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나리가 깊은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 동안 섬에서 겪은 어느 태풍보다도 유래가 없이 많은 비가 내리고 강풍이 불어서 피해가 많았다. 다행히 도량 주변에 큰 나무들이 감싸고 있어서 별일 없이 지나갔지만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주느라고 허리가 휘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인연들이다. 앞으로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으로 세고 강한 슈퍼태풍이 온다고 하니 인간의 욕망이 갈수록 치성해져 태풍도 따라서 강해지고 덩치를 키우는가 싶어 씁쓸하기만 하다. 더구나 요즈음 승가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어 섬에 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남의 집안 일이 아니어서 참으로 밖에 나가기가 부끄럽다. 승가의 생활도 예전보다 편리해 지고 의식이 풍족한 것은 사실이나 스님들 사이에 훈훈한 기운은 갈수록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되어 여름 내내 이목을 집중시키던 인질들이 풀려났다. 그 와중에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적신월사(Red Crescent Societies)’라는 이슬람권의 적십자 단체가 십자가 대신 심벌로 쓰는 ‘초승달’이었다. 어떤 특정지역의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쓰는 기호(sign)와 상징(symbol)을 잘 알아야 한다. 구분이 모호하겠지만 상징은 심상(心象)을 부여하기 때문에 기호보다 심층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국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별 문양이다. 60개국 이상에 별 문양이 등장하고 있다. 별은 최고(supreme)를 상징하며 오각형이다. 그리스인들은 일찍이 이것을 황금분할(golden section)이라고 불러왔다. 이 오각형 내에 모두 대각선을 그으면 별의 형상이 얻어진다.
며칠간 계속되던 가을비가 그치고 나니 바다가 다시 열리고 있다. 이맘때면 농촌의 부모님들은 추석에 찾아올 자식들에 대한 기다림과 그리움뿐이었지만 요즘 때 아닌 가을장마에 걱정이 늘어가고 있다. 수행하는 사람도 이맘때가 되면 한해의 농사를 가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상 농사는 해마다 더하는 일이지만 법농사는 해가 갈수록 덜어서가난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향엄선사는 거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어서 송곳 꽂을 땅이 있더니 금년 가난은 참가난이라 송곳마저 없다고 노래했다. 법을 모를 때에는 깨달아 보겠다고 있는 힘을 다해 보지만 문득 이 농사는 세상과 달라서 유위법이 아니기에 힘을 쓸 일이 아님을 알게 된 후로는 천연의 성품에 맡겨서 유유자적하여 세월이 흐르다 보면 덜고 덜어 어느덧 무위법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지난
밤사이 내린 이슬이 아직 날아가지 못한 채 풀잎을 적시고 있던 이른 아침, 부처님께서 극락의 연못가를 산책하고 계셨다. 연못에는 색색의 연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연못을 구경하시던 부처님은 빼곡히 들어찬 연잎들 사이로 우연히 아래세상을 내려 보게 되었다. 극락의 연못 아래는 지옥이었다. 그 많은 지옥중생들 가운데 부처님의 관심을 끈 이는 칸다카였다. 살인은 물론이고 도적질 같은 악행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다. 그가 과거의 어느 때 물건을 훔쳐 달아나다 발에 밟힐 뻔 한 거미를 살려준 적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이 한 가닥 선행인연을 알아보시고 구제하실 마음을 내셨다. 연못에는 아직 이른 아침이라 거미들이 잎 사이사이에 줄을 치고 있었다. 부처님은 그중의 거미줄 한 가닥을 지옥으로 내려 보내기 시
만행 떠나기 전힘 얻었는지 점검천둥같은 선지식 말씀“건강할 때 밀어붙여라”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에 계절은 속이지 못한다고 했는데 처서가 되니 밤이면 귀뚜리미가 울고 하늘의 별밭에는 은빛 잔치가 시작되었다. 가을의 문턱임에는 틀림이 없다. 해수욕장은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이른 아침 바다는 아직 남아있는 열정으로 집채만 한 파도로 굽이치고 있다. 앞마당에는 연꽃의 향기로운 잔치가 한창이다. 이렇게 가까이서 연향에 취해보기는 처음이다. 해질녘 순백의 얼굴로 미풍에 하늘거리는 하얀 연꽃의 자태는 숨을 멈춰야 바로 볼 수가 있다. 저녁에는 고사리 손의 합장인양 다소곳이 아문 모습은 천진 동자의 해맑은 얼굴이다. 몇 해 전 선원의 상징화로 심었는데 지붕꼭대기에는 조각된 하얀 연꽃이 법성의 바다에 뿌리를 내린
무모한 선교가‘인질사건’불렀다지만포교현실서 보면그들 열정 놀라워 ‘무샤하다(mushahadah)’는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의 말로 ‘목격’,‘봄’의 뜻이다. 이것은 오로지 신을 기쁘게 하는 사람에게 신이 부여하는 것으로 이 상태가 ‘야킨(yagin:확실성)’이고, 궁극적으로 신의 모습에 접하기를 열망하는 모든 수피의 목표이다. 그 반대개념인 히자브(hijab, 신의 얼굴에 가린 베일)는 수피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벌이다. 수피들은 ‘무샤하다’를 얻기 전의 삶을 헛된 것으로 여긴다. 유명한 신비주의자인 바야지드(?~874)는 나이가 몇이냐는 질문에 “4세”라고 하기도 했다. 그의 말이 이랬다. “70여 년 동안 신의 베일이 나에게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최근 4년 동안 그를 보고 있다. 이
앞마당 너럭바위에 앉아 더위에 지친 몸을 뒤척이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문득 깨어보니 밤은 이슥하니 깊어서 새벽으로 넘어가는데 파도소리는 잠들지 않고 묘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람의 심성 그대로가 불성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는 자존심마저 버리고 나면 삶의 커다란 전환점이 생기게 된다. 향엄 스님은 남양 혜충 국사를 모셔 놓은 탑묘를 참배하다가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서 밟히는 기와 조각을 던졌는데 우연히 대나무와 부딪치는 소리에 삶의 긴 방황을 그치고 오도를 하게 되었다. 참으로 감격하여 멀리 사형인 위산 스님이 계시는 곳을 향하여 향을 사루고 예배하면서 그때에 가르쳐주지 않고 진실하게 목숨 바쳐 참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 사형님을 더욱 귀하게 생각한다면서
삶을 맞이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적이 없는 것처럼 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 아닌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채우는 기쁨이 비우는 즐거움을 넘지 못함도 알고 보면 단순한 법칙에 근거한다. 오르려면 우선 가라앉아야하듯이, 이 작은 기적이 삶을 변화시킨다. 한 성자가 있었다. 그가 어딘가를 다녀오기 위해 제자를 데리고 가다 강을 만나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성자의 명성을 알고 있던 한 사내가 불쑥 나타나 시비를 걸었다. “성자로 불리는 이여, 당신은 맨발로 강을 건널 수 있습니까?” 성자가 말했다. “난 할 줄 모르오.” 사내가 신통으로 물위를 자랑스레 걸어보이고는 말했다. “이런 기적도 행하지 못하면서 성자라고 할 수 있소?” “사내여, 물위를 걷는 데 얼마나 수련을 했는
장대비가 그치고 뒤뜰에 나가보니 자귀나무에 꽃이 피어 환하게 웃고 있다. 연분홍 꽃잎이 나비처럼 살포시 앉아있어 소박하고 수줍은 여인의 아취를 자아내고 있다. 옛 부터 가내 화합을 위하여 정원수로 심었으며 밖으로 나갔던 일체 생각을 거두어 자기로 돌아가라는 이름을 가졌으니 범상한 나무는 아닌 것 같다. 화사한 꽃의 자태는 구질구질한 날씨에 닫혔던 하늘이 열리는 듯 자귀의 하라고 법을 설하고 있다. 은사스님 문안을 드리기 위해서 오랜만에 출가본사를 찾았다. 고색창연한 일주문을 넘어서니 침계루는 흐르는 물에 두 다리를 걷어 올리고 안개 속에 조계산은 연꽃으로 피어오른다. 사자루에는 수련생들이 깊은 선정에 들었고 장마에 불어난 계곡물 소리는 지혜를 드러내니 여기가 정혜쌍수의 도량 조계총림이다. 오랜 전통 속에서
티베트의 성자로 밀라레파(1052~?)가 있었다. 밀라레파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삼촌에게 재산관리를 부탁했는데, 그가 몽땅 가로채고 말았다. 원수를 갚기 위해 마술을 배운 밀라레파는 여러 사람을 살해했지만 자신의 소행을 곧 후회했다. 영적인 스승을 찾아 나선 그는 마로파를 만났다. 마로파는 밀라레파의 더럽혀진 업을 정화시키기 위해 맨손으로 집을 짓도록 하고, 완성되면 트집을 잡아 허물어버리면서 다시 짓게 했다. 일견 의미 없고 실망스러워도 이일은 반복 되었다. 결국 스승은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나중에 밀라레파는 동굴에서 홀로 쐐기풀만 먹으며 수행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 어느 날, 밀라레파가 제자인 감포파에게 법을 전하는 자리였다. 바닥에 앉아 있는 제자의 주위를 한
장맛비가 오락가락 주춤거리는 사이로 보름달이 떠오른다. 해맑은 모습이 먹구름 속에서도 얼굴을 바꾸지 않아 옛 도반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선실에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니 신묘하기 그지없어 달빛은 바야흐로 만상을 머금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청개구리 합창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고 마치 무생곡을 부르는 듯 다함이 없다. 달이 저렇게 둥글어서 달력을 바라보니 하안거 살림이 어느덧 반철로 접어들었다. 일대사에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사람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두렵기만 할 것이다. 어느덧 섣달 그믐날이 가까워지면 누구나 묵은 밥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발심했을 때 마음은 해가 갈수록 무뎌지고 몸은 늙고 병들어 가니 공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화두에 의정은 점점 희미해져서 젖은 나무에 불을 지피는
옛날 인도의 한 부자 노인이 두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떴다. 세월이 지나 둘은 따로 살기로 하고 재산을 공평하게 나눴다. 재산을 나누는 중에 다락 깊은 곳에서 꾸러미 하나가 발견되었다. 조그만 주머니 속에 두개의 반지가 있었다. 하나는 값비싼 다이아몬드로 반지, 다른 하나는 평범한 은반지.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자 형은 욕심이 생겼다. 동생에게 말했다. “이것은 아마 할아버지보다도 더 윗세대의 조상부터 물려받은 것이 분명해. 이것을 후손들에게 오래도록 전하려면 아무래도 장남인 내가 보관하는 게 어떨까? 너는 은반지를 갖도록 해라.” 동생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난 은반지만으로도 행복해요.” 그들은 각자 길을 떠났다. 얼마 후 동생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값어치도 없는 은반지를
하루해는 앞산을 넘어가다가 그만 아쉬운 듯 붉은 노을 한 자락 걸어놓고 서천으로 가고 있다. 법당에는 오래된 인연의 노거사님과 보살님이 방문을 해서 병고를 벗어나고자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간절한 기도소리가 파도소리와 겹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동행이다.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서 서로가 성격 차이가 많아 힘들었지만 부처님 법을 만나 수행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병들어 힘든 시간을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생에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그만 눈시울이 붉어진다.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병들고 힘들 때 함께할 수 있는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훈훈한 인간미라도 있어야 성숙된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지만 불법의 인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살아서 맺은 인연들과 맺은 감정들을 부처님
유대의 한 신비주의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신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신에게 물었다. “멸망시키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만약 이 도시에 영혼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200명 있다면, 그래도 이 도시와 함께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신은 당황스러웠다. 그런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200명이 도시를 살린 거야.” “만약 그 뛰어난 영혼의 소유자가 200이 아니라 20명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20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시키시겠습니까?” “20명이 정말로 그런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라면 이 도시는 구원을 받아야지.” 신비주의자가 다시 말했다. “하나 더 묻겠습니다. 만약 20명이 아니라 단 한사람이라도 그런
비가 그치고 나니 도량은 초록의 합창으로 가득하고 강물은 어느덧 바다에 이르러 흐름이 끊어지고 적멸에 들었다. 제방 선원은 지금쯤 정진의 열기로 달아오를 것이다. 봉암사에서 기라성 같은 구참스님들을 모시고 다각 소임으로 첫 안거를 지내던 때가 엊그제처럼 떠오른다. 지금 첫 철을 나는 스님들의 눈빛은 일진일퇴의 검객처럼 날카로워서 털끝만큼의 번뇌도 용납하지 않고 한 여름의 태양처럼 이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안거와 더불어 매실차를 담갔다. 지난 겨울 모진 추위를 견디고 코끝을 찌르던 매화가 속찬 열매로 잘 여물었다. 티끌 같은 세상을 벗어나는 것이 보통일은 아니어서 한 바탕 화두를 들고 일대사를 치러야 한다. 세상사에서 부딪치는 일들은 오히려 향기를 기르는 좋은 벗이며 향기 속에는 바로 열매를 감추고 있어서
추운 겨울 견딘 금낭화가 아름답듯인색-사나운 마음 깨야 자비심 생겨 초파일을 준비하고 보내면서, ‘부처님은 참 좋은 계절에 오셨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봄의 모든 것은 꽃이다. 가지마다 돋아나는 싹이건, 산에 들에 피어오르는 풀잎이건, 그대로가 각각 한 세계요, 도량이다. 만공선사가 휘호로 즐겨 쓰신 ‘백초시불모(百草是佛母, 어떤 풀잎도 부처님 세계 아님이 없다)’라는 말도 다 이 뜻에 통한다. 부처님은 사랑과 자비의 씨앗을 온 천지에 퍼뜨렸다. 전쟁을 일삼는 왕에게는 진정한 승리는 자신을 이기는 데 있음을 설하셨고, 사나운 이나 인색한 자에게는 자비심을 일깨우셨다. 가난하여 힘든 삶을 사는 이에게는 그 상태에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찾아보고 행함으로써 공덕을 쌓으라 하셨다. 그리고 그 설법은 누
#내가 짜이를 마시는 이유? 인도에서 먹어본 추억의 음료. 커피전문점에서는 4800원에 팔고 있지. 하지만 숙명여대 표 짜이는 500원. 게다가 제때 먹지 못하는 제3세계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된다잖아. 돈 아껴서 좋고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으니 자주 찾고 있지. (물리학과 유보람) #내가 짜이를 파는 이유? 짜이 한 잔이면 인도 어린이 3명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짜이 한 잔은 오렌지로 바뀌어 아이들의 영양이 되고, 학교로 변해 아이들 미래의 희망이 되지. 손님들의 반응을 살피고 열심히 설명하는 내 모습 너무 대견스러워. (회화과 정은주) #하루 팔아 얼마 버냐고? 오늘 오전 11시부터 5시간 동안 71,400원. 평소 4배의 최고 매출 기록. 5시간 동안 겨우 71,400원이냐고. 하지만 무려 4
항구에는 배들이 먼 바다에서 돌아와 고달픈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깊은 잠에 빠져있고 두 눈을 감아도 또렷이 밝아 다함이 없는 등불 하나 오롯이 빛나고 있다. 산과 바다는 어느덧 초록의 동색으로 만나 부처님 오심을 찬탄하고 꽃과 새들은 저마다 향기와 고운 목소리로 공양을 올리고 있다. 바다 건너 섬에도 연등이 걸리고 항구에는 봉축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정겹게 나부끼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이 바쁜 농사철과 맞물려 있어서 잠시 일손을 놓고 절에 올라와서 연등을 밝히는 모습은 참으로 소박하고 아름답다. 노보살님들의 지극한 정성과 기원은 부처님께 정성으로 등불공양을 올린 난다라는 가난한 여인의 등과 같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탄생게에서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존귀하다”라고 하셨다. 모든 생명이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風花日將老),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佳期猶渺渺).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不結同心人),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느냐(空結同心草). 이 시는 중국 당나라 때 여류시인 설도(薛濤, 770~832)의 ‘춘망사(春望詞)’ 4수중 세 번째다. 김성태(1910~) 작곡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애창곡에 많이 꼽힐 만큼 친근한 가곡 ‘동심초’ 가사이기도하다. 이 시의 한글풀이는 김소월(1902~1934)의 스승인 안서 김 억(1896~?)의 것이다. 설도는 당시의 수도인 장안(長安)에서 태어났고, 하급 관리였던 부친의 죽음에 따라 가세도 기울어 16세에 ‘악적(樂籍-기생)’의 길에 접어든다. 어린 시절, 그녀가 아버지와 함께 정원에 앉아서 나무 한 그루를 놓고 시를
바닷가 갈대밭에는 새들의 둥지처럼 모체 사이로 어린 갈잎이 자라고 있다. 바람은 죽어서도 자식을 못 잊어 그리워하는 부모님의 손길인양 갈잎을 흔들고 지나간다. 일찍이 동진으로 출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대중들이 숲처럼 모여서 정진하는 총림에서 행자생활을 익혔다. 은사스님께서는 철없이 장난을 치다가 일을 저지르면 눈물이 쏙 빠지게 나무랐다. 그러면 무서워 은사스님 방에는 못가고 노스님들께 찾아가 그 분들로부터 옛날 큰스님들의 구수한 수행 이야기를 들으며 외로운 마음을 달래곤 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함없는 가치는 어른을 섬기고 받드는 효가 근본이다. 석가모니의 후신이라고 일컬었던 조선시대의 고승 진묵대사는 어머니를 절 아랫마을에 모시고 극진히 효도를 다했다고 하지 않던가. 수행의 장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