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이 지령 500호에 이른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 동안 어려움도 많았겠고 우여곡절이 없을 리 없는데, 척박한 여건을 딛고 교계의, 또 나아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신문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기까지 이끌고 온 이들과 밀어 준 독자들 모두에게 경하의 말씀을 드린다. 한 때 객원논설위원으로 〈법보신문〉 시평을 격주로 기고한 적이 있었다. 청탁을 받고 첫 글을 실을 때만 해도 〈법보신문〉을 과연 몇 사람이 구독하며 내 글을 누가 꼼꼼히 읽기나 하랴 하고 솔직히 좀 가벼운 심경으로 임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정을 모르는 경솔한 태도였다는 것이 금방 판명되었다. 여기저기서 글 읽었다는 인사가 쏟아졌다. 평소 불교와 인연이 없는 듯해서 〈법보신문〉을 접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학교의 선배,
"새롭게 일어서는 불교 구현 위해 제2의 창간 자세로 임할 터" 88년 5월16일 설레이는 가슴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법보신문〉이 어언 10년의 성상을 넘어서 지령 500호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무량겁의 절대 경지를 말하는 불교적 시간관(時間觀)에 견주어 볼 때 500이라는 숫자는 한낱 티끌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심이란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이어서 지령 500호의 신문을 발간함에 이르러 독자님들께 다시 한번 자축과 다짐의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령 500호에 이르기까지 〈법보신문〉이 걸어온 발자취는 영욕과 희비, 좌절과 희망이 점철되었던 지난 10여년의 우리 불교사에 다름아니었습니다. 육군 17사단 훼불사건에서 보았듯이 정법을 훼손하는 무리
"시시비비 명쾌하게 가리는 정론지 명성 이어가길" -고산 스님(조계종 총무원장) 〈법보신문〉 지령 500호를 축하드립니다. 열악한 교계의 언론환경 속을 꾸준히 걸어온 〈법보신문〉의 모든 가족들을 향해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법보신문〉이 처음 창간되던 때 〈법보신문〉에 거는 교계의 관심과 기대는 자못 큰 것이었습니다. 그 관심과 기대에 `법보'는 비교적 충실히 답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불편부당하면서도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는 정론지가 되고자 애쓰던 노력들이 그것입니다. 〈법보신문〉은 포교지로서도 많은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독자를 진리로 안내하고, 신심을 중장시키는 교량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법보신문〉을 펼치면 산사의 향기가 퍼지고, 정진 납자들의 날선 구도의
불교언론을 죽이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요즘같은 태평성시에 그 무슨 망발이냐고 눈을 휩뜰 부류도 있겠지만 불교언론에 몸담고 있는 당사자로서는 요즘같이 불교언론에 쏟아지는 몰매를 보지못했다. 지난 한달간 세개 이상의 매체가 불교언론비평을 크게 혹은 비중있게 다뤘다. 이중 두개 매체는 지금 불교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에서 발행되는 기관지이고 나머지 하나는 제호를 바꿔 재창간한 교계 주간신문이었다. 발행주체가 매우 다른 이 세 군데 매체는 그러나 내용면에서만큼은 공통점을 보인다. 교계언론풍토에 대한 심한 불신과 질책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불교언론이 언론은 언론이되 하는 모양새가 언론(정론)으로 보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자사이기주의에 빠졌다거나 기자정신이
조계종이 금년도에 추진할 종무계획을 발표했다. 종단의 안정과 화합, 수행중심의 승가상 확립, 포교전법사업의 내실화, 대사회활동의 다각화와 전문화, 종도중심의서비스행정의 실현, 종무행정의 전산화와 불교종합정보망사업 추진, 불교종합회관건립불사 추진 등이 주요내용이다. 이와 같은 사업계획은 고산 스님의 새집행부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지를 예측케 하는 기본 자료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종무계획' 만으로 볼 때 고산 스님의 새 집행부는 지난해에 비해 특별히 새로운 구상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금년 중에 불교종합회관을 착수하겠다는 것과 지난해 종단사태와 관련 수행중심의 승가상 확립을 위한 참회법회와 교육실시 등은 전에 없던 항목이어서 눈길을 끄는 정도다. 이러한 사업계획은 새집행부
겨울 산천이 본체를 드러내 놓고 있다. 스스로 장식을 제거하고 뼈대를 노출시키고 있어 한층 아름답다. 더욱이 올해는 눈이 내리지 않아 겨울산이 건조하고 삭막한 분위기마저 든다. 방문을 열고 산을 바라보면 우뚝 우뚝 서있는 산뼈들이 다가서는 것 같다. 그리고 차가운 침묵과 고요가 엄습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면 마음 속에 번뇌들이 빠져나가고 산 속에 숨어있던 때묻지 않은 고요가 찾아든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생명이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일이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비록 개체는 각기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본다면 생명체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마음을 비우고 사유(思惟)를 맑히니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무아의 경지이다. '나'란 생
T사에서 운영하는 K장학회. 명문대 위주의 학생을 상대로 학비를 지급해온지 10년이 넘는다. 장학금 수혜를 받은 학생만도 300명을 웃돌만큼 규모가 크다. 그러나 K장학회는 교계 인재를 길러 내기 위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졸업과 동시에 제 갈 길을 가는데, 4년간 장학금을 지급해온 스님을 찾아오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그런데도 T사는 왜 이러한 장학사업에 적지 않은 정재와 남다른 의지를 보이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각계의 엘리트로 자리할 그들과의 개인적 친분을 쌓아 이용가치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계산이 뒷받침돼서다. 즉 장학회를 운영하는 스님의 개인적지명도와 친분관계를 넓혀나가는데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K장학회를 바라보는 교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문제의 심각
지난 4일 낮 서울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 앞길에서 대학생들과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회원들이 모여 이색적인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 퍼포먼스에서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소리를 외면하고 서있는 법조인들에게 "귀를 잘파서 국민의 소리를 들으라"며 한 시민이 1m길이의 각목으로 만든 귀이개를 건네주는 장면을 보고 둘러서 있던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시위방법의 행위예술화라고나할까. 아무튼 피킷과 소리 높은 구호 등으로 인식되는 시민운동단체의 시위방법이 몇 년전부터 그 경직성을 풀고 여유와 발랄함과 유연성을 찾고 있는 것 같아 한결 가벼운 느낌을 받는다. 한국에서도 이제 '시민사회', '시민운동'이란 말은 낯설지 않다. 정권에서 '군사'의 때가 빠져나간 문민정부의 시작쯤인 90년대 초부
국민의 정부가 드디어 한자병용의 어문정책을 결정했다. 우선 1단계는 공문서와 도로표지판등에 한자를 병용하고, 2단계는 현행 한문교육의 체계를 수정 보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이 발표되자마자 학계와 시민들 사이에 찬반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다. 그동안 〈한글전용〉정책을 지지했던 한글학회, 한국바른말연구원등이 정부 방침의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다. 반면 한국어문회와 성균관 등은 정부방침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자병용과 한문교육에 대한 찬반양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뿌리가 있다. 건국 직후에 〈한글전용법〉을 제정하여 어문정책의 제도적인 틀이 만들어졌지만, 한자병용을 허용하는 단서규정이 논쟁의 불씨로 남아있는 것이다. 한 국가의 어문정책은 문화정책의 핵심이며 나라발전의 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의 설법을 청해 듣지만 정작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 것은 설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설법을 듣는 자는 누구이고 합장하고 묻는 이는 누구이며 머리를 숙여 예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섣불리 "설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바로 '나'다"라고 말해서는 안될 일이다. 만일 그렇게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 깨달음의 면목은 어떻고 그 모양은 어떠하며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흔히 알고 있는 깨달음이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깨달음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 깨달음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라면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수행하는 이 산에서 깨우침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1만2,000의 보살이 항상 설하고
△온갖 줄 수 있는 물건을 다 주는 것은, 부처님의 무상(無上)의 큰 묘지(妙旨)를 구하는 까닭이다.- 십지론 △질투는 떠나, 마음으로 늘 보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최상의 상태를 지녀, 죽어서는 곧 좋은 세상에 태어난다. - 월등삼매경 △굶주린 자에게 밥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면 무슨 잘못이 있겠으며, 헐벗은 자를 옷 주어 감싸고 재앙에 빠진 자를 구해 주면 무슨 잘못이 있을수 있겠는가.- 앙굴마경 △자애가 곧 여래요, 여래가 곧 자애이다.- 열반경 △보살들은 비심(悲心)이 견고하여, 온갖 중생을 구할 때 괴롭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으며, 일단 구하고 나서도 구했다는 생각이 또한 없다. 온갖 중생을 버리는 일이 없이 어려운 일을 애써 행한다.- 신력법문경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설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이다. 옛날 우리네 어머니들은 객지에서 오랜만에 찾아오는 자식들을 위한 설 음식과 조상들께 올릴 차례음식을 마련하느라 며칠전부터 밤잠을 설치며 설 맞이할 준비를 했다. 또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그리운 부모님과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귀향버스에 기쁜 마음으로 몸을 싣곤 했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IMF 체제로 들어서면서 설이 마냥 편하고 기쁜 것만은 아니다. 97년 말부터 불어닥친 경제 한파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살림살이는 빠듯하기만 하다. 아마도 설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시장을 나섰던 많은 주부들이 얄팍한 지갑보다 턱없이 비싼 물가에 또 한 번 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을 무겁게
일본 '회유임천형' 연못과 유사 강점기 때 변형…"복원 논의 필요" 전라남도 순천의 조계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사는 통일신라시대 말에 창건된 고찰이다. 선암사가 천년고찰이라는 것은 건물이나 담장, 석단 등에 남아있는 세월 흐른 흔적을 통해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선암사가 오래된 절이라는 측면에서 주목을 받기보다는 규범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전통사찰의 형식에서 벗어난 예외적이고 외래적 경관을 지닌 사찰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선암사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를 중창한 후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중창건도기(重創建圖記)〉가 전해지고 있어 선암사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창건도기〉의 제작연도가 18세기
대오(大悟) 후에도 하심(下心)설봉 선사는 덕산의 사법제자였다. 당시 대부분의 선사들이 돈오입문(頓悟入門)을 강조해 온데 비해 그는 피나는 정진 끝에 대도를 이룬 인물로 전해온다. 물론 돈오돈수 또한 '정진'이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돈오의 순간만이 강조될 때 그 과정은 잊혀지게 마련이다. 이 점은 선종의 매력이자결점이다. 왜냐하면 중생이라면 누구나 돈오라는 드라마틱한 순간을 꿈꾸게 되고, 처절한 수행의 내면은 희석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설봉 스님의 전기에는 '삼도투자(三道投子) 구지동산(九至洞山)'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세번 투자산에 갔고, 아홉번 동산에 갔다"는 의미이다. 특히 아홉번 동산을 찾았다는 기록에는 숙연함마저 느낀다. 웬만하면 포기할 법도 하다. "인연이 덜
유가 覺人詐而不形於言 有餘味 남에게 속은 줄을 알고도 말에 나타내지 않으면 여유로운 맛이 있다. 卽人言可以見所養之淺深 사람의 말에서 수양의 얕고 깊음을 알 수 있다. 知足者 貧賤亦樂 不知足者 富貴亦憂 만족할 줄 아는 자는 가난하여도 즐거워하고, 만족을 모르는 자는 부자라 해도 근심한다. 知安則榮 知足則富 편안할 줄 알면 영화롭고, 만족할 줄 알면 부자이다. 人無百歲人 枉作千年計 인간은 백세를 사는 사람이 없는데 헛되이 천년의 계획을 세운다. 大廈千間 夜臥八尺 良田萬頃 日食二升 천 간의 큰 집에 살아도 밤에 눕는 자리는 여덟자요, 한없이 넓고 좋은 밭을 가졌으도 날마다 먹는 것은 두 되일 뿐이다. 人皆愛珠玉 我愛賢師友 사람들은
"여성해방은 여성의 자각과 실천으로부터… 성 편협은 부처님 참 뜻 왜곡하는 행위" 노동부는 최근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른 '직장내 성희롱 예방지침'을 발표했다. 이중 '특정 신체부위를 음란한 눈빛으로 반복적으로 쳐다보는 행위'가 과연 성희롱이 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두고 세간의 논쟁거리가 됐다. 그러나 정작 이런 법안들이 왜 제정돼야만 했는가에 대한 논의는 묻혀버린 듯 하다. 지금 우리사회에선 매맞는 아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많은 여성들이 현역이나 퇴역 매춘부로 전락하고 있다. 심지어 유치원생까지 성폭력의 위협을 느껴야 하며, 여아는 아예 태중에서 사정없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 취직시에 있어 차별, 직장 내 성희롱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차별 현상이 비단
"법을 바르게 알려주는 일이 이타행 보다 중요… 법사는 중생을 안심입명 안식처로 인도돼야" 설을 앞둔 어느날 이른 아침, 꽃샘추위에 몸을 떨며 비맞은 제비가 처마 밑에 날아들 듯 법륜사 마당에 들어섰다. 정갈하고 적막했다. 서울 시내에 자리해있다는 것을 잊게 한다. 세수 86세의, 단아한 풍채를 지닌 노스님이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안덕암(安德菴)스님. 지난 2월 9일 한국불교태고종의 제16세 종정으로 추대되셨다. 86년 제13세 종정을 지내신 후 다시금 종정직을 수락하셨다. 절을 올리자 방이 따뜻하냐고 물으셨다. 편안한 기운이 느껴졌다. 스님 건강이 어떠신지요. - 좋아요. 당(당뇨병)이 있어 주사를 맞고 있기는 하지만 불편함은 없어요. 나이 들면 다 그렇지.
법보신문에 감사의 편지를 띄웁니다. 저는 헝가리에서 포교활동중인 진오입니다. 이곳에는 5년전 한국스님(법명 법전)에 의해 세워진 유럽 최대의불탑이 있습니다. 높이 36m, 넓이 24m의 탑 중앙에는 순수한 한국 부처님이모셔져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유럽의 바다라 불리는 유명한 벌러톤 호수가있어서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많은 유럽인과 헝가리 관광객이 여름을 즐기며 한국의 불탑을 구경하러 옵니다. 처음 한국을 떠날 때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목적을 가졌지만 구경삼아 들리는 사람들에게 부처님과 연꽃, 목탁과 향과 촛불의 의미를 반복적으로 설명할 뿐 지속적인 연결이 안되며 차츰 정체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그나라 사람이 자기 나라에 불교를 전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라 생각
김영삼씨가 집권한 이래 숱한 실정 가운데 ‘종교'에 관한 정책 등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워낙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장로'라는 신분을 이용하였고 이를 기화로 일부 개신교 세력은 적극 선거에 ‘개입'하였으니 초기부터 종교간의 갈등은 내재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윽고 장로대통령의 출현으로 대통령 관저에서의 공식 예배가 가능해졌고 각료들 역시 공공기관에서 집무시간에 직원들을 모아 예배 보는 일을 능사로 하였다.(황산성 환경부장관, 윤한도 경남지사등) 내재된 갈등을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들이 속속 이어졌으며 급기야 개신교 광신도들이 타종교에 대해 노골적인 폭력과 방화를 일삼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쯤 되니 국가의 정책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얼마전 북인도 히말라야산맥 깊숙한 곳 나닥(LA DHAK)에 다녀오다가 그곳에서 들에핀 들꽃보다 더 작은 아주 작은 이름모를 꽃들이 세상에서 제일높다는 히말라야산 정상에 터를 잡고 뿌리내리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세상은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작은 들꽃풀들이 그 큰 산들을 발밑에 잡아두고 있드라는 것입니다. 그때 지혜있는 자의 눈에 비친 부나방의 몸짓과 줄잣대로 재고있는 현실에서의 참자유는 자연인으로 돌아갈 때 가능한 것임을 자연의 섭리속으로받아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늘 그래왔듯이 오늘도 서있어야 할 자리는 허공에 구름처럼, 그림자같이 불확실한 무제일 뿐 실체가 없었습니다.어느날인가 우리인생도 한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속으로 떠내려가다 묻히어 버리고 말 것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