선사 등 3개 사찰에서는 따로이 명진학교를 운영하며 지역 스님들과 신도의 자제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이들 보통학교에서는 명진학교에서처럼 신학문을 수용해 교육한 것은 물론, 스님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자료에 따르면 1910년대 말까지 28개의 전문학교와 보통학교를 설립했고, 1917년 당시 30

본산 본말사 지방학림을 비롯해 불교전문학교, 보통학교 학생수가 무려 1054명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불교계에 일었던 근대화 교육 바람이 결코 미풍 수준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불교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명진학교는 1906년 5월 공식 개교해 1910년 4월 문을 닫았으나 학교의 운명이 여기서 끝나지는 않았다.

명진학교는 1910년 이름을 바꿔 불교사범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고, 불교사범학교는 3년 과정 사범과와 1년 과정 수의과(隨意科)로 구성됐다. 그리고 교과과목 역시 일어, 측량, 토목, 산술 등의 신학문을 포함해 명진학교의 교과목을 상당부분 수용했다. 불교사범학교는 이어 1914년에 또다시 불교고등학교로 개명했고, 1915년에는 중앙학림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지속적으로 운영됐다. 하지만 1922년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에 이르렀다.

3·1운동 주도 이유로 폐교되기도

명진학교는 중앙학림까지 이어지던 중 강제로 폐교되면서 명맥이 끊기는 듯 했으나, 1928년 불교전수학교로 다시 문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1930년에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됐다.

그리고 1940년에 혜화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해방 후인 1946년 동국대학으로 승격하고 초대 학장에 허윤이 취임했다. 이후 1953년 드디어 종합대학 동국대학교로 개편했고, 1978년에는 경주에 분교를 설치해 오늘날의 동국대학교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명진학교는 그 설립주체인 불교연구회가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받아 태동되기는 했으나, 불교계가 운영 주체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들을 배출한 불교인재양성 기관이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오늘날에는 조계종에만 11개 학교법인에 동국대학교를 포함해 25개의 초·중·고등학교 및 대학교가 있다. 그리고 천태종과 진각종, 총지종에서도 학교를 운영하며 불교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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