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도시 루앙프라방의 아침은 황색 가사를 두른 스님들의 느린 걸음으로 시작된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 루앙프라방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긴 탁발행렬은 이 도시의 트레이드마크이자 라오스를 찾는 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문화체험기회다. 란쌍왕국의 마지막 계승자였던 루앙프라방왕국, 그 중심지였던 루앙프라방은 옛 왕국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자 오늘날 라오스불교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1694년 수린야웡사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한 후 란쌍왕국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후손들은 위엥짠(비엔티엔),
강성했던 란쌍왕국의 지도자 쎄타티랏은 버마족 따웅우왕국의 침입에 대비해 비엔티엔을 새로운 수도로 낙점했다. 천도를 앞두고 비엔티엔에는 대대적인 건설공사가 진행됐다. 국왕이 거처할 왕궁뿐 아니라 에메랄드불상을 모실 사원도 지어졌다. 관공서, 귀족들의 거처와 도로정비 등등.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실상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일, 이 모든 건축물들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중심이 되어줄 기준점이 필요했다. 쎄타티랏은 그 중심점으로 사원 한 곳을 지목했다. 1563년 쎄타티랏이 세운 사원 왓씨므엉은 새롭게 수도가 된 비엔티엔의 배
1548년 쎄타티랏이 란쌍왕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에메랄드불상을 앞세운 그의 귀국은 강력한 왕위 계승권자의 등장을 알리는 화려하고 웅장한 행렬이었다. 행렬의 선두, 화려하게 장엄된 에메랄드불상 프라케오가 그의 권위를 대변하고 있었다. 란쌍왕국의 전성기, 가장 강성했던 시기를 연 쎄타티랏왕(1548~ 1571 재위)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란쌍왕국은 쎄타티랏왕에 의해 가장 큰 번영을 이룬다. 물론 그의 아버지 포티싸랏왕(1520~1548 재위)이 다져놓은 정치·외교적 안정과 문화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독실한 불교신자였
라오스를 대표하는 두 곳의 도시는 수도 비엔티엔과 옛 수도 루앙프라방이다. 라오스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위엥짠과 루앙파방이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발음은 프랑스식민지배시기의 흔적이다. 도시의 이름은 국가의 흥망과 지배권력의 흔적을 담고 있다. 불교의 전래와 확산의 자취도 이름 속에 담겨있다.헌법이 밝히고 있듯 라오스 역사는 14세기 파 응움(Fa Ngum) 왕이 건립한 란쌍왕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란쌍은 라오족이 건국한 최초의 통일국가였다. 란쌍 건국 전 라오스지역에는 ‘므엉’이라 불리는 마을 단위 지배권이 형성돼 있었다. 대부
인도차이나반도의 이름은 슬프다. 인도와 중국 사이. 그것뿐이다. 그 이름에는 어떤 특징과 주체성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를 지칭할 때 성씨와 이름을 이야기하는 대신 ‘김씨네와 박씨네 사이에 살고 있는 아무개’라고 말하는 듯 하다.인도의 동쪽, 중국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땅은 오래전부터 인도와 중국의 정치·문화적 영향을 받아왔다. 인도와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인류문화를 이끌어온 거대한 축이 아닌가. 그러니 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오히려 인도와 중국의 앞선 문화를 가장 지근에서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