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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펴낸 기림사 지족암 종광 스님

권위에 주눅들지 않는 자유로움이 임제선의 생명력

▲ 종광 스님은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해 다 함께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 임제 스님의 가르침"이라고 강조했다.

경주 기림사(祇林寺) 주지를 맡았던 종광 스님은 몇 해 전 ‘물소리 좋다’며 계곡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솔향기 진한 숲 속에 ‘지족암(知足菴)’ 세워 놓고는, 이 절경 속에 암자 하나만 있는 게 못내 아쉬웠던지 암자 옆 오솔길 끝에 수계정(水溪亭) 하나 더 세웠다. 토함산서 시작된 물은 계곡 따라 내려오다 지족암과 기림사를 거쳐 세간으로 나간다. 석굴암 부처님 말씀 또한 물길에 얹혀 흘러오는데, 팔만법음 한 소절 건져 올려 다관에 담아 음미해보려 이 수계정을 지었는지 모를 일이다.

월산은사 출가·학봉은사 전강
서옹·일우 법석에서 임제 인연
종회의원·기림사 주지 내놓고
임제진의 꿰뚫어 대중에 설파

격의 없는 선문답서 요체 체득 
인가·깨달음 천착하면 선 곡해
부처·조사도 단칼에 쳐버린 뜻
‘신’아닌 ‘인간가치구현’ 메시지

비약이 아니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기림사 주지 다 내려놓고 지족암 수계정에서 차 한 잔 하던 종광 스님은 어느 날 ‘임제록’을 들고 세간에 나왔다. ‘실력은 다소 미흡하지만 임제의 뜻을 다함께 나눠보고 싶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동산반야회 법석에서 펼쳐진 종광 스님의 임제강의는 큰 호응을 얻었다. 그 강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최근 ‘종광 스님 강설 임제록’(모과나무)을 내놓았다. 대강백의 눈에 임제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임제마저도 단칼에 가를만한 번득이는 활인검 하나 얻어 볼 요량으로 지족암을 찾았다.

▲ 지족암 오솔길 끝에 수계정이 자리하고 있다.

종광 스님이 사미계를 받은 것은 1968년이지만 입산은 훨씬 이전이다. ‘절에 안 가면 단명할 것’이라는 말에 ‘동진출가’ 했을 것이라는 전언도 들었던 터라 그 속내가 궁금했는데 ‘절과의 인연은 절로(저절로) 됐다’며 웃음짓고 만다. 출가 이전 일에 굳이 매일 이유 없다는 뜻이리라.

종광 스님이 1991년 법주사 강원에서 강주 자격으로 처음 강단에 서게 된 건 수년이 지나도 문을 열지 못하는 총지선원에 ‘종광, 자네라도 가 앉아 있으라!’는 월산 스님의 당부에서 비롯됐다. 그 즈음, 법주사 강원 강주를 맡고 있던 운성 스님이 송광사로 가게 됐다. 당시 주지였던 월탄 스님이 종광 스님이 머물고 있던 염화실로 찾아왔다.

“우리 문중에 강주스님이 없으니 맨날 외부에서 모셔와야만 해! 이젠 그것도 힘들어.”

금오 문중에 강주 스님이 귀했던 건 아마도 ‘선 수행에 진력하라’는 금오 스님의 선풍 때문일 것이다. 탄식만 하던 월탄 스님이 잠시 말씀을 멈추고는 종광 스님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자네, 전강 받았지?”

아궁이에 불 한 번 때 드리려 해도 “내가 직접해야 불 조절 할 수 있다”며 한사코 사양했던 스님, 평생 동안 시자 한 사람 두지 않고 밥 짓는 일부터 양말 한 쪽 빠는 일까지 직접 챙겼던 스님. 동화사 강원에서 명망이 높았던 학봉 스님이 종광 스님의 전강은사다.

월탄 스님의 당부도 마다할 수 없었던 종광 스님은 월산 스님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자네가 할 일이라 생각하면 해야지!”

허락이 떨어졌다. 1991년 법주사 불교전문강원 강주로 처음 교단에 선 스님은 1995년 실상사 화엄학림 강주까지 8년여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 종광 스님은 “경전을 소홀히 하면 선의 진면목도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단언한다.

종광 스님이 ‘임제록’과 첫 인연을 맺은 건 1972년 동화사 조실 서옹 스님이 금당선원에서 ‘임제록’을 설하던 때이고, 두 번째 인연은 1979년 송광사에서 일우 스님이 설한 ‘임제록 법석’에 참여하며 맺어졌다. ‘그 누구보다 임제를 적확히 꿰뚫었던 선사’로 칭송 받은 서옹 스님은 임제의 ‘무위진인’에 착안해 ‘참사람’을 세상에 설파했다. 일우 스님 또한 승속의 경계마저 허물며 ‘선의 진면목’을 전했던 선사다. 선교겸수, 내외명철했던 두 선지식으로부터 ‘임제 소식’을 전해들은 건 종광 스님의 큰 복이다. 여쭈어 보았다. 왜 임제인가?

“조계종 스님이 입적하면 빼놓지 않는 축원이 있습니다. ‘황매산 아래서 스스로 부처님과 조사들의 심인을 전해 받고 임제 스님 문중에서 영원한 인천의 안목이 되어주소서!’ 다시 사바세계로 돌아와 임제 뜻을 이어달라는 뜻입니다. 임제를 향한 조계종의 존경심을 대변합니다.”

내로라하는 역대 선지식들 모두가 임제를 존경했다하니 그는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게 분명하다. 어떤 깨달음인가? 종광 스님은 임제의 깨달음 이전에 분명하게 살펴야 할 게 있다며 임제의 대오과정을 들어 보였다.

임제를 깨달음의 세계로 처음 이끈 건 황벽이 아니라 선원의 선배 목주도종 스님이다. ‘방장스님께 여쭤 보았느냐?’ ‘아니요.’ 목주는 ‘가보라! 가보라!’며 임제의 등을 떠밀다시피 한다. 황벽에게 ‘불법의 대의’를 세 번 물었던 임제는 세 번 모두 흠씬 두들겨 맞는다.

“참 순진한 임제입니다. 선배가 가보라 하니 묵묵히 가지 않습니까? 천지를 호령했던 임제도 시작은 이렇게 조촐했습니다.”

낙담한 임제가 하산하려 하자 황벽은 ‘대우 스님에게 가 보라’ 한다. ‘황벽 스님이 노파심을 내며 너를 위해 정성을 다해 가르쳤건만 너는 나에게까지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묻느냐’는 한 마디에 임제는 황벽불법무다자(黃檗佛法無多子) 즉 ‘황벽의 불법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며 깨쳤다. 스승과 제자의 줄탁동시 지도편달 중요성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종광 스님도 그 일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978년 송광사 선방에서 정진할 때였다. 어느 순간, 법당과 도량은 물론 그림자처럼 펼쳐져 있던 조계산마저 사라졌다. ‘아, 이것이 깨달음이구나!’ 당장 방장 구산 스님에게 달려가 고했다. ‘제가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느냐?’ ‘일체가 탕연공적(蕩然空寂)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구산 스님이 ‘이리오라’며 슬며시 종광 스님의 손을 붙잡았다.

“그때, ‘기특하다’며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시는 줄 알았지요. 헌데, 방석 밑에 있던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는 겁니다. ‘아프냐?’ ‘예 아픕니다.’ ‘방금 탕연공적하다 하지 않았느냐. 주관과 객관이 모두 사라졌을 터인데 어떻게 아픈 놈이 있을 수 있겠는가?’ 구산 스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제 평생의 살림살이는 ‘반딧불 탕연공적’으로 끝났을 겁니다.”

수행 중 한 번 쯤 직면할 수 있는 체험에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스승의 지도는 그래서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종광 스님은 더 중요한 게 있다며 임제의 대오과정을 이어갔다.

‘오줌싸개 같은 놈아, 조금 전 허물여부를 따지더니 이젠 황벽의 불법을 말하느냐? 무슨 도리 보았는지 빨리 말하라’는 대우의 다그침에 임제는 그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박는다. 스승의 문하로 돌아온 임제, ‘대우 이놈 따끔하게 한 방 먹이겠다’는 황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릴 것 없다’며 황벽의 뺨을 후려친다. ‘미친놈이 호랑이 수염을 잡아당긴다’는 스승의 일갈에도 주눅들지 않고 ‘할’로 맞섰다. ‘덕산 방(棒)’에 이은 ‘임제 할(喝)’은 이렇게 태동했다.

“느닷없이 세 번이나 맞아 놓고도 황벽이나 목주 스님을 임제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주 없음을 자탄합니다. 하지만 호랑이가 되어서는 스승을 늙은이라며 뺨도 때립니다. 제자의 당돌함마저도 기백으로 인정하며 흡족해 하는 황벽의 너그러움 또한 일품입니다. 선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 속에서 이뤄집니다. 스승과 제자, 도반과 도반 사이에서도 ‘법’을 놓고 불꽃 튑니다. 선에 드라마틱한 활력과 반전이 있는 것은 이런 생명력 때문입니다. 이 선문에 흐르는 건 권위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선의 자유로움과 호방함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진리를 향한 발걸음 앞에 권위가 가로 막고 있다면 그 무엇이든 당장 거둬버리라는 뜻이리라.

“선과 연관된 모든 권위와 위선도 털어버려야 합니다. 부처나, 조사들의 권위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게 살불살조(殺佛殺祖)입니다. 연극 무대서 판사역할 한다고 법정에서 판결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듯, 황벽의 말에 끄달려 헤매면 황벽 흉내밖에 못 냅니다. 진리를 얻고자 한다면 고정관념부터 부숴 버리라고 임제는 말하고 있습니다.”

종광 스님은 우리 선문이 깨야 할 첫 고정관념은 ‘깨달음’이라고 설파했다. 한국 선에서 횡행하고 있는 깨달음은 너무 추상적이라는 지적이다. 깨달음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려 하는 지금의 선은 분명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고 단언한다.

“초전법륜 당시 부처님은 5비구에게 사성제를 설한 후 ‘이 세상에는 6명의 아라한이 있다’ 하셨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규정이 더 이상 필요한가 말입니다. 당장, 세상 뒤 엎을 것 같은 깨달음, 깨닫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그대로 법이 된다는 식의 인식은 곤란합니다. 그러한 사고체계는 당장 깨부숴야 합니다.”

잘못된 인식의 조작으로 만들어진 깨달음이 오만과 편견을 낳았다고 한다. 일례로 ‘인가’의 참 의미는 새겨보지도 않으면서 형식적 인가에 따라 도인여부를 판단하려는 세태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살림살이는 자신이 잘 압니다. 자아성찰, 회광반조는 외면한 채 5가7종 선맥도에 자신을 꿰어 맞춰 권력과 권위를 얻으려는 처사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그런 식의 계보라면 조선시대 양반 족보와 다를 바 없습니다. 황벽이 임제에게 인가의 증표로 선판을 주려하자 임제는 시자에게 불을 가져오라 했습니다. 태워버리겠다는 겁니다! ‘내가 바로 선 이상 스승의 그림자 또한 필요없다’ 이겁니다. 임제는 ‘깨달은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늘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화를 내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시기질투하며 괴로워하는 우리들에게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 곳이 진리가 된다’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제 스님이 신이든, 부처든, 절대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인간의 참 가치를 전하고자 함입니다. 신이 되자는 게 아닙니다. 참다운 인간성을 회복해 다 함께 행복하게 살자는 겁니다.”

종광 스님이 ‘임제록’을 들고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우리는 지금 참다운 인간이 되려 노력하고 있는가?’ ‘임제록’을 관통하는 활인검은 없다. 물음만 있을 뿐이다. 내 도반과 이웃의 손을 잡고 멋진 세상을 가꿔보려는 단 하나의 실천이라도 하고 있는가?

수계정 주련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봉림 선사와의 선문답 과정에서 임제 스님이 세상에 전한 일구를 종광 스님의 도반 원학 스님이 썼다.

‘강산을 홀로 비추는 둥근 달은 고요하기만 한데(孤輪獨照江山靜·고륜독조강산정)/ 스스로 크게 웃는 그 소리에 천지가 놀란다(自笑一聲天地驚·자소일성천지경).’

수계정에 가을비 내리니 계곡 물소리 더 청량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67호 / 2014년 10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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