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요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절에서 요리할 때면 늘 행복하다는 생각으로 충만해진다. 특히 홍법사 사찰요리 팀은 백중기도 중 법사 스님의 대중 공양, 부처님오신날 내빈 공양 등 도량의 각종 주요행사에 참여해 공양을 준비하는 봉사를 하고 있어 더욱 환희심이 난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가을에는 주지 스님께서 뜻밖의 제안을 해주셨다. 홍법사 개산 16주년을 맞이하여 2000여 명의 사부대중을 위한 공양을 사찰요리팀에서 맡아 해보라는 말씀이었다. 너무 놀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은 사바의 세계”라 하셨다.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사바세계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탐(貪), 진(瞋), 치(痴) 삼독(三毒)의 번뇌를 겪어내야 하고, 고통을 참고 살아야만 하는 세계…. 인내를 강요당하는 세간, 인내하지 못하면 안 되는 세계, 그것이 사바세계라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무던히도 견디며 왔다.우리 모두 숱한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다양한 인생살이에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사소한 나의 신행과 원력이나마 글로 옮겨보고자 한다
황산 스님께서는 늘 청소년 포교를 고민하고 계셨다. 당시 교사의 경험으로 스님께 국제청소년성취포상제 활동을 제안 드렸고 지금은 황룡사가 전국에서 청소년 포교를 가장 잘하는 곳으로 손꼽히고 있다는 소식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수원에 살던 며느리도 울산으로 이사를 오면서 황룡사의 국제청소년성취포상제 지도교사로 4년 동안 활동했으니 이 또한 감사하고 보람이 깊다.안타깝게도 세상은 코로나19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일상의 질서가 무너진지 오래다. 불안한 지금도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깝게’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기에 딱 좋은 코로나 극복
“인연 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구제하기 어렵다.”나이 들어갈수록, 지난 세월 되돌아볼수록, 저절로 다가온 좋은 인연들이 정말 고맙다. 그중에서도 늦게라도 부처님 만난 복, 때마다 훌륭하신 스님 만난 복이 최고로 고맙다.교사 출신인 나는 나이 50이 되도록 특별한 종교를 가진 적 없이 흔히들 그러하듯 바쁘게, 열심히, 한눈을 팔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게 최선인 줄로만 알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단짝 친구가 통도사 화엄산림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여행 삼아 나선 길이 부처님을 향한 인연의 첫걸음이었다.오래되
사띠스쿨은 20년 전, 당시 통도사 스님이셨던 붓다빨라 방장 반떼지(스님)께서 인도에 불교를 복원하시겠다는 서원을 세우시고 준비하신 교육기관이다. 2018년에는 기숙학교 허가를 받아 국제수행전문학교(International SATI Research Institute)도 문을 열었다. 사마넬라 반떼지(사미)들이 입학해서 수행과 예불 등을 빨리어, 힌디어, 영어로 배우고 또 컴퓨터도 배우고 있으며 수행지도자의 길을 걷기 위해 교육받고 있다. 전 세계에서 사띠 수행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오면 언제든지 출가할 수도 있다. 바로 이 학
30여 년 전, 책에서 본 호흡 수행을 따라해 보면서 몸에서 물방울 같은 것이 흘러내리는 현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숨만 제대로 쉬어도 이런 현상이 생기는구나. 그렇다면 삶도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걸까?’하는 의문을 화두처럼 늘 마음에 품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인이 매우 곤란한 일이 있어서 힘들 때, 스님 법문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고 하며 스님을 친견하기를 제안했다. 그 스님을 찾아뵙고 삼배를 올리니 스님께서 “무엇이 궁금해서 왔는고?”하고 물으셨다. 나는 “제대로 된 삶을 살려면 어떻게 배
직장과 집으로 쳇바퀴처럼 바쁘게만 뛰며 살아왔다. 그렇게 살다보니 나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자비로운 스님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선물을 더 크게 받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정토사는 직장과 가정을 이어주는 나의 행복 에너지 충전소로 자리매김했다. 좋은 법우님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나 또한 좋은 법우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한 노력을 거치면서 좋은 법우들과 함께 정진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고 108배와 성지순례로 건강도 되찾을 수 있었다.나는 그동안 억울함을 당하면 참을 수 없을 만큼 속상하고 화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수계식을 하고 법명을 받았던 그날, 지난 2016년 겨울 울산 정토사의 불교 기초교리반 1기 수료식이 떠오른다. 집 근처에 위치한 정토사를 찾아 당차게 기초교리반의 문을 두드렸지만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며 불교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평소의 일상에 많은 변화를 요구했다.그나마 기초교리를 배울 때는 일단 지각을 하더라도 결석은 하지 말자는 각오였다. 수업을 마칠 시간에 겨우 사찰에 도착한 적도 수차례였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이날 수료식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스스로가 얼
참회의 절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 경남 하동 칠불사로 성지순례를 갔을 때였다. 당시 지금은 입적하신 통광 큰스님께서 법문으로 참회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법문을 들으며 나도 참회를 하면 좋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참회하며 절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오게 되었다. 가족과의 갈등이 생기더라도 매월 말일 참회의 108배를 하며 반성을 했다. 절을 할 때는 정신을 집중하여 전심전력으로 했다. ‘언제 이런저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참회합니다.’ 하며 절을 하면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참회할 일이 많다 싶으면 연말에 모아서 다시 참회의
24살 때 즈음으로 기억된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께서 절에 다니시는 모습을 보고 자란 나는 결혼 후 ‘나도 절에 가고 싶다’는 원을 갖게 되었다. 마침 이웃의 보살님께서 부산 사하구 당리동에 있는 관음사에 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함께 가고 싶어요”하며 반가움에 말씀을 드렸다. 마침 다음 날이 음력 보름이니 같이 가자고 하는 보살님을 따라 관음사에 첫발을 딛게 된 것이 어느새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의 이야기가 되고 보니, 세월의 흐름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불교 교리와 예절도 몰랐지만, 사찰을 향하는 발걸음은 마냥
어느덧 미타선원 명상 지도사 과정은 나에게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전생부터 지금의 나에 이르기까지,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바르지 못한 습관들이 ‘나’라고 믿으면서 어리석음을 무한 반복하며 살다 보니 업은 누구보다 두터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명상을 통해 그러한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맑게 깨어있음을 당부해 주신 스님과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는 수업을 매 순간 열려 있는 마음으로 동참하는 것에 집중했다. 생각과 고정된 관념을 시나브로 내려놓게 되면서 ‘나’ 스스로에게 위로받고, 용서하며 정화와 치유를 하는 과정에
“네 형부가 미타선원에서 명상 지도사 과정이 개설된다는 소식을 알려주는구나. 나보고 한번 도전해 보래.”지난해 나는 결혼 후 10여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쉬고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던 하루하루에 쉼표를 새기며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언니와 전화 통화를 하던 중, 언니의 이 말에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소식을 만난 것 같은 무엇인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언니야! 나도 해 볼까?”라는 답이 불쑥 튀어 나왔으니 말이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돌이켜보면 필연적으로 미타선원 명상 지도사 자격 과정에 입문하게 되었다. 미타선원 명상 지도사
다라니 기도를 하기 전 108배 참회 기도를 하는 것과 그냥 다라니 기도를 바로 하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참회 기도를 하고 기도를 하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면서 기도 집중이 훨씬 잘 되었다. 다라니 기도 3년을 회향하고 나서는 참회 기도에도 마음을 쏟았다.‘참회합니다. 참회합니다.’ 108배를 하면서 내가 살아온 지난 과거를 들여다보았다.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직장 시절, 결혼 후 생활, 부모님께 어떻게 하며 살았는지, 남편에게, 자식에게, 이웃에게, 도반에게, 인연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며 살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사람별
33년 전쯤으로 기억이 된다. 군인 가족이었을 때 군법당과의 인연이 불교에 첫발을 딛게 된 계기였다.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법당에 가면 아들은 법당에서 기어 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이렇게 불교와 인연이 되었고, 부산으로 이사를 내려오게 되면서 불교는 내게 더욱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종교가 되었다.부산에서 지낸 이후로 틈틈이 인연 닿는 사찰을 순례하듯 찾아다니면서 기도를 이어가던 중, 한 스님의 권유로 매일 신묘장구대다라니 21독을 해보라는 제안을 통해 다라니 기도를 알게 되었다. 다라니 기도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면서, 부산에서는
돌이켜보니 그 기간은 우리 부부를 공부시키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남편으로부터 나의 기도 덕분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런 남편의 변화는 오히려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나야말로 남편과 아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가까운 이들을 배려하고 더 낮은 자세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사무쳤다. 종무소에서 봉사 도우미 제의를 받았을 때도 감사함과 참회의 수행으로 여기며 이번에는 남편에게 허락을 받아 2년동안 종무소 봉사에도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다.봉사 활동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더 많았다. 특히 사찰에서 진행되
결혼 전에는 어머니를 따라 한두번 절에 간 기억이 전부였다. 결혼 후는 시어머님께서 다니시는 절을 따라가게 된 이후 초하루마다 동행하게 되었고, 절이 집에서 다니기에는 다소 먼 곳으로 이전했음에도 어머니와 함께 15년 정도 신행 생활을 지속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늘 부족함을 느꼈다. 사찰의 규모가 작다 보니 개인 기도를 하기에는 좋았고 그래서 기도하는 힘도 많이 길러졌지만 법문이나 불교 공부를 체계적으로 배우기에는 갈증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시간이 나면 집 근처의 다른 사찰에서 사경을 했다. 처음 다니던 절의 스님께서 숙제처럼
사경수행을 열심히 하면서 절을 좀 덜 찾았다. 그 전에는 절을 제집 드나들 듯 했었다. 하루에 5000배도 했었고,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도 3년씩 2번이나 했다. 1000개의 초를 켜고 혼자서 하루 꼬박 기도한 적도 있다. 지인과 둘이서 밤새 기도했던 기억도 있다. 백일기도, 천일기도, 합동기도 등 절에서 하는 기도에 동참한 것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그때는 절에 가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조금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절에 가지 않아서 그런가’하는 생각부터 했었다. 그러나 사경을 열심히 한 이후로 큰 행사 때와 특
저녁 10시. 향을 사르고 잠시 명상에 잠겼다. 사경을 시작하기 전 몸과 마음부터 가다듬는다. 선망부모조상님들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사경에 들어간다. 대개 11시에 사경을 끝낸다. 하루 중 가장 경건한 시간이다.사경수행을 시작한 때가 1991년이었으니 28년째다. 예전 같으면 강산이 3번 변하는 시간을 거친 셈이다. 중간에 잠시 쉰 적이 있으나 거의 지속적으로 사경했다. 아는 선배의 동생이 비구니스님이셨다. 스님께서 ‘반야심경’ 사경집 10권을 주면서 인연 있는 사람에게 주라고 했다는데, 내게로 왔고 내가 사경을 접한 계기가 됐다.
회향일인 11월13일은 개인적으로 울산 해남사 무료급식소 봉사일이었다. 아침 시간에 일찍 법당을 참배하고 ‘금강경’을 7독 했다. 이후 법당을 나와서 무료급식소에서 1시간30분 동안 봉사했다. 다시 법회 시간에 맞춰 법당에 올라가 ‘금강경’을 독송하고 오후 일정까지 빠듯하게 독송하면서 회향일 저녁까지 21독을 원만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날마다 21독을 하는 체크리스트도 들고 다녔다. 회향한 뒤 두 아이에게도 편지를 써서 보냈다. 기도의 감동을 가족들과 나누며 회향할 수 있어서 기쁘다. 법회를 마치고 얘기를 나눠보니 불자님
단풍이 예쁘게 물들어가는 지난 10월24일부터 시작된 울산 해남사의 ‘금강경’ 21일 21독 독송 대법회와 인연을 맺으면서 경험한 수행담을 짧은 글로 풀어내고자 한다. 올해 봄학기에는 해남사에서 ‘금강경’ 수업을 받았다. 그 수업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예전 통도사 서운암에서 철야정진을 하며 ‘금강경’ 독송을 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내용도 모르고 뜻도 새길 겨를 없이 독송에 매진한 시절이었지만 당시 느낀 환희심은 상당했다. 그때 ‘금강경’ 기도를 하던 시기는 아버지께서 병원에 계시는 3년 동안이었다. 이 기도 기간 중 아이가 어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