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해여! 철해여!…그대 오늘사 훌훌히 털고 비로소 적조에 쉬게 되는구려! 다시는 오지 마시오. 뒤돌아보지 마시오. 모든 연사(緣事) 다 놓으시고 적멸의 본공으로 돌아가시오. 오늘 그대 걸음이 나는 한없이 부럽습니다. 따라갈 날이 손꼽아 기다려집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대가 심어둔 구절초가 다니시던 길 하얗게 지키며 찬 이슬에 떨고 있네요.’(운성 스님 조시 중)
10월26일 오전 11시, 경주 기림사 천불전 앞에 마련된 영단. 사람들의 비통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정 속의 철해당(鐵海堂) 종광(宗光) 스님의 시선은 무심한 듯 경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 말사인 기림사는 종광 스님과 인연이 깊은 사찰로 그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스님은 1999년 긴 만행 끝에 바랑을 내려놓고 이곳 주지를 맡았다. 본격적인 불사에 착수해 전통도량의 위상을 되찾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다양한 신행 모임을 결성하고 템플스테이를 통해 경주 지역 대중 포교에 앞장섰다. 경주시 장애인 종합복지관을 맡아 장애인들의 문화생활 영위와 권익을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아수라야구단을 창단해 불교계 및 사회인 야구단이 참여하는 야구대회를 개최한 것도 기림사 주지로 있었을 때였다. 이날 천불전에서 묵묵히 영결식을 지켜보던 소조비로자나삼존부처님이 환골탈태의 과정을 거쳐 통일신라의 옛 위엄을 되찾은 것도 종광 스님의 원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광 스님은 1956년 8월1일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1968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성림당 월산 대종사를 은사로 출가해 사미계를 수지했다. 4년간 가야산 해인사 강원에서 경전을 익힌 스님은 교학 연찬에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1971년 그곳 해인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스님은 불국사, 송광사 등 제방선방에서 정진하는 등 선(禪)과 교(敎)를 두루 닦아나갔다. 선이 교를 등지면 길을 잃을 수 있고, 교가 선을 등지면 메마른 지혜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근대 대강백 학봉 스님을 은사로 전강을 받은 종광 스님은 주변의 요청에 따라 1991년 법주사 불교전문강원 강주를, 1995년 남원 실상사 화엄학림 강주 등을 역임하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스님은 종단 일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1990년 11월 도법 스님을 비롯한 80여명의 중진 스님들과 함께 선우도량을 창립해 종단의 자주화 및 개혁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11~14대 종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정론으로 잘못을 꾸짖고 종법질서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스님은 2010년을 전후해 기림사 주지, 능인학원 이사장, 경주장애인종합복지관장 등 여러 소임을 내려놓고 함월산 산내암자인 지족암에 머물렀다. 그곳에 상주하면서 선사들의 어록을 궁구하고 지인이나 후학들과 더불어 선과 경학을 주제로 대화하고는 했다. 스님에게 간암 말기라는 불청객이 찾아왔음을 안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스님은 이를 담담히 받아들였고 10월24일 오후 1시 지족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66세 법랍 53세였다. 스님은 세연을 마치기 전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았던 일생을 몇 구절의 언어로 압축한 임종게를 남겼다.
‘이 물건 본래 고요하여 한 움직임도 없지만/ 이치와 모습이 서로 아울러 하나 되어/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네!/ 생사 열반에 차별 없어라 부처와 중생이 동락하여라(此物本寂寂하고 性相混用用이라 吾汝無二相이니 佛衆同樂行이라)

이날 영단에 세로로 길게 쓰인 임종게는 종광 스님이 세상을 향한 마지막 법문이고 일깨움이었다. 영결식은 명종오타로 시작됐다. 조계종 어산어장 정오 스님의 영결법요, 문도대표 혜원 스님의 헌향·헌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정문 스님의 행장 소개 순으로 진행됐다. 이어 불국사승가대학원장 덕민 스님의 영결사와 조계종 원로의원이며 불국사 회주 성타 스님의 법어를 시작으로 인연이 지중했던 이들의 조사가 이어졌다.








“오호애재라. 그렇게는 보낼 수는 없는데 그렇게 혼자 가는가! 언젠가 만나니 선사도 강사도 아닌 영원한 학인으로 정진하자던 맹서를 잊었는가. 부질없는 언어문자 이젠 탈각해버리고 지저시(只這是) 진여일심(眞如一心)으로 훨훨 떠나게나.”(불국사 승가대학원장 덕민 스님)
“지족암을 세워 안분지족하며 찾아오는 후학을 제접하더니 오늘 이렇게 소식을 전함은 생사자재의 기별을 알리려 함입니까? 부디 속히 사바세계에 돌아오셔서 중생들을 일깨우소서.”(불국사 회주 성타 스님)
“스님의 뜻을 이어 우리 대중들은 어디 가든 주인이 되어 진리의 길을 향해 중생과 함께 동락하겠습니다.”(불국사 주지 종우 스님)
“깨달음의 경계에는 왕래가 없고 적멸은 언제나 여여하다 하지만 화상의 영정 앞에서 이별의 한을 어떻게 잊어야 할지 무너지는 가슴을 쓸어안고 슬픔의 눈물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아아, 슬프고 슬프도다.”(봉은사 전 주지 원학 스님)
“이제 육신은 가시지만 자오자증의 삶을 사셨던 스님의 가르침과 자비의 실천은 영원한 법신이 되어 주소서! 한없는 존경과 그리움으로 향을 사르며 26만 시민의 이름으로 합장 올려 극락왕생을 비옵니다.”(주낙영 경주시장)
“스님께서 적요의 세계로 드셨지만 저희는 스님께서 대승보살처럼 이 사바세계로 다시 오셔서 부족한 저희 중생을 교화해주시길 기원합니다. 스님의 지혜와 자비행이 다시 어디선가 꽃피길 기원합니다.”(이영경 동국대 경주캠퍼스 총장)
이어 “철해여! 철해여!”로 시작하는 도반 운성 스님의 조시가 낭독되자 여기저기서 종광 스님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눈물을 닦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성타 스님을 비롯해 보선, 법달, 정우, 덕민, 종우, 원경, 정문, 원학, 영배, 보인 등 스님들과 김형규 법보신문사 대표, 남배현 조계종출판사 대표 등의 헌화와 문도대표 혜원 스님의 인사말, 사홍서원을 끝으로 영결식이 마무리됐다.
각각의 인연으로 천리가 멀다 않고 영결식에 참여했던 이들은 종광 스님의 진영과 기림사를 뒤로 하고 하나둘 떠나갔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한 맺힌 슬픔과 고통을 견디어낸 정업(淨業)의 뿌리가 유유자적하게 남아 또 다른 만남의 기쁨으로 승화되길 염원하면서 추모의 정을 끊고져 한다”던 한 도반 스님의 애끓는 조사가 함월산에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한편 종광 스님을 추모하는 초재는 10월30일 불국사 무설전, 2재는 11월6일 기림사 지족암, 3재는 기림사, 4재는 기림사 지족암, 5재는 진해 대광사, 6재는 칠곡 죽림정사, 49재는 불국사 무설전에서 각각 오전 10시에 봉행될 예정이다.
경주=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대구지사=윤지홍 지사장
[1607호 / 2021년 11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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