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세음보살은 눈이 없다. 신비로운 이야기는 여기서 깨어났다.
강진 무위사 주지스님은 곤혹스러웠다. 완공된 극락보전에 벽화가 없어 못내 아쉬웠다. 마침 사찰을 찾았다가 자초지종을 알게 된 노스님이 일렀다. “그 벽화 내가 그릴 테니 49일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게나.” 노스님은 한 달이 지나도 법당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었다. 궁금했던 주지스님은 48일째 일을 그르쳤다. 문틈으로 몰래 안을 엿봤다. 노스님은 온데간데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세필을 입에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인기척에 파랑새는 사라졌다. 점안만 남겨두고….
경기 무형문화재 제57호 지정
2015년 11월20일에 지정 고시
산청 목화시배지 비각 단청한
김한옥 선생 작업 보며 흠모
수차례 애원 편지 17세 입문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고 덕문 스님 문하서 불화 공부
국내서 유일하게 황금탱화 그려
300여 사찰 8000여폭 불화 조성
화마 입은 낙산사에 33관음 시주
전설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 후불탱화 아미타여래삼존불도(국보 제313호)에서 관세음보살 눈만 스러지고 없다. 후불탱화 뒷벽에 그려진 벽화에 전설이 새겨져 있다. 백의수월관음도에 선재동자 대신 노스님과 그 어깨 위에 새 한 마리 앉았다.
왜 하필 관음보살이고 노스님이자 파랑새일까. 금초(錦草) 이연욱(62, 무진) 불화장(佛畵匠)에겐 화두다.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붓 끝에 서린 신심이 부처님과 제불보살 그릴 때 드는 정성에 사심 끼어선 안 된다는 경책이리라.
“불화는 부처님 성화(聖畵)에요. 예배대상이자 마음의 안식처가 되지요. 생계와 연관됐다고 사심에 얽매이면 어긋나기 마련입니다. 삿된 마음으로 하는 붓질은 안 될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108배하고 관음기도로 하루를 연다. 늘 다투는 두 가지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서다. 마음은 불보살 한 분 덜 그리고 끝낼까 하는 나태함과 부처님 그리는 화공의 정성 사이에서 줄다리기한다. 습관처럼 익은 기도는 화공 쪽으로 기울게 돕는 부처님 가피다. 세상에서 제일 그리기 어려운 부처님 상호는 제일 마지막에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소중하게 다뤄야 할 부분인 만큼 마지막에 정성 들여 기도하고 지극한 마음이 채워질 때 붓질한다. 불모의 붓질하는 마음, 어쩌면 필연일지 모른다.
아버지 영향이 컸다. 신심 돈독한 분이었다. 그는 고향 경남 산청에서 매일 관세음보살 염하는 아버지 기도소리를 듣고 자랐다. 새벽 3시30분이면 정화수 떠놓고 아버지가 염하던 관세음보살은 파랑새(행복의 길)였다.
그는 시골서 먹고 사는 길 찾기보다 마음 끌리는 일을 찾고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1972년 김한옥(단청전문위원) 선생이 산청 문익점 목화시배지 비각 단청을 하러 왔다. 색이 알록달록 예쁘고 좋았다. 그림에 소질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마침 김한옥 선생은 똘똘한 심부름꾼이 필요했던 차였다. 17세, 아직 스물도 안 된 청년은 포부가 컸다. 심부름꾼에 만족하지 않았다. 나중에 부르겠다며 서울로 떠난 김한옥 선생에게 석 달 동안 연락이 없자 서신을 띄워 애원했고 답신이 왔다.
“처음엔 단청도 불화처럼 그림인 줄 알았지요. 해보니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이거 하러 온 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나중엔 가겠다는 말까지 했죠. 선생은 단청부터 배우고 불화를 하라고 타이르셨습니다.”

불화장은 불화를 제작하는 장인이다. 예전에는 스님들이 단청장으로서 모든 일을 관장했기에 금어(金魚)나 화승(畵僧), 화사(畵師) 등으로 불렸다. 한동안 불화는 단청장 보유자에 의해 전승됐다. 그러나 종목 특성상 2006년부터 단일종목으로 분리돼 불화장이 지정됐다.
불화 인연은 서울 조계사에서부터 시작됐다. 1974년 김한옥 선생이 조계사 단청을 맡았고, 벽화는 고 조정우(대구 무형문화재 제14호 단청장) 선생이 그렸다. 그때부터 조정우 선생 아래서 벽화 골재를 시작으로 습화(習畵, 그림 연습)를 하게 됐다. 1977년 여름엔 강원도 월정사에서 적광전 후불탱화를 작업한 조정우 선생을 모시고 두 달 동안 탱화 채색을 배웠다.
제불보살 옷 주름, 손가락, 눈썹, 발가락 등 선 하나 그리기도 어려웠다.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관음기도하면서 불화 습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낮에는 단청하거나 탱화 채색을 했다. 밤에는 습화했다. 단청 공사 현장은 항상 여러 명이 함께 자야 했다. 방이 좁아 습화지 한 장 펼칠 공간이 없었다. 마루나 산신각, 지하실 등 공간이 있는 곳이면 종이를 폈고 초(밑그림)를 그렸다. 잠도 물렸다. 시간이 아까웠다. 10년 동안 두세 시간만 잤다. 시왕초가 통과되면 보살초 이어서 사천왕, 금강역사, 신중초, 부처님초는 물론 용, 봉, 학, 호랑이, 비천상, 사신도 등 불화에 들어가는 전통문양 모두를 섭렵해야 했다. 안 보고 시왕초를 그릴 정도가 돼야 비로소 보살초로 넘어갔다.
“반 미쳐서 했어요. 꿈속에 그림이 나왔습니다. 관음보살이 나타나 그림을 펼쳐 보여주기도 하고, 잠 깨면 그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마음속 부처님을 꺼낼 정도 내공이 여물어 갔다.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고 덕문 스님 문하에 입문했다. 당대 만봉 스님 등 세 분이 함께 단청장으로 지정됐다. 덕문 스님은 엄격하게 가르쳤다. 5년 동안 불화를 배웠다. 막 전수를 끝냈을 때 스승은 입적했다. 노년에는 순금 바탕에 관음도, 달마도, 산수도를 많이 그렸던 스승이었다. 황금 바탕에 산수도를 그렸는데 탱화 전체 면에 순금을 붙이고 그리지는 않으셨다. 여쭈니 한 소리 들었다. “어떻게 순금을 붙이고 탱화를 그리냐”는 꾸지람이었다. 의구심이 들었다. 순금 바탕에 불화를 그리는 방법을 연구했다. 전통불화 단청기법에 생채색 기법과 고분채색 기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부분적으로 적용된 옛 탱화를 유심히 관찰하며 연구했다.

그는 스승이 남겨둔 부분을 채웠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황금탱화를 그렸다. 15년을 연구해 독창적으로 고안한 기법이었다. 검은 바탕에 금선으로 그리는 먹탱화, 붉은 바탕에 금선으로 그리는 홍탱화 등 전통탱화와 달랐다. 그림에 옻칠하고 순금 위에 채색을 해서 불화를 조성했다. 장신구나 문양 등 주요 부분을 볼록하게 처리해 금을 붙였다. ‘고분(高粉) 살붙임’ 방식으로 2005년 특허를 받은 기법이다. 은은하지만 화려하고, 보는 각도와 조명에 따라 색이 다채로워지는 탱화가 탄생한 것이다. 황금탱화로 제14회 불교미술대전 우수상을 받았다.
“어느 사찰에서 보살님 한 분이 입고 온 옷에 방울방울 맺힌 장식물을 봤습니다.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지요.”
황금탱화뿐만 아니다. 그는 경전을 읽을 때 환희로운 장면이 그대로 초로 떠오를 경지에 다다랐다. ‘법화경’ 중 ‘견보탑품’을 읽고 부처님 앞에서 솟아오른 칠보탑과 다보불, 하늘에 꽃비가 내리고 일체중생이 이를 찬탄하는 그림을 그렸다. ‘법화경 견보탑품 허공회도’다. 진심 담아 그린 불화는 깊은 울림을 자아냈다. 꼭 한 점만 그린 ‘원광관음도’는 불화를 바라보며 한참 눈물 흘리던 한 보살이 모셔갔다.
쓰임도 많아졌다. 초본 없이 목탄으로 밑그림 그리고 먹선을 직접 그어야 작업 가능한 사찰벽화도 수없이 그렸다. 훼손된 탱화를 보수하는 일도 그의 몫이 됐다. 전통을 지켜나가야 하는 현장에는 그가 있어야 했다. 그렇게 전국 300여 사찰에 그려진 불화 8000여폭이 그의 붓질에서 조성됐다.
늘 관음보살에 귀의하는 그에게 낙산사 화마는 기이한 불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깊어진 시름 탓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관음보살을 친견했다. 수많은 관음보살이 낙산사로 내려오고 있었다. 33황금 관음도를 그렸다. 허전했다. 시자인 남순동자를 각각 다른 모습으로 옆에 그렸다. 그제야 관음보살이 미소 지었다. 그 가운데 ‘황금 합리관음도’는 너무도 자애로운 미소를 보였다. 애초 발원대로 낙산사에 시주했고 의상기념관에서 ‘관음미소’가 대중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도 불화 그릴때면 새벽마다 관음보살을 간절히 찾는다. 그는 노스님일까 파랑새일까. 중요하지 않다. 둘일 까닭 없다.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관세음보살 점안은 아직이다. 이연욱은 2015년 11월20일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7호 불화장으로 지정됐다.
“아직이죠, 아직. 붓 끝에 절대신심 맺혀야 진짜 불화장입니다.”
천년 묵은 전설이 살아 꿈틀대기 시작했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40여년 필법·채색으로 국보 탱화 모사
장인 손길 닿은 작품
천연안료까지 그대로 복원
특허 낸 황금탱화는 독보적
이연욱 불화장은 국보 탱화를 모사할 때 안료까지 그대로 복원한다. 밑그림은 물론 당시 화학안료가 없었던 점을 감안해 자연안료를 고집한다.

국보 제296호 안성 칠장사 오불회괘불탱을 모사할 땐 열과 성을 다했다. 경면주사 등 안료만 한 달 동안 직접 갈았다.
경면주사란 붉은 색을 띠는 지하광물질이다. 수은광석에 비견되는 희귀한 물질이다. 인체에 유익한 기가 발산되는 걸로 알려져 예부터 유용하게 이용됐다. 고급 한약재는 물론 정신질환자 및 아기들 치유나 단청에 쓰였다. 질이 매우 우수해 순금 가격과 비슷하다. 화학안료와 달리 자연안료는 돌을 갈아서 낸 석채로 색을 낸다. 쑥색은 부처님 심폐쪽 색으로 쓰이고 바닷가에서 난 흙으로도 색을 내 쓴다. 작업실 겸 전시실인 경기도 화성시 불미원에는 전국을 다니며 구한 돌과 흙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어렵게 작업한 만큼 보람도 크다.

칠장사 오불회괘불탱은 화원 법형 스님이 그렸다. 상단은 비로자나삼신불좌상, 중단은 약사불좌상·아미타불좌상·미륵보살입상, 하단은 도솔천궁 좌·우로 정면 관음보살좌상과 측면 지장보살좌상이 배치됐다. 최하단부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궁에서 빨리 지상에 강림하기를 염원하는 듯한 대중이 있다. 이 구도는 부처님 진리의 영원성과 이를 통한 구원을 상징한다. 그래서 뜻 깊은 작품이다.

불화를 그리는 불화소가 있던 남양주 흥국사의 현왕탱 모사도 빼놓을 수 없다. 빼어난 작품인 만큼 40여년 필력과 채색기법이 동원됐다. 불화장이 동경해 마지않는 고려불화 중 교토 조코지(淨敎寺) 소장 아미타팔대보살도를 모사한 작품은 국내서 유일하게 그만 그릴 수 있는 황금탱화 방식으로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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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2호 / 2016년 5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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