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에는 ‘안거(安居)’가 있다.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수행의 제도다. 인도에는 여름에 우기(雨期)가 있어 이 기간의 석 달 동안 한 곳에 머무른 데서 시작되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한 곳에 있는다’는 말쯤 되겠는데, 나는 몸을 한 곳에 두고 배겨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한국의 수행전통에서는 여름과 겨울에 석 달씩 안거를 하고 있다. “결제(結制)”라고도 한다. 이때는 산문출입을 엄격히 금한다. 마음 수련보다 진정 어려운 것은 몸을 닦는 것이다. 수련의 처음에는 생각대로 몸이 따라간다. 그러나 점점 공부가 익어갈수록 의지와 상관없이 몸 자체의 흐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몸이란 게 묘해서 생각을 가만 둬도 저 혼자서 아무 걸림이 없이 먹고 놀고, 천방지축이다. 신라의
도반 스님이 하안거 만행 길에서 찾아왔다. 섬에서는 특별히 대접할 것이 없으니 가장 귀한 선물은 파도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마침 태풍 모라꼿이 아직 여운을 남기고 있어 바다에는 파도가 성난 산짐승처럼 으르렁 거리고 활화산처럼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맨발로 포행을 하다가 적멸 속에서 한량없는 묘용을 일으키는 파도소리를 관하면서 물기 어린 풋풋한 몽돌로 돌탑을 쌓는다. 선방에서 첫 철을 함께 정진했던 인연이라서 초발심의 천진한 모습으로 돌아가 돌팔매질을 하며 한바탕 실력을 겨루고 나니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큰 비가 몰려오고 있다. 바다는 언제나 변화무쌍해서 좋지만 아직도 변함없이 선객으로 살아가고 있는 도반 스님의 모습은 어느덧 심지가 바로 서고 그윽한 수행의 연륜
1970년경에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작은 거인’이라는 영화가 있었다고 한다. 난 이 영화를 본 적은 없고 일본의 종교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 어느 글에서 읽었는데, 흥미로워서 기억하고 있다. 백인 남자아이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납치되어 자라게 되는데, 추장이 그를 키웠다. 이 추장이 어느 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나는 죽는 꿈을 꾸었다. 나는 죽는다.” 이렇게 말한 그는 백인 아이만 홀로 데리고 초원으로 나가 대지 위에 드러누웠다. “자, 나는 이제부터 죽는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죽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그가 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꿈이 맞지 않는 것 같구나!” 추장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마을을 향해 되돌아갔다. 대대로 부족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
지루한 장마 끝에 태양이 모처럼 환한 얼굴을 드러내니 온통 풀잎마다 새롭다. 도반스님은 아침 일찍 안부를 물으며 오늘은 밤과 낮이 하나로 만나는 일식이 있으니 대낮에 야반삼경의 종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사시가 되어 앞마당에 나가 너럭바위에 누워서 태양과 눈 맞춤이 시작되었다. 하늘에는 여기저기 먹구름이 떠 있고 양떼구름 사이사이마다 청잣빛 하늘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한편 뒷산 능선이 그려내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한가로이 관상하면서 긴장마의 지루함을 털어내며 일면불과 월면불의 만남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먹구름을 떨치고 나타난 것은 초승달의 모습이다. 오랜 윤회의 흐름 곳에서 홀연히 양변이 끊어지고 나타난 마음 달이니 참으로 싱그럽고 천진한 면목에 문득 환희심과 함께 침묵이 흐르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읽었다. 어떤 사람이 낙타에게 물었다. “너는 오르막이 좋으냐, 내리막이 좋으냐?” 낙타가 대답했다. “오르막길이냐 내리막길이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짐이죠!” 사람과 낙타가 삶을 보는 관점이 같을 수 없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빨리 가려면 말을 타고, 멀리 가려거든 낙타를 타라”는 서양 격언이 있다. 사막을 오가며 교역을 했던 대상(隊商)들이 물건을 실어 날랐던 수단은 낙타였다. 사람들은 의례 짐과 낙타를 동일시하여 오르고 내리는 수고로움을 생각한 것이고, 낙타에게는 등에 진 짐이 관건이었다. 예부터 종교와 철학의 중심명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었다. 그렇다면 이 물음의 실마리를 동서양의 철인들은 어떻게 풀어갔던 것일까?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한 가지 특
육조스님은 의발을 빼앗으러 뒤를 쫓아온 도명 스님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법을 청하니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고 했다. 도명 스님은 이 한마디에 바로 돈오하고 나서 “마치 어떤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운 줄 스스로 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한편 “어떤 비밀이 또 있느냐”고 물었지만 육조스님은 “비밀이 오히려 그대에게 있으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더우면 더운 줄 아는 것은 보통 사람이나 깨친 사람이나 차별 없이 가지고 있는 사실이지만 보통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는 것을 주인으로 삼아서 한량없는 육도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수행하는 사람은 더운 줄 아는 성품은 수행하고는 상관없이 본래 아는 것이지만 믿지 못하고 수행을 통해서 따로 구하려고 한다. 누구나 물을 마
이하(李賀, 791~817)라는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이 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이 시인이 요절한 때가 27세, 240여 수의 시를 남겼다. 송대(宋代)의 전이는 그의 『남부신서』에서 “이백은 천재(天才), 백거이는 인재(人才), 이하는 귀재(鬼才)”라고 했다. ‘귀(鬼)’는 육신이 없이 떠도는 영혼, 풀길 없는 삶의 우수를 품은 망령이다. 이하의 시가 ‘귀기(鬼氣)’를 띤다는 것은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몽환적인 세계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자라면서 시에 재능을 보여 당대의 대 문인이자 정치가였던 한유(韓愈)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3년간의 장안 생활을 접고 고향에 돌아온 나이가 23세, 몸의 병은 이미 깊어 있었다. 그래도 시작(詩作)
장맛비가 파초 잎을 요란하게 두들기는 소리에 문득 한가로움을 느껴 깊은 선정에 잠긴다. 며칠 동안 장마 대비로 도량에 물꼬를 손질하고 창고 지붕을 수리하느라 올라왔던 열 기운이 내리고 온몸에 청량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장마는 어차피 해마다 찾아오는 손님이라서 반갑게 맞아서 탈 없이 보내야 하지만 모두가 무사하게 지나가기를 발원해 본다. 『유마경』 『불국품』에서는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따라서 청정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보살이 만약 정토를 얻고자 한다면 그 마음이 맑아야 한다고 했다. 마음은 일체 생각과 대상을 국토로 삼아 법성신과 법성토를 이룬다. 따라서 한량없는 허공계는 법성의 나툼이며 지수화풍 사대의 인연으로 몸을 삼아 마음이 생겼으며 지구별이라는 법성토에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 나의 모습이
자이나교의 고대 경전에는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들어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온 세계를 통치하는 황제가 되면 그에게는 ‘차크라바르틴(chakravartin)’이라는 존칭이 붙는다.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인도 신화에서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으로 불린다. 기원전 3세기, 인도 마가다국의 왕으로 인도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아쇼카 왕이 그렇고, 동아시아에서도 불교 흥성기의 불법홍포에 공덕이 있는 왕을 이렇게 미화해서 칭하기도 했다. ‘차크라’는 ‘바퀴‘란 뜻이다. 고대 인도에는 불필요한 전쟁과 폭력을 피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이륜전차가 한 왕국에서 다른 왕국으로 지나가는 것이다. 명마가 이끄는 황금으로 치장된 이 마차는 왕이 보내는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고 사방은 안개에 쌓여있어 적막한 도량에는 후두둑 빗방울 소리와 함께 어둠이 내리고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법을 설할 때는 반드시 대법으로 하되 나고 듦에 양변을 여의고 자성을 떠나지 말라고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법을 묻거든 말을 하되 모두 쌍으로 하여 전부 대법을 취하며 오는 것과 가는 것은 서로 인이라 마침내는 두 가지 법을 모두 없애버려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고 했다. 어둠은 스스로 어둡지 않고 밝음으로 어두운 것이며 밝음은 어둠으로 드러나니 오고 감이 서로 인연한 까닭이다. 또한 유와 무도 그러하여 있다에 대한 없다에서 중도가 드러나며 마침내 유무가 함께 사라진다. 선과 악도 이와 같아서 자기 마음이 만드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도 자체로는 양변이 없
어느 한 신이 한쪽에는 빨간색, 다른 한 쪽에는 파란색을 칠한 모자를 쓰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날, 들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 물었다. “파란 모자를 쓰고 다니는 신을 보았는가?” 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아닌데, 신은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네.” 두 사람은 이렇게 입씨름을 했다. 그런데 그 신은 한 번만 오고 간 것이 아니었다. 여러 차례 길을 오가면서 모자를 자꾸 돌려쓰는 바람에 본 사람마다 견해가 달랐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 고을의 왕에게 누구 말이 맞는지 재판을 부탁하러 갔다. 그 자리에 신이 다시 나타나 말했다. “내 탓이다. 내가 그렇게 했다. 내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했느니, 싸움을 붙이는 게 내 취미이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나이지리아에 전해지는 장난꾸러
연못에는 이른 아침부터 안타깝게 떠난 님을 사모하는 듯 개구리의 구슬픈 합창이 시작되고 있다. 육조단경 첫 머리에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진여의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다만 이 마음을 쓰기만 하면 바로 정각을 성취하여 마쳤노라고 했다. 육조스님은 이렇게 설하고 나서 자신의 지나간 역사를 들어보라고 했다. 나의 엄부께서는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영남 신주로 귀양을 왔는데 불행히 일찍 돌아가신지라 가세가 기울어지고 생활이 곤란한 가운데 참담한 생활을 했지만, 연로하신 노모가 계셨으므로 시장에 나무를 해다가 팔며 근심없게 정성껏 모셨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나무를 팔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객점 가까이서 경을 외우는데 “마땅히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 구절을 듣고 홀연히
티베트어로 '룽타(Lungta)'는 ‘바람의 말이 갖는 힘’이다. 룽(Lung)은 ‘바람’, 타(Ta)는 ‘말(言)’의 뜻이다. 히말라야 고원을 가보면 바위나 돌에 경전이 쓰여 있기도 하고, 오색의 삼각 깃발에 불보살님의 형상이나 경구를 새겨 깃대와 깃대 사이를 연결한 줄에 촘촘히 매달아 놓은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가을 하늘을 수놓던 만국기를 떠올려보면 되겠다. 나는 한 여름의 키 큰 나무에 달린 무성한 잎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햇살을 흔들 때면 넋을 놓고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리는 느낌을 갖는다. 90년 초, 인도 여행을 갔다가 히말라야 트레킹까지 한 적이 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왕복 코스였다. 이 코스에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는
고려시대 보조선사는 「간화결의론」을 지어 이 땅에 처음으로 간화선을 도입, 선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자리매김 시켰다. 수행이란 마치 무성한 번뇌의 수풀 속에서 잃어버린 마음의 소를 찾아나서는 것과 같고 다시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간화선을 제시한 것이다. 수행자가 간절한 발심으로 길을 나설 때 우선 요구되는 것은 마음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어 밖으로 구하는 마음을 쉬는 것이다. 마음이 본래 부처라는 확실한 믿음이 성취되면 마음은 작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일체가 마음 아님이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눈앞에 작용으로 나타난 마음의 소가 있는 줄은 분명하게 보았으나 아직 얻지는 못했기 때문에 간절한 정진을 끝없이 들이대면 문득 깨닫게 된다. 이것을 바로 돈오라고 한다. 돈오는 간절한 정진으로
‘이야기(narrative)’란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을 뜻한다. 영감이라는 것이 무의식에서 솟아나기 때문에 한 사회의 구성원들의 무의식은 대개 비슷한 일면을 가지고 있다. 샤먼이나 그 사회의 선지자들의 말이란 게 그 구성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면 내 이야기가 아니라며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종교나 신화를 알려면 그 이야기가 생겨난 배경을 이해해야 하고, 내포하는 메시지를 잘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표현이 은유적이어서 고정된 답이 없다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야기의 형식에 있어 ‘민담’이 보통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즐기기 위한 것이라면 ‘신화’는 영적인 교시를 위
세상을 디자인하는 남자 박원순. 그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후 그것을 사회로 회향했 듯 오늘날의 불교 역시 세상을 향해 대안과 실천을 제시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정하중 기자 국내 1호, 아니 전 세계 최초로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가 된 남자.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다. 2006년 신실학운동을 구현할 수 있는 중추로 정부와 기업, 민간이 연계된 싱크탱크 ‘희망제작소’를 설립한 이래 그는 스스로를 ‘소셜 디자이너’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를 ‘희망을 만드는’ ‘희망을 나누는’ 그리고 ‘희망을 심는’사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최근 발간된 그의 책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 『희망을 심다』의 제목처럼 그의 화두 역시 늘 ‘희망’이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가 불기 2553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한국 불자들에게 봉축 메시지를 보내왔다. 달라이라마는 4월 4일 티베트 망명정부 동아시아 대표부(대표 락파 쵸고)를 통해 메시지를 전해 왔으며 공식 메시지 전문을 우편으로도 전달해 왔다. 그는 봉축 메시지에서 한국 불자들에게 부처님오신날의 기쁨을 전하며 부처님이 설하신 이타행의 실천을 강조했다. 법보신문은 달라이라마의 봉축 메시지 전문을 게재해 부처님께서 이 땅에 나투신 참 의미를 나눈다. 편집자 인간의 몸으로 나투시어 깨달음을 얻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법을 설하신 지 2500여 년이 지났습니다. 석가 세존께서는 법을 듣고자 하는 일체 중생들에게 평화로이 가르침을 주셨으나 폭력으로 다른 사람을 협
오랜만에 큰 비가 내리니 초목들은 저마다 법열에 젖어 동자승의 해맑은 미소로 넘실거리고 있다. 그 동안 일체 흐름을 끊고 깊은 무명의 습기를 다스리던 골짜기는 이제 밑바닥을 치고 다시 노래 부르며 법성의 바다로 들어가고 있다. 지붕 위에 후드득 떨어지는 청량한 빗 방울소리를 들으며 모든 사람들의 정수리마다 함께 하여 욕불공양을 이루고 일시에 해탈하기를 발원해 본다. 고사리 밭에는 여린 주먹을 쥐고 솟구쳐 오르는 고사리가 천상천하유하독존을 외치며 모든 생명들은 본래 평등하여 누구나 부처임을 만천하에 선언하고 있다. 대지는 모든 생명들의 어머니가 되듯이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나자마자 외친 탄생게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불성은 남녀와 노소의 구별이 없으며 인간과 자연이 본래 평등한 존재이니 모든 경계를 허물고 인류의
세상에 수행보다 좋은 게 없고(世間莫若修行好), 천하에 밥 먹기보다 어려운 일이 없다(天下無如吃飯難).이 시는 북평(北平) 백운관의 주련인데, 명나라 때부터 내려오는 것이라 한다. ‘다반사(茶飯事)’는 말 그대로 밥 먹고 차 마시는 일로서 참으로 일상이요, 수행은 뭔가 특단의 용기가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시인은 정말 그럴까 하고 되물었다. 원래 밖으로 잘하기보다 안으로 잘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동서양의 개인과 사회에 대한 관계정립은 많은 차이가 난다. 자기 경험을 지혜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개인주의가 사회적 시스템으로 발전한 서양과 달리 동양은 전체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원만한 인간상을 선호해 왔다. 사회의 기능이란 것이 개인의 성취에 이익 되어야지 개인이 사회로부터 희생을 강요당하는 사회는 옳지 않
거리마다 꽃비가 내리고 골짜기 마다 꽃 사태를 만나는 행복한 요즈음 더욱 반가운 것은 자비를 나누는 절 수행이 절마다 꽃불처럼 번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님오신날을 기다리는 들뜬 마음을 억누르고 여러 이웃들을 먼저 부처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자비의 실천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건강과 함께 수행 방법으로 108배가 보편화되고 있으며 1080배와 3000배를 실천 하는 절도 많아지고 있다. 평소에 보통 사람들은 복잡한 생각이 일어나거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절을 통해서 참회와 발원을 하고 신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단속해 나간다. 그러나 자비심을 발하지 않고 나만이 잘 살면 된다는 이기심에 그치고 말면 내 가족은 지킬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이웃들의 아픔을 외면하게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