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는 지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낙담하고, 삶에 회의를 갖는다. 나아가 사랑을 포기하고, 사람에 대한 희망, 사랑과 연대의 희망까지 포기하고 있다. 그렇게 포기하는 사람들 곁에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어쩌면 그런 현상이 한 가마니의 밥을 먹이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맹신한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아내, 남편, 아이, 어머니, 아버지, 친구들에게 사랑이나 아낌이 저주의 언어가 되고, 자유가 아니라 강요의 언어가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다.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있다
제10 장엄정토분의 마지막 문단에 부처님께서 “수미산처럼 큰 몸을 가진 사람은 그 몸이 크다 하겠느냐”고 묻자 수보리가 크다고 말씀드리며, 여래께서 몸이 아니라 말씀하셨기에 큰 몸이라 이름한다고 그 이유를 밝힌다. ‘A는 여래께서 A가 아니라 말씀하셨기에 A라 한다’라는 전형적인 즉비논리(卽非論理)의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문제는 이 구절에서 구마라집 스님은 ‘신(身)’이라 옮기고 현장 스님은 ‘자체(自體)’라 옮긴 단어에 대한 해석이다.범문은 “아뜨마바하바(ātmabhāva)는 여래께서 바하바(bhāva)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올해는 윤달이 있는 해여서 전국 여러 사찰에서 수륙재와 천도재를 올리며 돌아가신 영가와 여러 고혼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많은 불자님들도 자신의 가족과 자손들의 평안함과 행복을 위해 기도에 동참하고 계신다.근데 일각에서는 천도의식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기복적이고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에 어긋난다고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천도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우선 불교에서는 고정불변의 실체인 ‘자아(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한다. ‘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 자아를 인정하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옳은가.’보통사람들이 한번쯤 해봤을, 아니 어쩌면 매일 고민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철학사에서도 그 물음에 답하려는 고군분투가 이어져 ‘인생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세상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으며 인류의 슬기로운 생활에 기여해왔다. 그렇게 인류는 인생과 세상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은 철학자들의 지혜를 후대에 전하며 사유의 힘과 생각의 근육을 키워왔다.그럼에도 우리나라 10대들은 교과서에서 철학자와 그 사상을 암기식으로 공부할 뿐, 제대로 철학을 만나볼 기회가
전 동국대 이사장 법산 스님이 고 연사 홍윤식 교수의 49재를 맞아 고인을 추모하는 시를 보내왔다. 5월28일 불교문화재와 불교민속학에 이르기까지 불교문화 전반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가 세연을 마친 것은 5월28일이다. 법산 스님은 7월15일 서울 수안사에서 열린 49재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시를 낭송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했다. 특히 옛 선사들이 자주 즐겨 썼던 오언절구에 ‘蓮史潤植’이라는 고인의 호와 이름을 이용해 시를 지었다. 편집자蓮史洪潤植敎授 追慕하며蓮香法界淨史觀獲淸凉潤濯三重業植得淨土行연꽃향기 되어 세상을
“사람은 외계의 사물에 포로 되는 존재가 아니므로 만유의 절정에 서서 종횡자재 해야 한다. 이때 비로소 번뇌는 보리가 되고 고통은 쾌락이 된다. 고통과 쾌락을 양거쌍망(兩去雙忘)하면 낙원 아닌 공간이 없고 득의롭지 않은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고통과 쾌락’)“계박을 피하고자 하는 소극적 태도, 독선, 포기, 도피도 다른 의미의 계박이다. 계박과 해탈은 타(他)에 있지 않고 아(我)에 있으며, 물(物)에 있지 않고 심(心)에 있다. 일체의 해탈을 얻으려면 자아를 해탈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입세(入世)가 출세(出世)고 출세가 입세
앞서 제4묘행무주법에서 범어 와스뚜(vastu)를 언급하며 응무소주행어보시(應無所住行於布施,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라는 문구를 살펴보았는데, 비록 ‘응무소주행어보시’라는 여덟 글자로만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앞에 내용상 중요한 ‘어법(於法)'이 있기에 온전히는 “보살은 法에 있어서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이다. 여기서 말한 ‘法’은 범어의 다르마(dharma)가 아닌 와스뚜(vastu)를 옮긴 것이다. 와스뚜는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의 대상인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을 총칭하는 말로서, 변화
1. 다음에서 말하는 인사법이 불교수행으로서 갖는 의미가 틀린 것은? ᐧ 이마와 두 팔꿈치와 무릎을 땅에 대어 지극한 공경심을 나타내는 최상의 인사법이다. ① 자신을 무한히 낮추어 아만과 교만을 없애는 수행법이다. ② 지난 시절의 업장을 소멸하여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내는 수행법이다. ③ 삼보에 대한 예경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은 대표적 인사법이다. ④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고 절대 복종할 것을 맹세하는 인사법이다. ⑤ 가장 낮은 곳으로 자신의 몸을 낮추어 하심을 함으로써 자신을 비우는 수행법이다. 2. 불
제10 장엄정토분 첫머리에 부처님께서 “여래가 옛적에 연등 부처님의 처소에서 법에 관해 얻은 것이 있겠느냐?”라고 물으시자 수보리는 얻은 것이 없다고 말씀드린다.‘금강경’이 총 32분으로 단락이 지어진 것은 경전이 저술될 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중국의 남북조 양나라의 소명태자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비록 내용상 32분의 단락이 경전내용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매 분(分)마다 글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할 필요는, 아니 어쩌면 그래서는 안 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제9 일상무상분에는, ‘금강경’이 반야부의
이전까지 ‘돈오’와 ‘신해(信解)’를 설했고, 지금부터는 ‘조사선’의 ‘점수’와 ‘행증(行證’)을 밝힌다. 37장은 “‘이치(理)’는 비록 문득 깨달을지라도, ‘일(事)’은 문득 없어지지 않는다”로, ‘능엄경’의 내용이다.보조국사의 ‘법집별행록절요’에서 “‘점수’로 ‘악습’이 줄어서 줄어들 것이 없는 경지가 ‘성불’이다”고 한 것과 같다. ‘이치’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교법’이고, ‘선법’의 ‘〇, 진여법성’이다. ‘일’이란 ‘본성’이 연기해서 ‘무상‧무아‧고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을 순자(荀子, BCE. 298~238)
34장은 “‘허깨비(幻)’인줄 알면 ‘방편’을 짓지 않는다. ‘허깨비’를 떠난 것이 ‘깨달음’으로 ‘점차’도 없다”이다.‘원각경’에서 “‘허깨비’같은 ‘삼매방편’으로 깨닫게 한다”고 한 내용이다. ‘허깨비’란 ‘무상’해서 실체가 없는 ‘무아’이고 ‘금강경’에서 “모든 법은 ‘꿈’ ‘환’ ‘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고 한 것이다. ‘즉리(卽離)’란 일과 이치가 둘이 아닌 것이 ‘즉(卽)’이고, 다른 것이 ‘떠남(離)’이다. ‘근원, ○’을 깨달으면 ‘해탈’이고 ‘부처’이니 ‘돈오돈수(頓悟頓修)’다. ‘방편(方便)’이
“나는 누구인가.” 불자라면 누구나 들어 보았을만한 물음이다. 일상에서는 묻지 않을 질문이지만, 불자는 이 물음이 가지는듯한 어떤 심오한 깊이를 헤아리려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현대분석철학은 원칙적으로 답변이 불가능한 것 같은 심오한 질문은 실은 개념적 혼동이나 논리적 오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판단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예외가 아니다.나는 누구인가.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Who am I?”인데, 미국인에게 이 질문을 하면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모릅니까? 기억상실
부처님의 지혜를 금강석에 비유한 ‘금강경’은 부처님이 제따와나에서 수보리 등을 위해 설법한 가르침이며, 일체법에서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개시허망(皆是虛妄, 모두가 다 허망하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니 것으로 보면) 즉견여래(卽見如來, 곧 여래를 보리라)”라는 사구게가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것 역시 무상·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선종의 육조 혜능이 이 경전에서 “응당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금강경’ 제9 일상무상분에 성문승(聲聞僧)을 수행계위에 따라 넷으로 분류하고 각각을 다시 향(向)과 과(果)로 나눈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언급되어 있는데, 둘씩 짝을 지어 넷이 되기 때문에 사쌍(四雙)이라 하고 통틀어 여덟 계위이기 때문에 팔배(八輩)라고 한다. 특정한 순간에 어디로 향하도록 방향을 틀게 된 것을 향(向)이라 하는데 그 마음은 오직 한 번만 일어나며, 방향이 정해져 나아가다 얻은 결과를 과(果)라 하는데 그 마음은 반복해서 일어난다. 향(向)은 범어로 마르가(mārga, 道, 길)이므로 도(道)라고도 일컫는다.우선
31장 본문에서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二乘; 성문‧연각)’이다. ‘번뇌’가 ‘생하지 않는 것’을 ‘대열반(大涅槃)’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 내용은 ‘대반열반경’에서 “‘번뇌’를 ‘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지 않는다. ‘번뇌’가 ‘생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한 것이다. 초기경전 ‘잡아함경’에서는 “‘열반’이란 탐·진·치 등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 상태이고, ‘8정도(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념‧정정진‧정정)’를 행하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해서 ‘4법인(일체개고·제행무상·제법무아
“수좌의 마지막 병은 ‘게으름’이다.”신라 이차돈 성사의 순교지 경주 흥륜사에 비구니 선방을 조성하고 40여년간 수좌의 방일함을 경책해 온 선사,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출가한 인연으로 신계사 복원 불사에 앞장서며 평화 통일을 염원한 지극한 신심의 수행자, 하심과 근검을 몸소 실천하며 스스로는 ‘무위돌’이라고 했지만, 후학들에게 ‘생불(生佛)’로 불린 한국불교 비구니 승단의 정신적 스승, 보주당 혜해 스님이 100수의 세연을 훌훌 털어내고 지수화풍으로 돌아갔다.보주당 혜해선사 법기 문도장 장의위원회(위원장 법희 스님)는 6월2일
호미 든 관음성상을 봉안하고 평생 불교 운동과 농민운동에 힘을 쏟았던 선진규 봉화산 정토원장의 영결식이 사부대중의 추모 속에서 봉행됐다.봉화산 정토원장 선진규 법사 장의추진위원회는 6월11일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경남 김해 진영전문장례식장에서 ‘정토원 선진규 법사 영결식’을 봉행했다. 이 자리에는 고성 옥천사 적멸보궁 회주 지성, 태고종 법상, 정토원 법공, 길상, 등명 스님을 비롯한 스님들과 하재길 대한불교청년회 중앙회장 등 재가불자, 이장명 신도봉사회장, 조세균 지도법사를 비롯한 정토원 회원 및 유족과 행정 및 지역 관계자들이
청산부동본래정 불염초충만란성(靑山不動本來靜 不厭草蟲萬亂聲)창해부주본래청 불선지류니탁수(滄海不住本來淸 不選枝流泥濁水)나무아미타불~청산은 움직임 없이 본래 고요하나 어지러운 풀벌레소리 꺼리지 않고,창해는 머무름 없이 본래 청정하나 만 갈래 흙탕물 가리지 않네.오늘은 하안거 결제일입니다. 앞으로 석 달간 수좌들은 참선에 전념하게 됩니다. 수행으로 불도를 이루는 것이 납자의 본분사이기에 안거와 비안거의 구분이 본래 없다하겠습니다만 굳이 안거기간을 정하고 납자들이 한곳에 모여서 수행하는 것은 그 나름의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녘 여명이 밝아오는 순간 나는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겨울나무처럼 살아가리라. 다 벗어버리고도 꼿꼿한 자세, 다 비우고도 꽉 찬 기운으로 끈기와 기다림으로 시절인연이 오면 본래의 모습을 피워내는 것은 잠시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음이리라.나는 교정기관에서 무기수란 신분으로 이름 대신 수번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지금은 오랜 꿈이던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해 못다 한 배움의 길을 가고 있으며, 열심히 모범수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생활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다.
‘Self(자아), Spirit(혼), and Person(인격체)’ 이 세 개념은 구분하기가 까다롭다. 그러나 붓다의 무아론을 옳게 이해하려면 이 세 개념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논의해 보아야 한다.‘self’의 번역어로는 보통 ‘자아(自我)’가 쓰이는데, 우리 일상에서나 불교계에서나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다. 실은 self는 힌두교의 아뜨만이나 서양종교의 영혼(soul)과 동일하고, 또 한국 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참나에 해당된다. 붓다의 무아론은 그런 참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자아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