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이어 “맞다. 업이라는 것은 마치 눈과 같아 하루하루 쌓이면 치우기 힘들다. 당연히 수행도 미루면 나중에 정진할 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니 매일 수행하며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고시에 실패해 변호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108배, 삼천배 등을 통해 자아성찰 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마흔 살이 됐을 때 지인으로부터 아내를 소개받아 8개월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 전 아내는 2년 간 친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결혼 이후 교회를 가지 않고 나를
내가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군생활 중 같은 소대 선임병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을 권하면서부터다. 당시엔 작고 얇은 소책자였지만 나에겐 아주 큰 감동과 삶의 관점을 바꿔준 엄청난 책이었다. 몇 시간이면 읽고도 남을 책을 매일 조금씩, 조심스레 넘기며 각 페이지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음미하며 읽었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렇게 불법과 인연을 맺어 군생활을 법정 스님 책 속에 푹 빠져 지냈다. 왜 그랬을까.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돌아보며 생각컨대, 20대 초의 나는 아집과 편견, 호불호가 가득 찬 모습
부처님 가르침의 6가지 덕목 중에 산딧디꼬(sanditthko: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가르침)와 에히빳시꼬(ehipassiko: 와서 보라고 권유할 만한 가르침)이 있다.미얀마 집중수행은 그동안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체험함으로써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길이 유일한 길임을 가슴에 새기고 확신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수행 말미에는 교학의 필요성도 느껴서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사야도께 여쭈었는데 사야도께서는 미얀마 불교대학 입학을 권유하셨다. 이에 2020년 1월 미얀마 국제테라와다불교대학(ITBMU) 입학시험에 응시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하고 석경(石徑)에 배회하니.”불자라면 한번쯤 들어봄직한 고려시대 나옹 스님 토굴가의 도입 부분으로 스님처럼 일대사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끔씩 읊조리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시절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아 틈틈이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반야심경’ ‘천수경’ 그리고 대승불교의 소의경전이라 할 수 있는 ‘금강경’을 암송하는 등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1980년 전후 사회적 격동기였던 대학 시절에는 불교학생회 일원으로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이 두 가지 ‘믿음이 은산철벽’ ‘일미진중함시방’ 문구는 꾸준하고 성실한 염불수행의 뼈대가 됐다. ‘나무아미타불이 팔만대장경이다’는 내용도 알아차리는 연결통로가 되었다.‘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의 신묘함을 알리고 싶다. 48대원을 성취하시어 서방극락정토를 주관하시는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수지·칭명하며 늘 생각하는 염불수행에 대해 일반인들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토행자의 입장에서는 ‘나무아미타불’ 한마디가 온 우주를 덮고 있는 아미타부처님 48대원의 참 뜻과 성불의 과보를 모두 온전히 포함하고 있는 완벽한 성어(聖語)다. 아울러
어린시절 어머니는 시간이 나실 때마다 양산 통도사 등 고즈넉한 사찰을 주로 다녀오시곤 했다. 친할머니는 가족들을 위해 항상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 자연스레 부처님은 내게 수호자이자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각인됐다.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날 어머니께서 양산 통도사에 다녀오셨다며 한 권의 책과 붓글씨로 된 서예 1점, 염주 등 몇 가지 불교 용품을 보여주셨다. 어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통도사 가는 길에 우연히 노보살 두 분을 만나 함께 극락암 경봉 스님을 친견했고, 스님께서 책과 직접 쓰신 서예
오직 바른 스승과의 인연과 선지식의 높은 안목만이 나에게 맞는 공부를 단계별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로 늘 의심과 회의가 앞서니 여기저기 발만 담그거나 조금 하다 말면 늘 그 자리에 머물러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각산 스님께서도 언제나 강조하셨지만 수행은 늘 ‘조견오온’하는 것이다. 항상 내 몸과 마음을 살펴 반조해 보며 경전을 읽거나 수행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되돌려 써야한다. 누구나 그러하듯 일상의 곳곳에서 우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이 절에 가면 이년이
신심 깊은 불교집안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절에 나간 것도 아니지만, 어려서부터 스스로를 불자라고 생각했다. 원래 부처라는 말과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수평적 개념이 수직적인 기독교 신앙보다 월등한 진리체계로 보였기 때문이다.결혼 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당시 나는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았음에도 문득 마루바닥에 고요히 앉아있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표현 할 수 없는 내면의 외침을 따라 불교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이러한 인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귀국 후 돌아와서 절에 나갔으나 일상적인 법회만 왔다갔다 하며 절
물론 여전히 나는 탐행자, 진행자, 치행자다. 골고루 다 갖추었다. 욕심도 많고 화도 잘 낸다. 종종 어리바리하게 행동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욕심낼 때, 화낼 때, 어리바리할 때도 참주인공인 나는 항상 같다는 것을 예전엔 몰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은, 조금만 고민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선원에서 공부하기 전에는 몰랐다. 화를 내기 전의 나, 화를 내는 나도 결국 같은 나다. 그 ‘나’가 목종 스님이 강의시간에 내게 가르쳐주신 ‘참나’ ‘진여자성’ 임을 믿고 이해하며 조금씩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심한다. 이
무수한 인연으로 이어져 지금 여기 내가 있다. 나는 어떤 인연으로 불자(佛子)가 되었을까. 지난 기억의 자락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온다. 이 생에 태어나서 잘한 것 중 첫 번째가 불교와의 인연임을 당당하게 밝힌다. 어린시절, 관세음보살님은 나의 해결사였다. 조금이라도 어렵고 힘들면 그저 ‘관세음보살’을 염하곤 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할머니의 지극한 불심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불교와 만날 수 있었으니, 할머니의 손녀로 태어난 것에 감사를 드린다. 사실 불교는 30대까지 그저 그랬다. 어려울 때만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최후의 도피처 같은
수행을 시작한 지 2년 10개월만에 대비주 10만독을 성취했다.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했다. 많은 대중 앞에서 당당하게 수행기를 발표했으며 영상인터뷰도 해냈다. 그리고 법명 지안(智安)을 받음으로써 전에 있던 나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났다. ‘덕양선원’ 다음카페 수행일기 게시판에 처음으로 댓글 쓰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썼다가 지우고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모습은 마치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려고 부리로 수없이 껍질을 쪼는 것 같았다. 그러던 내가 이제는 수행일기도 쓰고 법문 필사도 한다. 도전하는 힘을 수행으
대비주수행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5년 전이다. 큰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담임이자 생활부장이었던 선생님 소개로 대비주수행을 만났다. 선생님은 당시 3학년인 아이의 문제로 상담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긴 상담 끝에 선생님은 내게 책 한 권을 주셨다. 그분은 교육현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법하는 수행사례로 ‘법보신문 무진등’에 소개된 조미경(수일) 선생님이다. 책은 일산 덕양선원 법상 스님의 법문 중 ‘대비주수행’에 관한 것들을 엮은 책이었다. 책에는 다양한 수행 사례들이 있었지만 모두 다 내 이야기 같았다. 책을
참회를 거듭하니, 모든 인연에 대한 감사함이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나약한 존재로 여겼던 나에 대한 참회와 동시에 용기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커졌다. 염불하며 정진했던 천일동안의 기도는 지금껏 살아온 모든 날 중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스님과 함께 한 천일동안 자연스레 예불의식을 익혔고, 어려웠던 경구들도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천수경’의 ‘無爲心內起悲心 (함이 없는 마음 중에 자비심 내어)’과 ‘願我恒隨諸佛學 (부처님을 따라서 항상 배우며)’이라는 두 경구(經句)가 나의 원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경
모두 코로나로 힘들고 지쳐가는 가운데 나는 날마다 부처님의 은혜 속에서 살려지고 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 작지만 소중한 신심이 전해지길 바라본다. 한없이 부족한 내가 힘든 모든 이에게 희망과 용기를 드릴 수 있기를 매일 기도한다.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데면한 시어머니의 이끌림에, 마지못해 사찰을 방문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나와 부처님과의 인연의 시작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어머니 따라 절을 방문하게 된 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지내며 1년에 한두번,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절에 갔다. 아
참선과 법문을 마치고 나면 10명 내외로 짜여진 조에서 도반들과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선원에 나오지 않는 나머지 날은 제일 조용한 방 안에서 최소 40분 정도를 앉았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시간표에 자율적으로 기록했다. 저녁에 일정이 있으면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잠시라도 한 점을 찍고 집중하려 했다. 몸이 너무 안 좋거나 피곤할 때는 방석이 아닌 의자에 앉아서라도 참선하려 했기에 나름 포기하지 않았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시간표를 채워나갔다. 그래서 몇 달 뒤, 기초반을 수료하던 날에는 무엇이라도 얻은 양 자신
즉금차처(卽今此處). 이 4자를 오롯이 이해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을까. 아니, 완벽하게 받아들이려면 몇 년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그 시간을 금강선원에서 혜거 스님, 참선반 및 청년반 도반들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보낼 시간이 힘들지 않을 것이라며 매번 감사하고 있다. 어릴 때는 어떤 종교에도 관심이 없었다. 부처님오신날처럼 공휴일이 주중에 걸리면 하루라도 더 놀 수 있길 기대하며 살았다. 그렇다보니 금강선원이 위치한 동네에서 30년 넘게 살았음에도 그 존재를 전혀 몰랐었다. 간혹 “금
참다운 수행이라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각산 스님의 ‘안반수의경’을 듣고나서다. 오랜세월 수행했지만 풀리지 않는 답답한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공부를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강의를 듣는데 용어가 낯설고 생소해 교학에 무지함이 부끄러웠다. 그후 참선법회에 참석해 지도에 따라 실참했지만 이상하게 숨이 가쁘고 불편했다. 스님은 “잘하려 하지 말고 숨쉬는 것을 알아치리기만 하라”고 말해주셨다. 어느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스님 글을 읽던 중 “마음의 드론 띄우고” 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글귀를 생각하며 내
내가 불교를 만난 것은 돌아가신 시아버님 시신을 둘러 친 병풍 앞이었다. 2대 독자의 외며느리로 그것도 막내며느리가 된 나는 6개월 정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산 것 외에 크게 정을 느낄만한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보내드려야 하나’ 생각하던 중 누군가의 지장보살을 부르면 좋은 곳으로 간다던데라는 말을 듣고 그때부터 나는 지장보살을 고성으로 부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먼데서 매 재를 어떻게 오냐며 ‘금강경’을 한편씩 독송하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들을 앉혀놓고 재 때 마다 ‘금강경’ 한편을 읽었다. 막재를 지내고 온 날, 꿈에 시아버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49가지’를 수행주제로 다루며 ‘MS버킷리스트 49’를 작성했다. 이중에 ‘시부모님께 애교 부리고 용돈 받아보기’가 있는데 시어머니의 기억이 희미해져서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도 진심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해 생신날 편지를 써 읽어드리니 곁에 있던 시누이가 어머님 대신이라며 용돈을 주었다. ‘리마인드 웨딩’도 잊지 못할 성취다. 전에는 남편 얼굴도 쳐다보기 싫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다 녹고 더 편안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어느날 남편의 건강이 악화돼 수술을 해야했다. 사업이 악화되면서 남편에 대한 주변의 여러
일산 덕양선원을 찾은 것은 2015년 3월1일로 내 인생이 최상의 길로 들어선 날이다.일찍이 교직에 몸을 담고 평탄하게 사는가 싶었는데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시부모님이 번갈아가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시면서 집안이 통째로 흔들렸다. 젊지 않은 나이에 0점도 아니고 마이너스에서 다시 시작하려니 경제적으로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슷하게 시작한 주위의 동료들과 자꾸 비교되면서 속이 상하고 우울했다. 또 거리가 먼 학교로 발령 받아 장거리 통근, 살림, 병간호 등 많은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을 몸이 감당해내지 못해 결국 한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